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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 Sep 21. 2022

작가의 삶이 녹아 있는 작품의 고향

책 <작품의 고향> 리뷰

한국미술 작가가 사랑한 장소와 시대

<작품의 고향>

임종업, 소등


예술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장소가 있게 마련이다. 그곳이 고향일 수도 있고, 특별한 인연이 시작된 곳일 수도 있다. 한 점의 그림에 담긴 작가의 치열한 삶 속에 들어가보면 작품도, 장소도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 이중섭, 박수근, 유영국 스토리는 책에 없는 내용입니다.



이중섭(1914~1965)과 제주


가난한 삶이 남긴 행복의 단편

한국전쟁은 이제 겨우 가정을 꾸린 젊은 부부에게는 너무도 야속한 일이었다. 그것도 일본인 아내, 어린 자녀와 함께인 가장 이중섭에게는 더더욱. 그들은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던 이중섭과 그의 식구들은 제주 서귀포에 정착했다.


가세는 넉넉지 못했지만, 제주에서의 삶은 비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전쟁 통에 식구들과 살 붙이고 살 수 있는 1.4평짜리 쪽방은 감지덕지였고, 걸어서 20분만 나가면 굶주림을 달래줄 바닷게가 널려 있었으니 그런대로 행복한 삶이었다. 매일 바닷가에 나가 노는 아이들의 표정은 해맑았다. 1년 남짓 머무른 서귀포 생활은 피란 생활의 어려움에도 이중섭에게 최고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년,

나무 판에 유채, 41×71cm. 

훤히 내려다보이는 초가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 고요한 바닷가가 한없이 평화롭다. 그림 속 전경이 온화함은 우리가 알고 있던 이중섭 특유의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굴곡 많은 삶을 산 그는 시대의 아픔을 강인한 화풍으로 표현해왔지만 서귀포에서의 삶만은 행복한 흔적으로 남겼다.






강요배(1952~)와 제주


제주의 바람과 자연을 담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강요배는 서울에서 유학하고 삶을 일구다 불혹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서울 창문고등학교에서 6년간 미술 교사로 일했지만 도시 생활, 문명 생활은 그의 체질과 맞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에 둥지를 틀고는 20년 넘도록 제주의 바람과 특유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냈다.


“나는 관찰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듯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머릿속에 장면들을 저장해두었다가 어떤 느낌이 들 때 붓을든다”는 그의 말처럼, 제주는 강요배를 거쳐 비로소 진가가 나타난다. 그래서 강요배의 이름 앞에는 ‘제주의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유채밭, 2013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53×72.7cm.

유채의 노랗고 푸른 빛이 화폭을 가득 메우고, 먼바다에서 몰려오는 흰 파도는 에너지가 넘친다. 날카로운 펜으로 긁은 것 같은 거친 질감은 그림 속 유채밭에 강렬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 자유롭고도 명료한, 강렬하고도 편안한 감동은 화가 자신의 오랜 사색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바다-바위, 2012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89.4x130cm

강요배는 제주의 풍경을 차분하고 상징적인 어법으로 화폭에 담아왔다.‘바다-바위’에도 하늘, 바람, 바다, 현무암을 차지게 형상화했다. 특히 푸른빛이 넘실대는 바다를 서정적으로 그려냈고, 해안 끝에 우직하게 돌출된 검은 현무암은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박수근(1914~1965)과 서울 창신동


골목 안, 1950년, 캔버스에 유채,

80.3×53cm

화가가 살았던 창신동 골목의 모습이다. 그는 화강암 같은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화판이나 종이 위에 캔버스 천을 입힌 뒤 흰색, 갈색, 흑색 물감을 여러 층으로 두껍게 덧칠하고 그 위에 인물을 그렸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마주하는 곳

“내 그림은 유화이지만 동양화다.” 그의 말처럼, 박수근은 가장 한국적인 화가다. 서구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던 시절, 그는 거친 화강암 표면이 연상되는 마티에르 기법과 굵고 단순한 검은 선으로 길거리 등 한국적인 정서를 소박하고 집약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서울 창신동 시절에 완성되었다.


박수근은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금성에서 창신동으로 피란을 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창신동은 동대문 바깥에 위치해 서울의 역사에서 보면 늘 외곽이었다. 박수근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피란민으로 막노동과 미 8군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한눈 팔지 않고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데에는 창신동의 소박한 정서가 한몫했다.





전혁림(1915~2010)과 통영


위대한 예술가를 길러낸 쪽빛 바다

통영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은 전혁림. 통영 바다의 푸른 물색을 캔버스에 옮겨 향토적이면서 조형적인 화풍을 구축한 그에게는 ‘색체의 마술사’라는 찬사가 따라다닌다. 어릴 적 장대높이뛰기 선수를 꿈꾼 그는 불의의 사고로 부상을 당하면서 서울 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이후 그림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에게는 시련이었지만, 전혁림이 통영 시내 수산학교에 입학해 진로를 바꾼 것은 위대한 예술가 탄생을 위한 서막이었다. 전혁림은 통영수산학교를 다니며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이후 평생을 바쳐 고향 통영의 자연을 한국 전통의 색과 질감으로 풀어냈다.


통영항, 2005년,

캔버스에 유채, 300×600cm

전혁림이 아흔의 나이에 그린 작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구입해 청와대에 걸어 화제가 된 작품과 같은 시리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조형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품은 작가가 바라본 세상을 화면 위에 재창조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예술 공간을 만들어낸다.




충무항, 1980년,

캔버스에 유채, 40.9×31.8cm

통영항 일대와 하늘을 짙은 청색조로 강조했고, 화면 전체는 생동감 있는 붓 놀림으로 말미암아 추상적으로 표현됐다. 전혁림은 1970년대 이후 보다 안정된 색, 면 구성으로 작업을 발전시켰다.




















이종구(1955~)와 남도 사찰

무위사, 2010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40×90cm

검고 깊은 산세 속 조용히 숨 쉬는 듯 자리 잡은 사찰, 그 안을 어슴푸레 비추는 연등. 밤의 정적을 극대화하는 것은 어둠이 아닌 빛이었다. 사찰 위로 뜬 달은 시간을 가졌고, 풍경 곳곳에는 역사의 숨결이 깃들었다.



생명과 종교, 역사를 담아내는 삶의 기행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종구는 고향인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를 기반으로 활동해왔다. 주로 오지리 사람들을 그렸고, 농촌의 현실을 다양한 연작으로 그리면서 ‘농민 화가’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오지리를 벗어난 그는 풍경 화가로 변신한다. 특히 남도의 사찰을 그릴 때면 푸르스름한 밤과 고요한 산세, 그 속에 아득하게 자리 잡은 절과 연등, 은은한 달빛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2014년 위암 수술을 받은 뒤 잠시 휴지기를 가지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사찰을 소재로 한 작업을 시작했다.










유영국(1915~2010)과 울진


산과 바다, 자연의 본질은 추상이다

유영국은 경북 울진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1930년대 일본 도쿄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몬드리안의 영향으로 도형 중심의 구상주의에서 출발, 산과 바다 등 보편적인 자연의 본질을 추구하는 작업을 했다. 전업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는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에서 보던 원형적인 색감과 장대한 구도를 담아내는 데 몰두했다.


“추상은 말이 없다. 설명도 필요 없다. 보는 대로 이해하면 된다. 내가 그린 건 그저 선과 면, 색채로 구성된 추상 형태의 자연이다.” 그의 말처럼 유영국은 선, 면, 색채 같은 기초 요소로 구성된 비구상 형태야말로 자연의 본질을 적절히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산, 1961년,

캔버스에 유채, 136×194cm

1960년대 그의 작품은 매우 힘차고 자신감 넘친다. 거대한 산수를 마주하는 듯한 큰 화면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듯 생동감 넘치는 자연이 펼쳐진다.









산, 1982년,

캔버스에 유채, 80×100cm

1970~90년 그의 작품은 주변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자연의 소박한 서정성을 표현했다. 화가 스스로 60세까지 기초 공부를 한 이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겠다고 생각해왔는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극도의 병고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그린 산과 나무, 호수와 바다, 지평선과 수평선은 지극히 조화롭고 평화롭다. 자연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자 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오윤(1915~2010)과 지리산


화폭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산

조소를 전공한 오윤은 1980년대 우리나라 민화나 풍속화 같은 전통미술 형식을 차용해 특유의 강렬한 선과 형태로 제작한 목판화로 이름을 알렸다. 목판화 외에 그를 상징하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지리산이다. 오윤은 등산을 좋아했고, 특히 지리산을 사랑했다. 오죽하면 지리산에 꽂혀 판화 연작을 남겼을까? 친구인 사진작가 김대식에게 “지리산은 능선이 아니라 기슭이므로 산기슭으로만 다녀야 한다”고 지리산 등산법을 조언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지리산 2, 1984년,

종이에 목판, 24.4×34cm

여느 산수화나 풍경화에서 좀처럼 느끼기 힘든, 힘찬 선이 살아 있는 듯하다. 오윤은 면보다 선을, 그것도 굵고 힘 있는 선을 구사하며 대상을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세부 묘사보다 대상의 주요 특징만 커다란 덩어리로 집약해 속도감이 느껴진다.






지리산 3, 1977년,

종이에 목판, 25×26.3cm

박경리 소설 <토지>의 표지에도 실린 작품으로, 오윤 특유의 역동성이 돋보인다. 오윤은 목판화라는 장르로 일가를 이뤄 후진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으며, 1980년대 미술 운동의 상징적 미술가로서 역사에 기록되었다.













박대성(1945~)과 경주


불밝힘굴, 2009년,

종이에 수묵담채, 250×140cm

불국사, 석굴암 등 신라의 정신이 담긴 문화유산이 박대성의 힘찬 일필휘지의 운필과 은은한 먹빛의 조화 속에 단아하면서 장중한 모습이다. 단숨에 그은 선 위에서 수정이나 덧칠은 있을 수 없다. 그런 만큼 그의 작업은 엄청난 정신적 집중력과 고도의 훈련이 요구된다. 작가는 이 작품이 실경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고 밝혔다.


먹빛과 만난 장엄한 문화유산

박대성은 어린 시절 집안 제사 때 쓰는 병풍에 그려진 사군자를 보고 홀로 습작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공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1970년대 국전에서 여덟 차례 수상하고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는 등 오직 실력만으로 화단에서 인정받았다.


그는 1995년 불국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보따리를 싸 경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색채가 난무하는 시대에 순도 100% 먹만으로 미술 시장을 평정했다. 경주 작업실에서 초지일관 수묵 작업에 몰두한 그는 수묵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필선(筆線)을 제대로 살리고 필력을 기르고자 지금도 끊임없이 글씨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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