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와 와인, 저마다의 바이브에 대하여
나는 '알알쓰'다. 알아주는 알코올 쓰레기. 술자리에서 평생을 빨개지는 얼굴과 구토로 일관했다. 그랬던 내가 요즘 밤이 기다려진다. 와인에 빠졌기 때문이다.
매일밤 육퇴 후 한두 잔씩 먹는 게 힐링이 된다. 이따금씩 와인 한잔이 생각나서 침이 고일 때도 있다. 얼마 전에는 인터뷰이가 권하는 와인에 눈이 돌아가 술 마시며 인터뷰까지 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극구 사양했을 알쓰가.
왜일까? 알쓰인 내가 와인에 빠져버린 이유. 궁금했다. 생각 끝에 와인이 주는 '바이브'에서 답을 찾았다. 그건 한국의 주류 양대산맥 소주, 맥주에 반하기에 나름 울림이 있었다.
소주, 맥주의 바이브는 내게 버겁다. 소주는 한잔 마시고 크~ 하고 안주 한 점 집어먹기, 맥주는 벌컥벌컥 물처럼 마시는 게 멋진 바이브다. 소주, 맥주를 먹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은 이들 바이브를 추구한다.
와인은 원샷의 미학을 추구하지 않는다. 와인의 풍미를 즐기기에는 벌컥벌컥 먹는 주도가 맞지 않는다. 잔에 담긴 향과 첫맛, 중간맛, 끝맛을 느끼려면 천천히 먹는 게 좋다. 물론 취향껏 원샷을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원샷을 한다 한들 소주, 맥주에 비해 와인의 음용 속도가 느린 건 팩트다. 이 같은 와인의 '느림'은 소주, 맥주가 풍기는 빠른 속도를 따라가는 게 버겁던 내게 천군만마와 같다.
와인은 첨잔이 정석이다. 그래서 밑잔을 깔았네 마네, 꺾어 마시네 마네, 하는 논란이 안 생긴다. 반면 소주는 원샷이 기본이다. 조금이라도 잔에 든 술이 찰랑거리면 바로 지적이 들어온다. 다 같이 잔을 비운 뒤, 새 술을 따라 건배하고 마셔야 한다는 소주의 암묵적인 룰 때문이다. 알쓰 입장에서는 그런 주장이 다소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소주의 주도가 원샷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여기 모인 우린 하나의 공동체', '모두가 똑같이 마시고 다 같이 취해야 친목을 도모할 수 있다'는 바이브 때문이다. 그래서 소주를 먹는 자리에선 술 잘하는 이가 리드하고, 그의 음용 속도에 구성원 모두가 따라가는 형국이다. 그러나 사람은 제각각이고 주량도 다르다. 그래서 기분 좋게 취하는 이가 있는 반면 알쓰들은 버거워서 토하거나 뻗어버린다. 심지어 자리를 일탈하기도 한다. 소주를 위시한 자리가 알쓰들에게 전혀 즐겁지 않은 이유다.
또 한 가지 소주가 원샷 문화를 가진 이유는 '맛' 때문이다. 주당들은 소주의 차가움을 사랑한다. 그래서 잔에 담긴 채 실온에 오래도록 노출되는 꼴을 못 본다. 알쓰가 술을 먹지 않고 쉬고 있으면, 주당들은 "술이 식는다"며 난리를 친다. '식는다'는 건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소주에는 가장 맛있는 온도가 있는데 그 냉기가 데워진다는 의미다. 냉기가 가시기 전에 입에 머금어야 진정한 소주맛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알쓰들이 느끼기에는 냉기가 있건 없건 똑같은 소주일 뿐이다. 소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식는다고 알쓰들을 갈구는 건 전지적 주당 시점에서 하는 얘기인 셈이다.
그런 주도가 알쓰인 내게도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그게 친목이고 그 자리에 모인 이유인 것을.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고, 이겨내야 했던 게 소주의 바이브다. 그건 술자리에 합류하기 전 숙취를 없애준다는 약을 먹거나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가는 등 알쓰들에게 비장한 준비를 하게 한다.
반면 와인에는 디캔팅(decanting)이라는 주도가 있다. 와인을 주전자나 유리병 등의 용기에 옮겨 담은 뒤에 먹는 방법이다. 신기하게도 용기에 옮겨 담았다가 먹으면 훨씬 맛이 좋아진다. 와인이 산소와 결합되면서 숙성을 가속화하기 때문에 향이 풍부해지고 맛도 더 부드러워진다.
달리 말해 소주처럼 술의 온도가 변하기 전에 서둘러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공기에 산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디캔팅이 있는 만큼 더더욱 빨리 먹을 이유가 없다. 천천히 먹으면 그것대로 맛있고 새로운 맛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속도가 알쓰인 내게 맞다. 잔을 다 비우지 않아도 되고, 늦게 먹어도 되니 이만한 술이 또 없다.
알쓰는 대게 안주빨을 세운다. 입에 털어 넣은 알코올의 비릿하고 쓴 맛을 빨리 없애기 위해서 안주를 이용한다. 나만해도 소주를 먹고 곧바로 안주를 먹는다. 그건 주당들에게 놀림감이 된다. 그들은 안주빨 세운다며 비아냥댄다. 그걸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안주를 조금 먹는 것도 소주의 바이브이기 때문이다.
와인도 안주를 적게 먹는 건 소주와 같다. 하지만 소주가 분위기상 어쩔 수없이 조금 먹는 바이브라면 와인은 자발적인 소식이다. 와인은 천천히 먹는 데다 먹을 만큼만 삼키기 때문에 혀와 목에 닿은 알코올을 억지로 씻어낼 필요가 없다. 감당할 만큼의 알코올만 마시는데 안주가 필요할리가 있나. 그 덕에 아무리 알쓰라도 안주 없이 술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