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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 Sep 30. 2022

철학자는 왜, 죽음이 존재를 빛나게 한다고 말했나?

서울대 김헌 교수 인터뷰

‘고수의 생각’은 고수의 철학, 나아가 그들이 사고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즉, 각 분야 고수들의 사고법을 배워 우리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이 인터뷰 기획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살면서 마주하는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터뷰에는 단순 신변잡기보다는 고수의 생각이 담깁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는다. 나이가 들며 죽음을 예감해도 어떻게든 피하려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우리가 죽음 앞에 당당할 방법이 있을까? 서양 고전학자 김헌 서울대학교 교수는 서양 고전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수많은 사유를 해왔다. 김헌 교수라면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방법을 알지 않을까?



김 교수는 “죽음은 삶을 더 잘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인생이 유한하기에 비로소 삶의 순간들이 빛나는 것이라고. 그는 이것이야말로 죽음이 지닌 진짜 힘이라며, 매 순간 잘 살다 보면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Profile.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양 고전학자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천년의 수업> 등의 저서가 있고 JTBC <차이나는 클라스>, tvN <요즘책방> 등에 출연했다.





얼마 전 출간한 책을 통해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어요.

누구든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요.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인지에 대해 고전의 관점에서 보고 싶었죠. 고전이 정답을 주진 않지만 힌트는 주니까.


좋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은 죽음일까요?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죠. 어차피 죽으면 끝날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을 피해 아등바등하는 삶이 있는 반면, 죽음을 당연한 순리로 받아들이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도 있습니다.


좋은 삶은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죽음은 피해야 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을 완결시키기 위해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으로 끝을 맺는 인생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원한 수수께끼인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도 죽으면 끝이 아니냐며 두려워했어요. 이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감옥과도 같은 몸에서 영혼이 풀려나는 것이라고 가르쳤죠. 몸에서 완전히 해방된 영혼은 순수한 존재로서 영원한 환희를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물론 모두가 소크라테스 같을 순 없죠. 이는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에게 죽음이란?

철학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을 아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존재 중 철학자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어요. ‘내가 존재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같은 질문을 많이 던졌는데, ‘모든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결됐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무언가를 추구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내가 처한 상황이 단번에 바뀌지는 않지만 나라는 사람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져요. 성장을 포기하고 꿈꾸지 않는 순간, 시간에 따라 ‘죽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었나요?

결론은 크게 두 가지예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입장, 또 하나는 죽으면 끝이라는 의견. 전자의 대표적 인물이 소크라테스예요. 그에 반해 원자론자들은 영혼이라는 건 따로 없다고 봤어요. 즉, 죽음은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이 해체되어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주장입니다. 몸의 기능이 정지되어 움직임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 분해되니 과학적이라고 보는 거죠. 죽음에 대한 이 두 가지 시선은 신념에 따라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죽음은 무엇인가요?

죽음은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립니다. 느닷없이 찾아오고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아요. 건강한 사람이라고 봐준다거나 악한 자가 빨리 죽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인간은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한 존재이죠. 우리는 평소 그런 죽음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도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비로소 죽음에 직면합니다. 그럴 때면 ‘죽음을 맞닥뜨리면 어떤 기분일까?’, ‘모든 존재는 왜 죽는 것일까?’ 같은 질문을 던져요. 그렇게 죽음이란 삶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죠. 결국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계기이자 모든 질문을 백지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시작된 모든 것은 언젠가는 끝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건만, 일단 존재한 것들은
그 존재를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이 또한 자연의 생리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필사적 본성이다.



실제로 죽음을 맞닥뜨리면 어떤 기분일까요?

재작년에 친한 친구가 죽었습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암에 걸린 거예요. 남아 있는 그의 식구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도 그중 하나예요. 사실 죽음이 두려운 건 그 부분입니다. 나 혼자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없어짐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면 두려워집니다.


자신의 죽음을 상상한다는 게 어쩐지 낯설어요.

우리는 은연중에 죽음과 가까워질 때가 있어요. 저 역시 인생을 통틀어 두세 번은 ‘사람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을 때가 있었어요. 죽음이라는 건 생각지 않은 채 삶의 복닥거림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러다 죽겠구나’를 생각하는 순간 삶을 가득 채우고 있던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의미 없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죽음을 맞닥뜨리면 그런 기분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요?


‘불멸의 삶’과 ‘죽음이 있는 삶’ 중 어떤 걸 선택하겠습니까?

죽음으로 끝을 맺는 인생이  깔끔하고 산뜻합니다. 인생이 유한해야 삶의 순간이 빛납니다. 끝이 있다는  알기에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쓸  .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조차 소중할  있습니다. 하지만 200, 1000, 1 세까지 산다고 하면 내가  삶을 감당할  있을까요? 영원함은 자칫 구질구질한 지루함으로 퇴색될  있어요.


그럼 불멸의 삶을 꿈꾸는 건 안 좋을까요?

영원히 산다면 하루가 끝없이 반복될 텐데 오늘을 이렇게 보내든 저렇게 보내든 무슨 상관있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살려고, 죽음을 피하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자연스러운 욕망이에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보고 싶어 죽겠으면 만나고. 그런 모든 것이 살아나가기 위한 행동이죠. 이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욕심이에요.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영원한 삶’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에 집착하고, 나만 살겠다고 남을 죽이는 비윤리적인 모습까지 낳는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햄릿, 호레이쇼, 마르셀 루스와 유령, 43.2×59.5cm, 삽화, 헨리 푸젤리, 1796

김헌 교수가 인생 책으로 꼽은 셰익스피어 <햄릿>.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구절은 사실 “있음이냐 있지 않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다. 셰익스피어는 ‘존재와 무’의 문제가 삶과 죽음보다 더 깊다고 보았다.








삶과 죽음을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삶은 어떤 걸까요?

철학자 칸트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죽는 순간 “아, 좋다. 참 좋다”라고.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죽는 순간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칸트의 마지막 말은 아주 힘들고 치열하게, 순간순간을 짜릿하게 살았다는 증거예요. 알차게 살면서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 삶을 살았다면 죽음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한이 없다는 건 바로 이런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50대로서 칸트처럼 잘 죽는 것에 대한 고민은 없나요?

물론 있어요. 50대가 되면서 비슷한 고민이 생겼어요. 요즘 평균수명을 생각해보면 80대 중반까지는 살 텐데, 어쨌든 살아온 시간보다 살 날이 더 짧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초조함이 생기더라고요. 순간, 남은 날들이 너무 아깝고 소중했어요. 죽음이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말을 내 경우에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잘 죽기 위해 어떻게 살기로 했나요?

공자는 마흔을 불혹의 나이라고 했지만 내 삶에서 40대만큼 흔들렸던 시기가 있었나 싶어요. 10대, 20대, 30대를 생각하면 보기 낯 뜨거운 실수가 너무 많아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감출 수밖에 없는데, 감추다 보면 위선적인 삶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내 실수와 치부를 굳이 까발리며 살 필요도 없고.(웃음)


그러다 남은 삶은 과거의 지우고 싶은 일들을 만회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실수를 반복한다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 몰라요. 실수투성이 삶을 남겨두고 가버릴 수는 없으니.


과거를 만회하는 말년이야말로 멋진 스토리인 것 같아요.

뭔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는 게 힘에 부친다고 느껴질 때면 늘 이런 다짐을 했어요. ‘이번에도 잘 이겨내자. 힘든 상황을 극복한 주인공이 더 멋지지 않은가!’ 한계를 고분고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힘들어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힘든 순간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 있다면요?

‘행복은 이거다’라고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정신없이 산다면 행여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해질 수 있어요. 그동안의 삶이 다 무효화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꾸 되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음식 얘기를 하며 먹는 것이듯, 행복도 마찬가지예요. 자꾸 얘기할수록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행복이 뭔가?’, ‘이게 행복일까?’ 등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삶 자체가 이미 행복한 거예요.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다”라고 한 존 바스의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의 역사와 세계를 만드는 위대한 사람이며, 각자의 삶이 귀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자기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오늘의 삶을 열심히 꾸려가는 것이죠. 그렇게 후회 없이 산다면 어느 순간에 삶이 끝나더라도 ‘이만큼 살았으면 충분히 잘 산 거야’라며 안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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