내비게이션을 켰다. 목적지까지 ‘2시간 반’ 소요 예정이라고 했다. 평소보다 삼십 분 단축된 시간이었다. 새벽이라 도로에 차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예상 소요시간보다 한 시간 여유 있게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에 속았던 경험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대로에 진입했더니 정말로 차가 없었다. 평소 대부분의 소요시간은 올림픽 대로를 통과하면데 쓴다. 항상 차가 막히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텅텅 빈 도로라면? “우리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 아냐? 미리 가서 모 하지?” 입이 방정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사리를 지나자 차들이 조금씩 늘었다. 남양주 ic근처에는 차가 제법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했지만 괜찮다. 한 시간이나 여유 있게 출발했으니까. 그런데 차들은 줄어들 기미가 없이 점점 늘어났다. 차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내비게이션의 도착예정시간 역시 계속 늦춰졌다. 내비게이션을 거듭 확인해도 길바닥이 다 빨간색이다. 앞으로도 쭉 정체라는 이야기다. 급기야 줄줄이 늘어선 자동차의 빨간 후미등을 멍하니 쳐다보며 거북이걸음을 했다. 어른거리는 빨간색이 정말 싫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난 빨간색이 상징인 붉은 해돋이를 보기 위해 달려가는 길이다.
어제가 되어버린 12월 31일 저녁, 초등학생 아이들이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싶어 했다. 평소라면 자야 할 시간이다. 해가 바뀌는 특별한 날이니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의 요청을 허락하려는데, 남편이 갑자기 강원도로 해돋이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새벽에 일어나 출발하자는 계획이었다. 늦잠을 즐기는 나는 쉬는 날이면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난다. 새벽에 일어난다는 건 도전이다. 게으른 내가 평소 습관을 극복하고 해돋이를 보러 간다면 그 정성에 하늘이 탄복하지 않을까? 새해에 처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면 영험한 기운을 받아 소원이 더 잘 이뤄질 것 같다. 얄팍한 계산이 섰다. 단 하루니까! 새해이기도 하고! 뭐든 할 수 있겠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해서 새해 카운트다운은 못하게 되었지만, 바닷가로 놀러 가는 게 더 좋았던 아이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게 우리는 새벽 3시에 일어나 강원도로 출발했다.
강원도로 향하는 차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와 같은 결심을 한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지런함에 감탄했다. 감탄도 잠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일출 시간인 7시 40분 전에 바닷가에 도착해야 한다. 여유 있다고 생각한 한 시간은 꽉 막힌 도로에서 소진해 버렸다. 이대로라먄 안된다. 목적지를 바꿔야만 했다. 고속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인 하조대 해수욕장으로 도착지를 변경했다. 이럴 수가! 그래도 도착 예정시간이 7시 40분이다. 해돋이를 보러 강원도로 가고 있는데, 해돋이를 못 본다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달려서 제시간에 도착하고 싶지만, 내 앞에도 초조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찻길에 늘어선 사람들의 동일한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 차들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어둡던 하늘이 밝아왔다.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아슬아슬하게 일출 5분 전, 바닷가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바다 앞 도로도 차들로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주차 전쟁이었다. 경찰관분들이 곳곳에서 수신호를 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은 남편과 차를 도로 위에 남겨놓고 아이들과 먼저 내려 바다를 향해 달렸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해안가를 따라 한 줄로 빽빽하게 서 있었다. 동해안의 모든 바다마다 이런 풍경일 텐데 해돋이가 처음인 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신기한 볼거리였다. 그런데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내뱉는 소원 중 내 소원이 특별할 수 있을까? 게다가 새해 첫날부터 지각쟁이라니. 내 딴에는 큰 결심을 하고 갔지만, 나의 정성은 일찍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에 비해 가소로웠다.
사람들 틈으로 몸을 밀어 넣으니 양옆으로 조금씩 비켜주셨다. 남편도 주차를 마치고 합류했다. 아직 해가 보이지 않았다. 바다가 여명을 받아 초록과 푸르름 붉은색을 띠며 오로라처럼 보였다. 오묘했다. 바닷바람이 불어 조금 추웠지만 참을 만했다. 얼른 수평선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고 싶었다.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던 해가 아닌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선명한 해를 기다렸다. 그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소원을 빌어 보리라. 그런데 이상했다. 7시 40분이 넘었지만 어디에서도 해가 보이지 않는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다. 일출 예상시간이 틀릴 수도 있나? 일출 보는 게 처음이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를 기다리니 든든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소문이 퍼져 내게도 도달할 것이다. 일출 예상시간이 15분 지났다. 그런데 하늘이 수평선이 아닌 하조대 전망대가 있는 얕은 산 쪽에서 밝아왔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급하게 검색해 하조대 해수욕장 일출 후기들을 찾아보았다. 아무래도 하조대 전망대 위에 올라가야 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곳은 이미 경찰관이 진입을 막고 있어 갈 수가 없었다. 산 위로 해가 올라오길 기다려보았다. 산 위로 떠오르는 해도 나쁘지 않았다. 새해 첫 해를 본다는 게 의미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떠나기 시작했다. 왜 포기하는 거지? 해를 못 보나? 아침이라도 먼저 먹으러 가야 하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몰랐다. 포기하기에는 공을 들인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출 30분이 지나자 하늘은 완전히 밝아졌고, 해는 바닷가 쪽에 있는 산이 아닌 해안가와 일직선에 위치한 육지 쪽 산 위에서 뜰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망했다. 뒤늦게 차를 타고 산 너머의 바다로 가보기로 했다. 이미 다 떠올랐겠지만 해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찾아 나설 수밖에.
차를 타고 하조대 전망대를 넘어가니 바로 해가 보였다. 너무 반가웠다. 예상대로 해는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얼른 가까운 바다에 주차했다 이미 사람들이 다 떠난 한적한 곳에서 뒤늦게 눈부신 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았다.
새해 첫날을 특별하게 시작하면 올 한 해 운수대통일 줄 알았다. 그런데 해돋이를 보러 와서 해를 보지 못했으니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걸까? 어릴 적의 나였다면 나쁜 계시라 여겨 한동안 우울했을 것이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미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현명함은 생겼다. 게다가 해를 보지 못해 새해 소원도 빌지 못했다. 그러니 이것은 내 운수에 대한 답은 안 될 것이다. 아이들도 그깟 해를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바다에서 파도와 놀고 모래놀이를 할 수 있어서 마냥 즐겁다.
이로써 생애 첫 해돋이 일 뻔했던,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 해돋이를 향한 추억을 강렬하게 새겼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동해가 다 같은 동쪽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 대체 동쪽이 어디일까? 우리나라 지도를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아직도 풀지 못하고 미스터리로 남았다. 하조대 해수욕장에 있었던 수백 명의 인파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끝으로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해에게 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