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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 Oct 28. 2022

우리 앞에 니체를 소환한 철학자 이진우

철학이 필요한 이유에 관한 인터뷰

‘고수의 생각’은 고수의 철학, 나아가 그들이 사고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즉, 각 분야 고수들의 사고법을 배워 우리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이 인터뷰 기획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살면서 마주하는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터뷰에는 단순 신변잡기보다는 고수의 생각이 담깁니다.




“철학하는 삶은 인생의 가치를 찾아가는 길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살다 보면 지혜와 지식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 후회, 외로움 등 나이 들며 갖게 되는 감정은 대부분 어둡고 비관적이다. 이 복잡 미묘한 방정식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이진우 교수는 ‘철학적 성찰’을 제안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망치를  철학자 불린다. 저서 <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때문이다. 목적과 가치가 사라진  물질만 중시하는 세속화 시대를 확인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고,  한마디는 2000 넘게 이어진 서양 기독교 역사  기존 가치관을 폐기 처분하고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국내의 대표적인 니체 전문가 이진우 교수는 그런 니체를 통해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어쩌면 니체가 말한 ‘신이 죽은 시대’는 오늘날과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특히 삶의 목표와 가치를 잃은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철학적 처방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절망의 시대에 삶의 가치를 찾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Profile 이진우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인생에 한 번은 차라투스트라>,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저자

EBS <인문학특강>,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등 다수 강의





Part 1. 철학이 필요한 이유



심오하고 어려운 철학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철학은 삶과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편견이 널리 퍼져 있어요. 학문적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편견을 전면 부인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이론이 항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편견이죠. 철학사 같은 지식으로 철학을 접하다 보니 어려운 것이지, 알고 보면 철학은 우리 삶과 그리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 헤겔도 “철학은 그 시대정신을 포착한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2500년 전 고대사회의 철학자들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다뤘고, 근대 철학자들 역시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정확히 포착하고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예요. 시대와 호흡하지 않으면 죽은 철학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정신을 포착한 철학이 어떤 삶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문명의 급격한 전환기예요. 인공지능(AI)이 등장하고, 사물인터넷(IoT)이 발전하고, 로봇이 일상화되고, 자율주행차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로 접어들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21세기 중반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된 상황으로 들어설 거예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도대체 무엇이 변하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요.



철학적 성찰은 여유를 가질 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바쁘게 사느라 생각할 수 없었다.
심지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운동 센터에 가서 열심히 뛰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을 만큼 현실의 압박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왔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왔다.
이는 어쩌면 망각했던 자기 성찰의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요?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고, 인간의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커져서 삶 속에 기계가 엄청나게 밀려올 거예요. 그때부턴 모든 것이 물질화되는 거죠. 그럴수록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대체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있는 건가?’, ‘인간이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같은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될 거예요. 정신마저 상품화되는 시대이니만큼 오히려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갈망, 욕구 등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문제에 철학을 조금씩 적용해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게 21세기 현재의 경향이기도 합니다.


혼돈의 시기에 철학이 더욱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맞아요. 역설적이지만 안정적 시기보다는 위기의 시대, 불안정한 시기에 철학은 훨씬 발전했어요. 고대 그리스만 하더라도 그리스 문명이 쇠락할 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했어요. 이들은 철학으로 삶을 성찰했죠. 성찰, 즉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 거예요. 현대인이 삶에 철학을 응용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죠. 삶의 목적이 분명하면 혼란스러운 시대에 넘쳐나는 각양각색의 유혹에도 스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아요.


굳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요?

한계를 모르는 무한한 욕망은 ‘극단’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극단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예요. ‘이익의 효율적 최대화’라는 자본주의적 공리에 따라 한계가 없는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냥 열심히 일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죠. 목적과 가치는 사라져 버렸고 그저 부, 재산, 건강 같은 삶의 수단만을 고민합니다. ‘더 많이’는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핵심 원리예요. 문제는 이 같은 삶은 공허해진다는 사실이에요. 스스로 자기 삶을 돌아보는 성찰을 통해 철학적 지혜를 탐색해야 합니다.


지난 2~3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이

잊혔던 자기 성찰의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

너무 바빠서 미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던 현대인에게 성찰의 시간이 생기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잊고 있었던 나에 대한 생각, 이른바 ‘망각된 성찰’이라고 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혼자 있으면서 “내 삶은 왜 바쁘기만 하고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지?”, “사람들 사이에서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을 ‘철학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팬데믹을 무사히 거치고 난 지금부터를 희망의 시대라고 볼 수 있겠네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우리는 흔히 코로나와 포스트 코로나로 구분하는데, 21세기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메가트렌드는 코로나19 팬데믹과는 상관없이 점점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경쟁은 훨씬 심해지고, 디지털로의 변화나 인공지능, 자동화 등은 급속도로 도입되고 있어요. 결국 포스트 코로나의 우리 삶은 코로나19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관건은 팬데믹으로 우리가 가졌던 여유와 성찰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회에 풀어내느냐예요.




Part 2. 왜 니체인가



니체의 전도사가 된 이유가 궁금해요

고등학생 때 서울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본 것이 니체와의 첫 만남이에요. 당시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어도 ‘삶이라는 것은 심연 위에 걸쳐져 있는 밧줄과 같다’라는 글귀가 크게 와닿았습니다.


이후 독일 유학 생활을 하면서 다시 니체를 만났어요. 철학자로서 앞으로 뭘 고민하며 살까를 생각하던 중 당시 우리 정치 상황을 떠올렸죠. 1980년대 우리나라는 군부독재 시절이었기에 ‘권력’이라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권력은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인가’, ‘권력 없이는 사회를 조직할 수 없는가’ 같은 문제를 다루다가 니체에 이르게 됐어요.


니체와 권력은 어떤 관련이 있길래

권력이라고 하면 흔히 힘, 재산,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압박하고 굴복시키는 폭력적 경향의 것을 생각해요. 하지만 니체는 이런 ‘사회적 권력’에 국한하지 말고 “내면의 시선으로 바라보라”며 “삶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인이 권력”이라고 말했어요. 권력은 주어진 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단계로 발전해가려는 힘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놀고 싶은 것을 극복하고 공부하는 것도 권력이라는 말이에요. 즉, 내면적 권력은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고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려는 힘입니다.



요즘 니체의 철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요?

니체는 물질적 부를 좇으며 더 이상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19세기 중반 사람들을 빗대어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했어요. 아주 간결한 명제지만, 그 안에는 시대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는 과학과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해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던 시기로, 종교가 권위를 상실해 신자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니체는 이를 ‘허무주의 시대’라고 말했어요. 사람들이 신의 존재가 허구였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상실감에 빠져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방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목표 없는 공허함으로 힘겨워하는 오늘날과 많이 닮았어요. 이에 니체가 당시 내놓은 대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대안을 내놓았나요?

삶의 방식에는 ‘최후의 인간’과 ‘초인’ 두 가지가 있어요. 최후의 인간은 성취하려 하지 않고, 극복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며 매일 노예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남들이 하니까 열심히 일하고, 성공하려고 하고, 돈을 많이 가지려고 하죠. 하지만 초인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을 극복하는 인간이에요. 예를 들어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지배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꾸죠. 니체는 최후의 인간에 머물지 말고 초인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주체적 삶을 주장한 니체의 사상이

동양철학에서 노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많은 사람이 노자와 니체의 태도가 비슷하다며 두 철학자를 비교해요. 노자는 <도덕경>의 첫 문장에서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라고 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절대적 진리는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당시 유가와의 대결 과정에서 도가가 발전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모든 권위에 대한 전복적 태도가 나온 것이죠. 이는 기존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은 니체와 비슷해요. 그러나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니체가 2000년에 이르는 서양 역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면, 노자는 이 같은 역사의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Part 3. 내 삶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다



인생의 화두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피로, 소진, 고갈. 에너지를 다 쏟았는데 텅 비어 있는 느낌이랄까요? 우리 대부분이 느끼는 삶의 공허함은 그런 데서 비롯됩니다. 이는 일종의 심리적 좌절감인데, 주로 은퇴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에요. 이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뭐 하러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이걸 하려고 이렇게 뼈 빠지게 일했나?” 같은 의문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소중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요?

나이 들수록 공허함, 좌절감, 절망감 등이 생기는 것은 살아온 태도와 관련 있어요. 자신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등 삶의 목적을 생각해온 사람은 삶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또 자기만의 가치를 갖고 있어서 절제할 줄도 압니다. 그래서 공허함에 덜 시달리죠. 이들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입니다.


반면 단기적 목표만을 갖고 살아온 이들은 ‘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어요. 그런 삶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죠. 학창 시절에 좋은 대학을 가는 걸 목표로 삼고, 목표를 이루면 취업 준비, 사회생활 등 또 다른 목표가 생깁니다. 그다음은 사회적 성공과 좋은 집과 차를 갖는 것 등을 목표로 살아요. 이 모든 게 단기 목표죠. 이런 삶을 살다가는 단기 목표가 장기 목표를 완전히 흡수해버려서 궁극적으로 왜 사는지 모른 채 공허함에 시달립니다.


고독 역시 우리에게 큰 숙제인데…

맞아요. 니체는 “사람들은 자신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기도 하지만, 자신을 잊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기도 한다”라고 말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강요된 고독을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만든 사람이 있는 반면,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들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건 아닐까?”, “친구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아닐까?” 같은 물음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SNS에 매달리며 어떻게든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죠.


결국 견딜 수 있는 사람에게 고독은 인생의 약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엄청난 외로움이 됩니다.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평소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해요. 가정, 친구 등에 속해 있지만 때론 혼자 있는 방법을 아는 힘이 삶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노력할 것이 많은 건가요?

노력이라는 것이 지식을 습득하라는 것이 아니에요.(웃음) 생각하는 훈련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니체는 진정한 행복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에 있다고 말했어요. ‘왜 사는가’도 그중 하나죠. 다만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것을 달성하면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은 틀렸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상태가 지속되면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어요.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나 영화를 추천한다면요?

영화 <노매드랜드>(2020)를 본 적 있습니다. 미국 금융위기 이후 자기 자동차 외에는 집도 절도 없는 사람, 일종의 노숙자와 비슷한 사람의 삶을 그린 영화예요. 극 중 ‘스웽키’라는 할머니가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최하위 빈곤층인데, 자동차를 유지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일을 해요. 이 할머니가 콜로라도강에서 만난 제비 떼의 비행을 보며 한마디 합니다. “이런 광경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인생을 잘 산 거야. 이걸로 충분해.” 아무리 절망적 상황에 처했더라도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기준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에요. “연봉이 최소 OO만원은 돼야지”, “30평대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영화가 답을 준 것인가요?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물질주의적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요즘에는 ‘어떻게 하면 존엄 있게 살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내가 돈이 없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비굴하게 예속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노매드랜드>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한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돈이 더 많아야 행복하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돈과 행복의 관계를 정립하는 건 누구나 어렵습니다. ‘쾌락 적응’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한들 만족감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소득이 증대하면 행복감도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물질적 부와 행복감은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균형을 잡을까요? 결국 본인이 한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어요. “이 정도면 됐다”라고 여기는 선 말입니다. 어렵지만 한번 해보는 거예요. ‘많을수록 좋다’는 말은 자본주의적 논리여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부족한 상태에 있으니 만족도 없는 것이죠. 그보다는 ‘이 정도면 됐다’고 여기는 것이 행복 쪽에 더 가깝습니다.


사는 게 힘에 부치는 이 시대의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니체는 “너 자신의 내면에서 너 자신의 적을 발견해 싸워라”라고 말했어요. 자꾸 책임을 바깥으로 돌리지 말고, 자신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라는 의미예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사소한 것에 성질을 버럭 냅니다. 이후 화가 누그러지면 “나는 왜 이러지?”라고 한탄하죠. 그 사람은 극복해야 할 문제를 아는 거예요. 이런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자기를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막연하게 “내 본래 자아를 찾겠다”,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겠다” 같은 말은 너무 추상적이에요.


불행을 미리 생각해보는 것은 행복을 지속시키는 방법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멋진가를 깨닫게 하고,
우리가 이미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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