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

선고

by 김호진

퇴장 그리고 다시 태어남



2020년 8월의 마지막 날.


장맛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엔 그동안 먹구름에 가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토해 내고 있었다.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강당에서 준비 안 된 인사말도 했다. 고맙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몇몇 분이 주차장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 주었다. 퇴임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일이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요란을 떨고 싶지 않았다.


내일부터 어쩌면 내가 바라던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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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부터 가끔씩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곤 했다.

일상의 업무를 하다가 순간 문득문득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점점 그 질문은 더 자주 내 마음을 두드렸다.

나는 아이들과 교사를 위해, 배움의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다고 믿었다.
수업을 연구했고, 일본 학교를 참관했고, 지역 교사들과 연구 모임도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일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을 동원해 보여주기식 수업을 하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수업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아이들을 원치 않는 장소에서 수많은 낯선 눈이 어떻게 하나 누가 더 잘하나 하고 지켜보게 하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서 나는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선의로 시작했지만, 아이들에겐 폭력이었다는 것을.


알고보면 선의에서 시작되는 폭력도 많다.

부모가 아이에게 강요하는 공부도 결국 '내 아이를 위함'이라는 부모의 선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아이들의 입장에선 선이 아닐 수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 안의 것은 바꿀 생각이 없으면서 남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려고 하기도 한다.
남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자신의 변화가 먼저다. 배움을 통한 자기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진정한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을 변형하여 스스로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이것을 자기혁명이라면 한다면 나는 최근에야 자기 혁명 없이 한 계단도 올라서기 힘들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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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 청년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목숨 걸고 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정권을 잡았을 때 과연 얼마나 민주화가 되었으며 공정한 사회가 되었는가?

권력을 쥐게 되자 처음의 다짐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권력의 달콤함에 심취해 버리는 것을 함석헌 선생은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자신의 변혁이 없이 남을 변혁하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변형은 없다. 그래서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나는 이제야 그 말이 진심으로 이해된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떠들어 되었다는 것을.

말로만 외쳤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



암수술을 여러번 거치면서, 나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곤 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두려움이고 공포였지만, 받아들임은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자연과 함께, 새와 나무, 하늘과 바람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평안했다.

어쩌면 암은 내가 그러한 삶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이정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신비 그 자체다.

삶은 성장의 과정이다.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신비이다. 꽃이 뿌리와 대지와 연결되어 있고, 대지의 향기와 위대함으로 피어나는 것도 신비요.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에 존재계에 속하여 삶을 향유하고 있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다. 한 떨기 장미가 피어나는 것은 자신을 뽐내고자 함도 아니요, 누군가 보아 주기를 바라서도 아니요, 그저 태양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장미는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 피어있다. 때가 되면 장미는 꽃잎을 떨어뜨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대지로 흩어진다. 이 모든 것들은 신비이다.


우리는 두렵고 힘들고 고난이 닥쳐도 웃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삶은 아름다운 거니까. 지금 이 순간을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새는 노래하면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길 뿐이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날고 노래할 수 있다. 우리는 폭우에 휩쓸려 쏜살같이 내려가는 계곡의 물처럼 생각 속에 빠져서 정신없이 흘러가다가 그 생각이 '나'라서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은!

삶은!

리허설이 없다.


나는 다음날 산사로 떠났다.
해발 600m 고지.
계곡엔 맑은 물이 흐르고 바람이 쉬어가는 그곳.

산사의 스님은 기꺼이 나를 맞아 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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