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연애

선고

by 김호진

죽음과 연애



하늘에 덩그러니 홀로 떠 있는 구름 한 무리가 내 마음을 아는 듯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침내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나는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 지구라는 별에 한 생명체로 태어났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처럼 쉼이 없다. 시간은 누구를 위해 잠시 멈추거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삶의 시간은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시계를 삼켜 없애 버린다 해도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진실은 '삶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언젠가는 이곳에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여름날 먹구름과 함께 천둥을 데리고 오던 하늘도, 봄이면 연분홍 진달래가 색칠을 하던 뒷산도, 늘 푸른 소나무도 그대로 있겠지만.


생명체는 언젠가는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죽는다는 데는 예외가 없다. 해와 달의 운행과 사람들의 운명 사이의 관계를 밝혀서 과거를 꿰뚫어 보고 미래의 운명을 점쳤던 역술가, 질병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던 의사,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와 같이 수많은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아간 잔인한 폭군, 세상을 다 가져 보겠다고 오만방자하게 다른 사람의 생사를 쥐고 권력을 휘둘렀던 전제군주와 정복자들, 온몸을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매일 산해진미와 최고의 약제를 먹으면서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호령하면서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신이 나 된 것처럼 허세를 떨며 황제의 관을 쓴 사람들도 결국 모두 죽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신비 중의 하나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결합되었던 요소들이 해체되면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축의 시대 어느 위대한 현자는 '탄생과 죽음을 기氣의 결합과 흩어짐이다'라고 했다. 기는 우주의 에너지로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할 뿐이라는 것이다. 비록 육체는 해체된다 할지라도 기는 우주에 존재하면서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전혀 위험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창조의 섭리에 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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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에 존재하는 초신성들의 폭발에 의해 발생한 수소와 질소 그리고 산소의 결합으로 생성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지구의 생명체는 결국 별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별에서 왔다가 다시 해체되어 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말은 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 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별에서 만들어졌다. 생명을 다한 몸은 해체되어 다시 원자나 작은 먼지들로 돌아간다. 이러한 원자들이 모여 먼 훗날 다시 별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우주 안에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우주의 순환이요. 자연의 섭리다. 동양의 어떤 성자는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나무가 죽어서 숲의 양분이 되어 또 다른 나무의 일부분이 되듯이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가져온다고 했다.


잠깐 멈추어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혹시 자신이 소유한 이러이러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것 때문인 것은 아닌지.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스님은 마지막에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놓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았을까?


죽음을 산뜻한 낙화가 되기를 원했던 법정스님은 꽃이 필 때에도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꽃이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모란처럼 뚝뚝 무너져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산뜻한 낙화인가? 하고 노래했다.

반면에 이름과 힘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 뒤의 일까지도 근심을 하다가 죽는다. 자신의 장례식까지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다.


나 또한 직계가족과 친인척들이 하나둘씩 죽어 장사 지내는 일을 겪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가끔 죽음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깊이 들여다보면,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래전 많은 시인들도 '인생이란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가'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시인들의 노래를 누구나 공감하는 이유가 바로 '인생은 너무나 짧아서 순식간에 죽음이 눈앞에 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은 아닐는지.



중국 전국시대 도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장자莊子(BC369 ~ BC286)는 <지북유知北遊> 편에서 인생여人生如 백구과극白駒過隙이란 말을 남겼다.

'인생이란 열린 문틈으로 흰 망아지가 휙 하고 지나가는 순간'을 뜻하는 말로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흰 망아지가 문틈을 지나는 순간처럼 짧다는 것을 말한다. 이보다 인생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최초로 전국시대를 하나로 통일한 진시황은 영원히 늙지 않고 삶을 유지하는 약제를 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부와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도 결국 삶을 마감하고 대지로 돌아갔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는 "죽음과 친숙해질수록 일주일을, 하루하루를 아주 귀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죽음을 삶 속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죽음이란 삶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더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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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이 주신 삶의 시간이 마치 천 년이나 남아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죽음은 늘 나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다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성자들은 '신이 나를 인간으로 보내 준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깊이 탐구하여 자신의 주어진 임무를 찾고 생명의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선한 일을 하는 데 힘써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지금 이 순간 나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장자'나 '월든'이라는 책이 그렇게 가슴 깊이 반응하였는지도 모른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자연의 길을 따르리라. 날마다 숨 쉬던 공기 속에 나의 마지막 호흡을 되돌려주고, 내 조상들이 돌아갔던 그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대지는 나에게 그동안 생명의 에너지를 제공하여 주었고 심지어 나의 발자국과 나의 과실까지 포용하여 주었다.'





죽음에 대한 성찰

하늘에 덩그러니 홀로 떠 있는 구름 한 무리가 내 마음을 아는 듯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침내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나는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 지구라는 별에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났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처럼 쉼이 없다. 시간은 누구를 위해 잠시 멈추거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삶의 시간은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시계를 삼켜 없애 버린다 해도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진실은 '삶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언젠가는 이곳에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여름날 먹구름과 함께 천둥을 데리고 오던 하늘도, 봄이면 연분홍 진달래가 색칠을 하던 뒷산도, 늘 푸른 소나무도 그대로 있겠지만.

생명체는 언젠가는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죽는다는 데는 예외가 없다. 해와 달의 운행과 사람들의 운명 사이의 관계를 밝혀서 과거를 꿰뚫어 보고 미래의 운명을 점쳤던 역술가, 질병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던 의사,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와 같이 수많은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아간 잔인한 폭군, 세상을 다 가져 보겠다고 오만방자하게 다른 사람의 생사를 쥐고 권력을 휘둘렀던 전제군주와 정복자들, 온몸을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매일 산해진미와 최고의 약제를 먹으면서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호령하며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신이나 된 양 허세를 떨며 황제의 관을 쓴 사람들도 결국 모두 죽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신비 중 하나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결합되었던 요소들이 해체되면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축의 시대 어느 위대한 현자는 '탄생과 죽음을 기氣의 결합과 흩어짐이다'라고 했다. 기는 우주의 에너지로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할 뿐이라는 것이다. 비록 육체는 해체되더라도 기는 우주에 존재하며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전혀 위험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창조의 섭리에 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에 존재하는 초신성들의 폭발에 의해 발생한 수소와 질소 그리고 산소의 결합으로 생성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지구의 생명체는 결국 별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별에서 왔다가 다시 해체되어 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말은 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 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별에서 만들어졌다. 생명을 다한 몸은 해체되어 다시 원자나 작은 먼지들로 돌아간다. 이러한 원자들이 모여 먼 훗날 다시 별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우주 안에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우주의 순환이자 자연의 섭리다. 동양의 어떤 성자는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나무가 죽어서 숲의 양분이 되어 또 다른 나무의 일부분이 되듯이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가져온다고 했다.

잠깐 멈추어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혹시 자신이 소유한 이러이러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것 때문인 것은 아닌지.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스님은 마지막에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놓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았을까?

죽음을 산뜻한 낙화가 되기를 원했던 법정스님은 "꽃이 필 때에도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꽃이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모란처럼 뚝뚝 무너져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산뜻한 낙화인가?"라고 노래했다.

반면에 이름과 힘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 뒤의 일까지도 근심을 하다가 죽는다. 자신의 장례식까지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다.

나 또한 직계가족과 친인척들이 하나둘씩 죽어 장사 지내는 일을 겪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가끔 죽음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깊이 들여다보면,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래전 많은 시인들도 '인생이란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가'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시인들의 노래를 누구나 공감하는 이유가 바로 '인생은 너무나 짧아서 순식간에 죽음이 눈앞에 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중국 전국시대 도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장자莊子(BC369 ~ BC286)는 <지북유知北遊> 편에서 인생여人生如 백구과극白駒過隙이란 말을 남겼다. '인생이란 열린 문틈으로 흰 망아지가 휙 하고 지나가는 순간'을 뜻하는 말로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흰 망아지가 문틈을 지나는 순간처럼 짧다는 것을 말한다. 이보다 인생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최초로 전국시대를 하나로 통일한 진시황은 영원히 늙지 않고 삶을 유지하는 약제를 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부와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도 결국 삶을 마감하고 대지로 돌아갔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죽음과 친숙해질수록 일주일을, 하루하루를 아주 귀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죽음을 삶 속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죽음이란 삶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더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신이 주신 삶의 시간이 마치 천 년이나 남아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죽음은 늘 나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다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성자들은 '신이 나를 인간으로 보내 준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깊이 탐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찾고 생명의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선한 일을 하는 데 힘써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지금 이 순간 나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장자'나 '월든'이라는 책이 그렇게 가슴 깊이 반응했는지도 모른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자연의 길을 따르리라. 날마다 숨 쉬던 공기 속에 나의 마지막 호흡을 되돌려주고, 내 조상들이 돌아갔던 그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대지는 나에게 그동안 생명의 에너지를 제공하여 주었고 심지어 나의 발자국과 나의 과실까지 포용하여 주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죽음을 외면하고 사는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삶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죽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저 구름처럼 나도 언젠가는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안다. 이 깨달음이 내게 평안을 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감사가 마음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매일매일을 마지막인 양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의미 있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죽음은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배경인지도 모른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 인간의 삶이다. 죽음이라는 종착점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고 빛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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