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
'패권'이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행사하는 권력을 뜻한다. 땅을 정벌해야 하는 농업사회에서는 전투력이 곧 패권이었고, 상업사회로 넘어가면서 자본이 패권을 결정지었다. 세계사에서 패권을 거머쥐었던 ‘제국’은 어디이며, 왜 몰락했는지 정리했다.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 다소 긴 글이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참고 도서 <패권의 비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금융으로 본 세계사>(시그마북스), <흐름이 보이는 세계사 경제 공부>(어크로스)
철갑을 두른 병사라는 뜻의 ‘철기병’은 로마를 상징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약탈한 재물과 노예로 부를 축적했다. 로마는 고대 그리스를 무력으로 정복했는데, 이것이 패권 국가의 시작이었다. 금융, 철학, 문화 등 찬란하게 이룩한 그리스 문명을 갖게 된 것.
하지만 그리스 문명과 비교하면 로마는 낙후된 국가였다. 전쟁과 약탈을 일삼던 민족이 어느 날 갑자기 우아한 희극, 정교한 도자기, 향기로운 포도주를 즐길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최고 명예는 전쟁에서의 승리뿐이었다. 즉, 로마공화정은 공화국의 기치 아래 약탈을 경제 기반으로 삼았다.
*고대 그리스 vs 로마 제국
- 공통점: 바다에 인접(토지에 염분이 섞여 있어 작물 재배가 어려웠던 한계점)
- 차이점: 경제 기반(로마는 약탈, 그리스는 교역)
강력한 군사력으로 영토 확장을 거듭한 로마제국은 약탈로 얻은 부가 넘쳐났지만, 이는 모두 상류층이 차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다. 부를 기반으로 국력을 키우고 문화를 발전시켜야 했음에도 이들은 오직 부동산 매입에만 돈을 쏟아부었다. 농업사회에서 농사 이외에 부를 축적할 최고의 방법은 부동산 투자였기 때문이다.
투기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치솟자 나라 경제가 점차 위축되어갔다. 부동산에 돈이 몰리면서 군대를 양성하기 힘들어졌고, 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층민은 빚을 갚지 못해 직업 없이 떠도는 부랑자나 윤락녀, 왈패가 되었다. 심지어 밥벌이를 위해 노예들과 일자리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돈 많은 귀족이 늘어나면서 ‘귀족 세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왕정이 없었던 로마공화정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강력한 통치권을 가진 독재자, 즉 황제가 필요해졌다. 이렇게 해서 초대 황제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황제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화폐를 주조했다.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제국의 화폐를 통일한 것이다.
이후 로마의 상업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권력을 나눠 갖던 과거에 개인이 식민지를 약탈해 사유재산을 늘려왔다면, 제국 체제 아래서는 식민지가 황제의 사유재산이었기에 함부로 약탈할 수없었다. 화폐 통일 역시 교역을 편리하게 만들어 무역이 활발해졌다.
귀족 세력을 어느 정도 잠재우고 교역도 늘어났으나 로마의 경제 기반은 식민지 약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군사 비용은 나날이 늘어갔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약탈에 더욱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거머쥔 부에는 적잖은 대가가 따랐다. 돈을 관리하는 사람을 늘려야 했고, 더 많이 약탈하기 위해 병력도 확대해야 했으니 지출은 그만큼 커져갔다.
이처럼 약탈할수록 돈이 궁해지는 상황이 되자 로마는 화폐 가치를 낮췄다. 주화의 금과 은 함량을 3분의 1까지 낮추고 화폐 발행량을 늘린 것. 이 때문에 화폐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자 로마의 실물 가격이 상승하고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부랴부랴 다시 주화의 금 함량을 높였지만 이미 금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고 황제를 따르는 이는 더더욱 없어지면서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한때 세계가 스페인의 세력 아래 있었지만 결국 한 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농업, 광업을 기본으로 한 스페인 경제는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야 했고, 영토 정복에 따르는 빈번한 전쟁은 축적된 부의 생산적 투자를 가로막았으며, 막대한 군사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스페인이 세계 패권을 쥐게 된 건 경쟁국보다 먼저 아시아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15세기 유럽 대륙이 일련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스페인은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때마침 중국으로 가려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대량의 금과 은을 얻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스페인 도시들은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부상했고, 자연스럽게 유럽의 주요 무역 항로는 지중해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스페인 제국은 신대륙 발견과 아시아 항로 개척으로 ‘대항해시대’를 이끈 대표적 해양 국가 혹은 상업 국가였을까? 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농업 제국의 전통과 경제구조에 머물러 있었다. 정복 전쟁에 목적을 두고 국가 발전을 이뤄냈다는 점, 농업과 광업 생산에 의존했다는 점 등이 전형적인 농업 경제 형태다.
16세기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생산한 금과 은은 전 세계 생산량의 83%에 달했는데, 이를 통해 얻은 부를 제조업에 투자하는 대신 목축업과 양모업에 쏟아부었다. 국가 정책적으로도 상공업자인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추방하면서 스스로 상공업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해외 탐험에 열중하면서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엘리트’들이 앞장서 해외로 나간 사이 스페인 본토 경제가 철저히 쇠락한 것도 세계 패권을 잃은 원인 중 하나다.
스페인 무적함대 vs 영국 해군
칼레 해전이 세계 패권에 미친 영향은?
16세기 중반, 신대륙을 오가는 스페인 상선은 영국 왕실에 공공연히 해적질을 당했다. 이에 155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출동했으나, 영국은 무력으로 대적하지 않았다.
대신 영국 상인들이 스페인 왕실에 돈을 빌려준 차용증을 모아 한꺼번에 갚을 것을 요구했다. 빚에 부담을 느낀 스페인은 경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출정하는 무적함대의 수를 3분의 1로 줄였고, 그 정도로는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국에 패한 뒤 스페인은 점차 쇠퇴하고 결국 해상 패권도 잃었다.
네덜란드는 농업 일변도였던 세계경제에 상업사회의 탄생을 알리며 등장했다. 농업사회에서 영토 확보, 정치권력 획득, 신분 상승에 부를 소진했다면, 상업사회 네덜란드에서는 국내외 교역을 기초로 형성한 부를 자본으로 축적, 확대 재투자해 경제성장을 실현했다.
자원도 없는 비좁은 땅이 전부이던 네덜란드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인들은 1568~1648년에 일어난 ‘80년 전쟁’을 통해 독립한 뒤 상업 세력이 주축이 된 국가를 건설했다. 스페인 제국과 달리 경제와 전쟁의 선순환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을 마련한 것이다.
예를 들어 상업으로 축적한 부는 조세뿐 아니라 금융시장에서 유통되는 국채 형태로 군사력을 증진하는 데 사용했다. 그 덕에 네덜란드는 스페인, 영국 같은 강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한 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네덜란드의 군사 부문에 대한 투자는 자국의 무역 활동을 보호하고 상공업 세력의 경제활동을 독려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점이다.
17세기 전반기는 네덜란드 경제의 황금기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에서 향료 무역과 역내 무역을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대규모 운송 무역에서 출발해 유럽 내 사치품 무역을 장악한 데 이어 부가가치가 가장 높았던 아시아와의 무역 역시 지배했다. 이를 통해 자본 선순환을 기반으로 군사력을 유지, 세계경제의 패권국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1670년대부터 경제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상업사회 구조가 지속적 기술 발전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특정 생산물 유통에 의존한 무역이 주요 수입원이다 보니 생산성 향상이나 신제품 개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운송 수단을 우마차나 범선에 의존했는데 이는 철도, 기선, 비행기로 운송하는 산업사회에 비해 경제 효과가 현저히 떨어졌다.
네덜란드 상업사회의 원리는 ‘경제 선순환’
상업사회는 농업사회와 달리 확보된 이윤을 전부 소비하지 않고 그 일부를 자본으로 축적한 뒤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상업 거래에 재투자했다. 이것이 ‘확대 재투자’ 체제에 기반을 둔 경제의 선순환이다.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영국을 상업 국가에서 산업 제국으로 바꿔놨다. 네덜란드의 중계무역형 확대 재투자체제와 달리 영국은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기술혁신에 투자해 신제품을 개발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이 같은 ‘확대 재생산’ 체제가 영국에 세계 패권을 안겨주었다.
영국을 강국으로 키운 토대는 종교개혁에서 시작된다. 헨리 8세는 당시 영국 총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자랑하던 교회를 축출하기 위해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국고를 늘리기 위해 몰수한 교회의 땅을 헐값에 팔았다.
땅을 매입한 사람은 상인, 관리,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이들이 영국 사회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농업의 성격이 시장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토지가 농사만 짓는 수단이 아니라 수공업 등 다른 생산 방식을 응용해 부를 증대시킬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기존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수공업으로 전향하면서 영국의 방직업은 단숨에 성장했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등 경쟁국들이 혁명의 물결 속에서 힘을 소모하는 사이,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확보한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산업혁명은 생산기술의 혁신을 바탕으로 경제구조가 확대 재생산 체제로 변화한 것을 말한다. 기계화와 화석연료를 이용하는 ‘기술혁신’이 핵심인데, 이로 인해 신제품이 나오는 속도가 빨라졌고, 생산은 대규모화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수요가 계속 창출되었다. 즉 영국은 원자재나 에너지 같은 자원을 이용해 신기술로 신상품을 생산한 후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이윤을 남기는 과정을 반복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상업사회로 진입한 영국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로를 고치고 수문을 설치하고 운하를 건설하는 등 교통망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로와 레일을 이용한 운송 설비도 등장했다. 이는 농촌 공업, 도시 공업, 국내외 교역 분야를 함께 성장시켰다.
해외무역에서도 성과가 컸다. 17세기 초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설탕과 담배(아편)에 사람들이 열광했고, 영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특히 이들 작물의 경제적 가치를 보고 수백만 명의 사람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면서 신대륙 식민지에서의 어업, 곡물 경작, 광업, 제조업 등도 빠르게 성장했다. 이로 인해 영국의 무역은 거래 규모나 상품의 다양성 면에서 전성기 시절의 네덜란드를 넘어서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세계경제에 엄청난 패권을 행사했다. 자유무역을 내세워 인도 등 식민지와 교역을 강화했고, 영토 정복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산업 활동에 필요한 원료를 안정적으로 더 싸게 확보했고, 그만큼 자국의 공산품 수출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1873년부터 20여 년간 물가가 하락한 ‘대불황’ 이후 영국의 경제성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반면 미국과 독일은 빠르게 산업화하며 기술혁신에서 영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실제로 두나라가 석유, 가공식품, 전자제품, 강철, 비철금속 등을 수출할 때 영국은 여전히 직물, 철, 기계, 석탄 등의 수출에 매달렸다. 세계적으로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영국의 경쟁력은 점점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왜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을까?
영국과 프랑스는 17~19세기 초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영국보다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보유했던 프랑스가 패권을 잡지 못한 이유는 경제적 기반을 농업에 두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를수록 세금을 올려야 했는데, 이는 농민들에게 부담이 됐을뿐더러 납부 효과도 미미했다.
설령 전쟁에서 승리해 영토가 넓어지더라도 정작 군비를 부담한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없었다. 반면 상업을 경제 기반으로 하는 영국은 투자한 만큼 부가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에 상인들 스스로 더 큰 이윤을 찾아 전쟁에 투자했다. 이로써 영국은 효율적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단기간에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범위의 패권을 행사하는 국가로 발돋움했다. 식민지 시대부터 독립혁명, 남북전쟁,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미국은 농업사회, 상업사회, 산업사회의 성공 사례가 잘 조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 사업은 13개 식민지를 만들었고, 이들 식민지 경제는 당시 영국의 ‘확대 재투자’ 체제에 편승해 무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영국 군사력의 보호 아래 상업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이때 영국은 식민지의 경제활동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식민지는 자생해 영국으로 원재료를 공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간 아메리카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영국은 더 이상 식민지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후 각종 경제제재를 가하자 식민지들은 힘을 합쳐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고, 영국이 패하면서 식민지가 모두 독립 해미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독립했지만 영국의 경제체제에서 벗어나야 했다. 오랜 전란으로 재정이 어려웠던 미국은 영국을 본보기 삼아 연방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통일했다. 하지만 남부와 북부는 서로 이해관계가 달랐다. 농업경제가 발달한 남부는 영토 팽창을, 상업과 제조업이 강한 북부는 산업혁명을 지향했다.
시각 차이는 남북전쟁으로 이어져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통합된 국내 시장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후 전국에 걸친 넓은 교통 통신망과 제조업 부문의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하면서 산업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1860년대만 해도 미국은 농업 중심 국가였다. 바로 그 무렵부터 미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철광 생산 규모는 1890년에, 면직물 생산 규모는 1910년에 영국을 추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미국은 세계 산업 생산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국가로 발돋움했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제조업 발전이었다. 광대한 영토를 내수시장으로 둔 만큼 철도 건설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석탄, 제철, 기계, 전기 등 철도와 관련한 산업까지 줄줄이 성장했다. 철도는 엄청난 자본을 투자해야 했기 때문에 금융업 발전을 자극했고, 빠른 운송망을 활용해 식품 유통 부문의 혁신도 이뤄냈다.
미국이 진정한 패권국의 위치에 오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었다. 항공산업을 비롯한 첨단산업이 전시 수요와 국가의 정책적 지원 아래 성장했고, 전시 호황에 힘입어 빠르게 늘어난 미국 국민의 구매력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미국 주도로 설립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국제무역의 확산과 각국의 탄력적 환율정책 수립을 유도해 세계경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각종 원조 프로그램도 전후 복구가 빠른 시간에 이뤄지는 데 기여했다. 세계경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이 같은 노력은 확대 재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 시장뿐 아니라 세계시장이 필수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기술의 우위, 생산력, 군사력, 국제정치에서의 영향력 덕분에 미국의 글로벌 확대 재생산 체제는 한 세대 이상 발전을 거듭했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쏟아냈고,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원조에 의존하던 수많은 국가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 방대한 시장을 제공했다.
그러나 독일, 일본 등 후발주자의 추격 역시 맹렬했다. 이에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은 점점 늘었다. 냉전 시대를 거치며 군사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군사비 상승, 이라크 전쟁, 최근 중국과의 무역 전쟁 등 다른 국가들이 여전히 미국의 패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드는 비용만 해도 천문학적 수준이다.
중국은 왜 안 될까?
중국이 세계 패권을 거머쥘 수 없는 이유는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 기반 때문이다. 기업 생산성 향상보다 국유기업이 우선인 상황에서 해외 투자가 몰릴 리 없고, 남중국해 분쟁 등 세계사를 무시하는 중국 정부의 독선적 행동과 관료들의 부패로 세계의 신임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파산하면서 발생한 미국의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 했던 중국은 4조 위안(약 664조원)에 이르는 거액의 국내 기반 시설 투자를 진행, 고속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려고 했다. 갈 곳 잃은 해외 자본을 중국에 모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날림으로 세운 건설 계획을 비롯해 정치 주도에 의한 경제 발전은 결국 중국을 버블 경제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