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먹을 때보다 먹은 후가 더 진하다.
저녁시간.
늦은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더니 아직 허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조금이라도 먹어두지 않으면 이따가 밤 11시엔 좀비처럼 음식 주변을 어슬렁거릴 게 뻔하다.
아직 장을 봐오지 않아서 먹을 게 거의 고갈 상태다.
가까운 슈퍼는 야채 상태가 좋지 않아서 시간을 내서 큰 마트로 가야 하는데, 아직 그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냉장고를 뒤적이자 냉동실에 새우가 눈에 띄었다. 지난번에 장본 이후로 한 번도 뜯지 않은 미역과 함께 끓여 내면 맛있는 미역국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 오늘의 메인은 새우 미역국이다.’
미역국은 오묘하다.
마치 풋내기 요리 초보에게는 그 깊은 세계를 다 드러내주지 않는 음식 같다.
노련하게 야생마를 길들이지 못한 조련사가 땅으로 낙마하듯이 미역국도 내게 야생마 같았다.
신혼 때 미역국은 언제나 실패한 요리 리스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온갖 방법을 찾아서 남들이나 엄마가 알려준 방법대로 만들어도 맛을 내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그나마 생일에 소고기를 넣어서 만들면 소고기 국물로 인해 그럴듯한 맛이 났지만, 매번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먹기엔 자금이 여의치 않았다.
아무리 시도해도 그 솜씨가 나아지지 않자, 나는 미역국을 오랫동안 포기했었다. 위로가 되는 것은 이 음식은 내게만 어려운 게 아니었는지 MSG로 쉽게 감칠맛을 내려하는 주부 9단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그렇게 생일이 아니면 웬만하면 미역국을 끓이지 않으려고 했다.
한번 맛이 꼬이면 당최 해결책을 몰랐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산후조리원에서 먹었던 감자를 넣은 미역국이 생각났다.
조개류, 생선류, 고기류 때론 미역만 넣어서 끓여 내는 건 먹어봤지만, 감자를 넣은 미역국은 산후조리원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맛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감자는 포슬포슬하게 익어서 부드럽고 묵직한 국물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던 맛의 기억이었다.
오랜만에 미역국, 그것도 감자를 넣은 미역국을 시도해 봤다.
먼저 마른미역을 미지근한 물에 담가 불게 두고 육수를 만든다.
그즈음에 나는 모든 국물 베이스를 다시 멸치로 내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멸치에서 내장을 제거하고 불을 올린 냄비에 약한 불로 비린내가 날아가도록 볶았다.
나는 멸치가 약간 탄 듯했을 때 국물을 내는 게 가장 맛있는데, 그럴 때면 가족들은 집안에서 멸치 냄새가 많이 난다며 불평을 한다.
적당히 볶아져서 멸치에서 비린내가 날아간 듯하면 물을 붓는다.
‘취--‘
달궈진 냄비에 차가운 물이 닿아 요란한 소리를 낸다.
국물 양이 되게끔 물을 부어 끓게 하고 불린 미역은 물을 빼고 간장,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한 뒤에 양념이 배게 둔다.
감자는 못생기게 듬성듬성 아무렇게나 잘라버린다. 이게 또 먹는 재미가 될 것 같았다.
육수가 보글보글 끓으면 잠깐 다른 볼에 따라놓고 양념 밴 미역을 냄비에 달달 볶는다. 미역이 한참 뜨거워져 있을 때에 준비한 육수와 감자, 간장, 멸치 액젓, 소금, 다진 마늘을 넣고 이제 우려내듯이 끓인다.
미역국이 한참을 묵직하게 부글부글 끓었고 감자도 익었다.
드디어 간을 볼 때가 된 것이다.
’ 이번에는 과연...? 제발 좀 맛있어라!‘
’와, 맛있어!’
처음의 성공이었다.
미역국은 묵직하고 부드러웠으며 절묘하게 간이 배었고 특유의 미역 비린내도 없으며 모든 맛이 꽉 차 있었다.
가족들도 감자가 들어간 미역국은 처음 본 터라 의아해하면서 조심스러웠지만, 그 어울림의 맛을 보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이때의 성공 이후로 미역국은 손에 잡히는 음식이 되어 언제든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항상 미역국을 먹고 난 다음에는 특이한 느낌이 든다.
먹을 때에는 맛으로 먹지만, 다 먹고 난 뒤에는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이 느낌은 나만이 아니라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미역국은 몸에도 좋지만 그렇게 마음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