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련>과 <유진과 유진>을 통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
<홍련>
2024. 07. 30 ~ 2024. 10. 20
마틴엔터테이먼트
대학로 자유극장
한재아, 김이후, 홍나현, 이아름솔, 김경민, 이지연, 고상호, 신창주, 이종영, 김대현, 임태현, 신윤철, 정백선
<유진과 유진>
2024. 07. 06 ~ 2024, 09. 22
낭만바리케이트
링크아트센터 드림 4관
최태이, 오유민, 전혜준, 유주혜, 강혜인, 이한별
1. 들어가며
2. 스토리 라인
3. 굿과 인형극의 심리학적 치료 방법 – 털어놓기, 들어주기
4. 홍련과 유진이 가지는 슬픈 현대성
5. 나오며
2024년, 대학로에는 <접변>, <카르밀라>, <유진과 유진> , <홍련>과 같이 여성이 주도하는 극들이 많았고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홍련> <유진과 유진>은 작품에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상처를 포함하고 있어 눈물 흘리게 했다.
<홍련>은 고전 소설 <장화 홍련>과 바리공주 설화를 섞은 작품이다. 바리공주는 저승을 관리하고 밑으로 강림과 같은 차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재판을 열어 아버지와 남동생을 해한 배홍련의 잘못을 가리는 재판을 연다.
배홍련은 자신이 아버지와 남동생 장쇠를 해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재판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행위가 우습다며 언제나 그랬듯이 무시하라고 비꼰다. 그러면서 바리데기 공주가 그랬듯이 효를 지켜야 했냐며 분노한다. 사실 홍련은 방임과 구타를 포함한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유진과 유진>은 두 명의 유진이 주인공이다. 두 사람 다 이름과 성별, 나이, 학교가 똑같고 키가 크고(큰 유진) 작다(작은 유진)는 차이점만 있는 인물이다. 둘은 새 학기에 같은 반 학우가 되고 큰 유진이 작은 유진을 알아본다. 큰 유진을 통해 비어있는 기억과 어머니의 반응에 의문을 품던 작은 유진은 수학여행 때의 일시적 탈선을 계기로 비어있던 끔찍한 진실을 마주한다.
<홍련>은 재판이라고 하지만 사실 한을 씻기 위한 씻김굿 중이었고 <유진고 유진>은 심리 치료에서 사용하는 역할극 중이었다.
보통 굿은 나쁜 기운을 없애거나, 일이 잘 풀리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과의 연결이고 그 이유는 죽음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에 있다. 이 의미는 장화와 홍련이 겪은 일의 슬픔을 가중하는 효과가 있다. 생전에 그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면 이런 비극은 미리 막을 수 있었다.
씻김굿 과정을 통해 홍련은 자신이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 깊이 쌓아만 두었던 감정을 털어놓고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홍련은 언니 장화의 죽음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방어기제로 인해 홍련의 기억이 엉망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바리도 속내를 털어놓는다. 바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 한다는 말을 시작하는데 바리공주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았는데 아버지가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다시 찾았다. 그런데도 바리공주는 아버지인 왕을 낫게 할 약을 구한다. 버림받았는데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효를 지켜야 하냐는 홍련의 지적이 바로 이 부분이다.
물론 바리공주도 아버지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구한 이유는 복수라고 스스로 밝힌다. 홍련은 처음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도 나중에 뜻을 이해하고 천도한다.
<유진과 유진>은 두 사람이 과거 일을 털어놓는 구성이다. 유진은 인형과 스스로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역할극을 통해 과거의 경험과 느낌을 말한다. 지나온 일을 다시 두들기며 답답한 마음을 비우며 자신을 응원한다. 그리고 똑같은 아픔을 경험한 다른 유진이 공감하며 힘을 얻는다. 동시에 가장 가까웠던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한다. 비워내는 행위를 통해 홍련과 유진은 자신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듣는다. 너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네 탓이 아니라는 것. 홍련과 유진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두 작품은 굿과 인형극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이용한다. 그 방법들의 본질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 제사나 굿에 대해 말이 많으나, 사실 남겨진 사람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사람을 떠나보내고 슬픔에 빠진 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이 좋은 곳으로 향했길, 극락왕생을 바라며 의식을 지낸다. <홍련>도 그러하다. 죽었으나, 억울함과 혼란으로 떠나지 못하는 홍련을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가족과 주변인 중에서 홍련의 안녕을 빌어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홍련을 달래주는 이는 재판관 역할인 바리공주였다. 홍련은 죽어서, 아무런 인연은 없으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바리공주에게서 위로받는다. <유진과 유진>의 유진도 인형을 통해 상처 주었던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면서 본질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 끝에 유진에게 위로받는다.
언니 장화는 처녀가 외간 남자를 이리저리 품었고, 임신까지 해 자살했다고 모두가 믿었다. 하지만 사실 계모의 계략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대상으로 홍련으로 옮겨갔다. 장화와 홍련도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공주처럼 아들 장쇠에게 밀려 뒷전이었고 아버지도 딸들을 방치했다. 하물며 사람들은 장화에게 남자들과 몸을 섞었고, 임신까지 했다며 2차 가해까지 한다.
자살은 보통 현실 도피 의미를 지닌다. 현실을 마주하기보다는 피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 홍련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죽어야만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괴롭히고 멋대로 소문을 믿는 어른, 피해자로 낙인찍으며 부끄러운 일이라며 숨기려 들고, 가까이 지내지 말라던 유진의 어른 때문이었다.
큰 유진은 범죄 피해자니까 가까이 지내지 말라던 명색에 청소년 전문가라던 건우의 어머니를 따라 헤어지자는 건우에게 상처받는다. 전문가라던 건우의 어머니까지 2차 가해를 한다. 작은 유진은 이유 모를 어머니의 냉대에 자신은 사랑 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과 상처를 숨기려 드는 태도에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여겨 괴로워했다. 심지어 작은 유진은 조부모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소송에도 빠져 처벌조차 못했다.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얽히기를 꺼리며 그것도 모자라 2차 가해까지 하는 행태는 2024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바리공주는 홍련에게 네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홍련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언니 장화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먼저 괴롭힘의 대상이었던 언니를 보며 자신은 아직 괜찮다며 안도했던 스스로를, 두려움에 학대에도 못 본 척 해야 했던 나약함이었다.
홍련은 언니가 자신을 미워할거라 믿었다. 장화가 남긴 편지를 읽을 때도 바리공주의 말을 자르고 끔찍했다고 멋대로 편지 내용을 단정 짓는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언니 장화가 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했고, 네 잘못이 아니란 편지였다.
작은 유진은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됐어도 힘들어한다. 하지만 큰 유진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고 상처를 회복할 힘이 있다며 힘이 되어준 어머니처럼 자신과 작은 유진을 위로한다.
<홍련>, <유진과 유진> 모두 ‘과거’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고전 문학 바리공주와 장화홍련전, 2000년대 초반을 살고있는 유진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아픔과 고통은 ‘과거’가 아니라는 점이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해당 작품들을 보고 마음에서 어떤 울림을 느꼈다면 그것은 <홍련>과 <유진과 유진>의 이야기가 지금의 이야기인 탓이다. 이들의 상처를 언급하는 것이 불편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외면하고 부정한다면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