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

선고

by 김호진

순응



하늘과 맞닿아 있는 먼 산들이 옥색에서 사파이어색으로 바뀌어 가더니 검푸르게 변했다. 그러자 꺼져갈 듯 희미한 달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마당에 서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별 없이 외롭게 떠 있는 초저녁 달이 쓸쓸해 보였다. 그때 나는 달의 가슴이 되어 힘겹게 서 있었다. 어깨 위로 가늘게 내리는 달빛도 무거운 듯.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암세포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걸까?
인생은 너무나 불공평해.'


한 때 나는 삶에 저항하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에 대해서도 묻기도 했다. 그러나 신이 어찌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이 누구를 편애하여 사랑을 주겠는가? 신은 편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는 몰랐었다. 설사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고 해도 누구 편에서 또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겠는가? 가령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영국군과 독일군이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투를 시작하는 날 새벽. 두 막사에서는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신 앞에 서서 요청했다. 영국군에서는 '부디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달라고 했다' 같은 시각 독일군 막사에서는 자기들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신은 너무나 당황스러울 것이다. 매 순간 이와 같은 일이 우주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겠는가? 신에 대한 기도가 자기중심적인 요청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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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그저 넘치게 된 사랑을 비처럼 고르게 뿌려질 뿐이다. 우리 삶의 도중에 일어나는 행복이나 불행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인간은 각자 고유한 임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신이 그냥 이 세상에 나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들판의 풀 한 포기도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며 자기 역할이 있다. 모든 것들이 있을 자리에 있고 고유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는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만약 지구의 공전이 조금이라도 빗나간다면 태양계의 질서는 급속하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순응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되묻지 않을 때 일어난다.

순응이란 '지금 이 순간'에의 순응을 말한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이 순간을 해석하고 그것이 진실이고 '나'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과거에 얽매여서 때로는 미래의 환상을 꿈꾸었다. 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면서 살아왔다. 암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늘 마음은 소란스러웠다.

마음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책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마음은 미래로 이동해 죽음을 생각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근심과 걱정과 같은 번뇌로 가득 차 있었다.


순응은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거두고 모른다는 사실에 편안해지는 일이었다. 그동안 내 마음이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은 특별해지는 것이었다.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여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 더 존경받으려 했다. '나'가 아닌 타인이 좋아하는 일에 맞추어 살았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살았다. 그리고 우월해지려고 경쟁하고 질투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늘 목말라했다. 나는 늘 내가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될까 두려워했다.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고 아무도 아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다. 사회적 지위, 명성, 존경,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어쨌든 죽음은 이런 것들을 앗아간다. 이런 것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도록 스스로 허용한다면 죽음이 앗아갈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이제 죽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삶에서 저항하는 마음이 수용으로 바뀔 때 '아니요'가 '예'로 바뀐다. 대립과 비판을 일삼던 에고는 이제 대립과 비판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전에 생각이나 감정처럼 형상을 지닌 것이 나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형상을 여읜 광대한 마음이 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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