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 디자이너 권경석 인터뷰
‘고수의 생각’은 고수의 철학, 나아가 그들이 사고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즉, 각 분야 고수들의 사고법을 배워 우리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이 인터뷰 기획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살면서 마주하는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터뷰에는 단순 신변잡기보다는 고수의 생각이 담깁니다.
1990년대 컴퓨터 대중화와 함께 한글의 디지털 폰트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를 함께한 권경석 폰트 디자이너는 애플, 구글에서 지원하는 한글 서체를 비롯해 현대카드, 배달의민족 등 누구나 다 알 만한 한글 서체를 만들었다. 그의 어떤 매력이 굵직한 기업들을 사로잡았을까?
컴퓨터 모니터가 검은색 글자들로 빼곡히 차 있다. 권경석 씨는 그런 화면을 수 시간째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폰트 디자이너는 감각에 의지한 미적 디자인을 추구하지 않아요. 글자와 글자의 관계를 계속 보면서 균형을 맞춰야 해요. 메시지가 과학적으로 전개되는 지점도 찾아내야 하죠.”
이처럼 기존 글자에 새로움을 불어넣어 서체를 재탄생시키는 사람을 ‘폰트 디자이너’라고 한다. 고딕, 명조, 굴림 등 저마다 이름이 있는 수많은 한글 폰트가 모두 이들의 작품이다.
권경석 씨는 한글 폰트 업계의 산증인이다. 대학 졸업 직후 입문해 꾸준히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며, 디자이너를 거쳐 현재는 디자인 컨설턴트까지 맡고 있다. 현대카드, 삼성, LG 등의 브랜드 전용 한글 서체를 만들었고, 네이버 나눔고딕체와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우 운영체제의 한글 서체도 디자인했다.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일인자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폰트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는다고 말한다.
Profile 권경석
한국 최초 폰트 기업 ‘산돌커뮤니케이션’의 폰트 디자인 컨설턴트
한글 폰트 디자이너가 된 계기가 있나요?
1990년대 중반, 한글의 디지털 폰트 시장이 막 형성되고 있었어요. 이전에는 손으로 글자를 쓴 뒤 그 형태를 파서 인쇄하는 방식이었다면, 매킨토시가 나오면서 컴퓨터로 글자를 디자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당시 대학 졸업을 앞두고 폰트 개발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했는데, 낯선 분야였던 데다 재미도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어요. 미개척 분야였던 만큼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았고, 비전도 밝아 보였죠. 그런 역동적인 면이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폰트 디자인이란 정확히 어떤 일인가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컴퓨터로 문서를 다루는 일이 많아졌고, 각종 광고와 인쇄 매체는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폰트를 필요로 했어요. 수많은 웹사이트의 글자, 휴대폰 화면 안에 선택된 글자, TV나 신문 광고 속 글자에 이르기까지,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것에 폰트가 쓰이고 있어요. 한글 폰트 디자인은 한마디로 한글의 외형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폰트는 쓰는 사람의 목적과 개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이 창조해야 하는 일이에요.
한글 폰트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폰트 하나를 제작하는 데에는 최소 6개월이 걸려요. 처음 기획 단계에는 콘셉트와 방향을 잡아요. 그런 다음 기본 글자를 만들고 테스트를 합니다. 한글은 영문과 다르게 모아쓰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초성, 중성, 종성을 고려해 모듈 구조를 짜지요. 이때 중요한 게 계속해서 문장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글 서체는 하나하나의 조형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조화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다음은 파생 단계예요. 가장 단순한 글자부터 획을 더해가는 것이 일반 파생 방법입니다. 많게는 1만 1172자를 만들 수 있는데, 이를 모두 만들기는 힘드니 나라에서 정한 2350자 정도를 우선 만듭니다. 만들고 나면 조합의 규칙이 생기는데, 그 규칙을 따라 나머지 글자를 자동으로 만들어요. 여기까지 하면 하나의 서체 디자인이 끝납니다.
한글을 디자인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요?
글자끼리의 균형이 중요해요. 어느 하나가 커 보이거나, 두껍거나, 삐죽이 나와 보이면 절대 안 돼요. 이는 글자 모듈을 설계할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작업해야 합니다. 그렇다 보니 한글 폰트 디자인은 감성보다는 과학적, 논리적 사고가 필요해요.
그렇게 폰트가 완성되면, 그 글자를 토대로 다른 디자인이 탄생하는 등 종류가 늘어나요. 구글의 한글 서체인 ‘본고딕’도 내가 만든 ‘산들 고딕 네오 1’을 토대로 탄생했어요.
디자인적으로 보면 한글은 어떤 글자인가요?
요즘 시대의 디자이너가 봐도 훈민정음은 상당히 수준 높은 디자인이에요.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에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즉 백성이라는 타깃이 명확하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자’라는 확실한 콘셉트도 있습니다. 모양 역시 모듈 스타일로 사용하기 편리하고 익히기도 쉬워요. 요즘 말로 ‘UX(User Experience) 디자인’인 셈이죠. 15세기에 이미 현대의 모더니즘을 담았다고 할까요.
한글 폰트의 단점은 무엇일까?
아날로그로 사용했을 때와 달리 디지털 폰트로서는 사용성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종이 위에 인쇄하기 위해 고안된 서체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한글은 세로 쓰기가 원칙이에요. 세로로, 오른쪽부터 씁니다. 세로로 쓰다 보면 저절로 라인이 생기고 한글의 오른쪽 글이 예쁘게 맞아떨어져요. 띄어쓰기나 물음표 같은 특수 기호 없이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죠. 세종은 이처럼 뚜렷한 의도와 원칙을 가지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서양의 가로 쓰기를 받아들여 쓰고 있으니 라인이 망가지고 안 예쁜 것입니다.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글 폰트 디자이너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면요?
말하기 쑥스럽지만 제가 디자인한 글자에 ‘귀여운 느낌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웃음) 어릴 적에는 이런 평가가 안 좋게 들리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예쁘다는 의미니까 지금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지금 본문용 서체처럼 진지한 글자를 디자인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폰트는 뭔가요?
글쎄, 모든 폰트가 다 내 자식 같아서 어느 한 가지만 꼽을 수가 없어요.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폰트는 네이버의 ‘나눔고딕’입니다. 나눔고딕을 만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굴림을 가장 많이 사용했어요. 굴림체는 일본식 서체에서 따온 폰트예요. 그래서 한글 고유의 멋을 살리기에는 부족했어요. 한국식으로 미감을 바꾸려고 고딕 디자인을 시작했고, 나눔고딕을 완성했어요.
나눔고딕은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어요. 기존 고딕이 가진 딱딱한 이미지를 바꾼 것이 주효했던 것이지요. 사실 디자인 기획 과정에서 트렌드 조사를 통해 딱딱한 글자보다 부드러운 느낌의 폰트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고, 그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결과였기에 더욱 보람찼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2003년부터 삼성 서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한글, 일본어, 중국어 세 가지 폰트를 만드는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어요. 완성하는 데 10년이나 걸린 장기 작업이기도 했지만, 서체 검수위원이 일본의 폰트 대가여서 소통에 애를 먹는 등 힘든 일이 많았어요.
하지만 당시 한국과 일본의 폰트 기술력 차이가 컸기 때문에 일본의 선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한글과 일본어의 디자인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죠. 예를 들어 곡선을 만들 때 한글은 한 번에 시원하게 내려가는 맛, 즉 기백이 아름답고, 일본어는 획을 그어갈수록 점점 동그랗게 휘는 세밀한 곡선이 아름답다고 보았죠. 이를 두고 일본 측과 의견 충돌도 있었어요. 그러나 결국 설득해서 한글에 관해서는 일본 측이 우리 정서를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한글 폰트 디자이너로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최종 목표는 대한민국의 가장 기초가 되는 서체를 만들고 싶어요. 서울에는 서울 서체, 제주에는 제주 서체가 있고, 각 기관에는 대표 서체가 있어요. 그러나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서체는 아직 없어요. 국민이 편안하게, 자주 애용할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합니다. 아직 본격 기획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꼭 만들고 싶습니다.
애플, 구글 등 글로벌 IT 기업에서 서체를 의뢰합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유행을 좇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것을 좋게 본 게 아닐까요? 트렌드를 반영하되 글자가 가지고 있는 기본 조형은 벗어나지 않도록 디자인하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에요. 폰트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가진 글자다 보니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도 담겨야 합니다. 그래서 한글을 디자인할 때 계속 문장을 만들어보고 시험하죠. 예를 들어 서정적인 폰트는 감성적인 문장이나 말로 테스트해요.
아이디어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목표하는 바가 있어야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이다.
나는 목표를 세울 때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임한다.
뭐든 이뤄질 거라는 긍정적 상상을 하며.
좋은 폰트란 무엇일까요?
폰트는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보다 기능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되면 좋은 폰트라 할 수 있어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원리가 가장 좋은 예죠. 세종은 훈민정음을 백성이 많이 쓰길 원했어요. 하지만 한자를 배워야 출세할 수 있는 시대에 누가 훈민정음을 쓰겠습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한글의 당위성’이에요. 한자는 조상들이 쓰던 언어로, 그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썼으니 나도 쓰는 식이죠.
그런 ‘유전적인 당위성’을 뛰어넘는 상위 개념이 필요했어요. 그것이 바로 ‘세상을 만든 이치’예요. 세상이 만들어진 이치를 디자인에 담으면 사람들이 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판단한 것이죠. 그래서 우주의 이치를 훈민정음에 넣었습니다. 천지인 사상, 사람의 발성기관 모양, 음양 이론 등을 말이죠. 무엇보다 살아 있는 폰트를 만드는 것이 브랜드를 성공시키는 가장 핵심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디지털 폰트의 의미는 뭘까요?
이전에는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글자가 쓰였다면 지금은 감성,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폰트가 존재합니다. 기존에 기업의 목소리, 즉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광고 영상이나 이미지로 전달했다면 이제는 서체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대가 되었죠. 배달의민족 서체나 현대카드 서체처럼, 기업이 먼저 이 분야에 눈을 떠 감성을 전달하는 데 폰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감성을 공유하고 향유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손글씨에 자신이 없다면 수많은 폰트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폰트를 골라 쓰는 것이죠. 편지를 쓸 때마다 한 가지 폰트를 사용해보세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할 수 있을뿐더러 전달력도 훨씬 좋아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