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영월 장산
장마철이다.
아침에 둘이 만나 차를 몰고 출발하는데 비가 그쳐 있다.
"예보엔 비가 온댔는데 어쩐지 기분에 의외로 안 올 거 같아. 안 그래?"
자동차가 강원도에 접어들자 비가 오다 말다 한다.
"그래, 올 거면 차라리 지금 빨리 오고 그치는 게 나아."
낮 12시, 상동119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땐 해가 강렬했다. 파란 하늘이 보인다는 기쁨도 잠시, 습기를 잔뜩 머금은 뜨겁고 무거운 햇살이 사정없이 머리로 등으로 내리꽂힌다. 신발끈 조이는 간단한 움직임에도 땀이 막 난다.
"덥지만 이게 어디야. 비 맞는 거보단 낫지."
드디어 산행 시작. 마을을 지나 산길에 접어드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급격히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바람이 휭휭 불고 분위기가 이상하다. 조금 있으니 비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
"................"
더 이상 어떠한 긍정회로도 돌릴 수가 없다. 그냥 조용히 마음속으로 생각할 뿐.
장마철이라잖아......
너무 더워서 비옷을 입을 수도 없다.
정상에 짐을 풀고 텐트를 꺼낼 때까지 비는 멎지도 않는다.
상동119 지구대 앞에서 짐을 정비하고 배낭을 둘러멨다. 등산로 입구까지는 조금 마을길을 걸어야 하는데, 마을 청년 두엇이 무언가 일을 하다가 커다란 배낭을 멘 우리 둘을 보더니 다가왔다.
"상동 청년회에서 지역 발전에 참고하려고 저희 지역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설문을 드리고 있는데요, 간단하게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뭐 그러세요.”
”백패킹을 어느 산으로 가시는 중인가요?"
"(내 등 뒤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요기 장산이요."
"아, 그렇군요.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성남에서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실 때 교통편은 어떻게 이용하셨나요?"
"저쪽에 저희 차 주차돼 있어요."
"아, 자차로 오셨군요. 먼 곳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셨는데, 장산이 백패커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진 산인가보죠?"
"아뇨."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입에서 저절로 대답이 나왔다. 사실 나는 장산이라는 이름을 일주일 전에 처음 들었다. 부산에 있는 장산은 들어봤어도, 태백산과 함백산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장산이라는 산은 전혀 모르는 곳이었는데 정상 사진이 너무 멋지길래 무작정 찾아온 것이었다.
너무 빠른 대답을 한 것 같아 살짝 미안해졌다.
"아... 그게... 그래도 인터넷 보니까 장산 얘기도 꽤 있고.... 오는 분들이 꽤 있는 거 같긴 해요."
하지만, 그렇지 않음이 확실하다. 쉴 틈을 주지 않는 끝없는 오르막길이 두 시간 가까이 무자비하게 이어지더니 서봉에 가까워지자 그 길마저 희미해졌다. 낙엽이 잔뜩 덮인 희미한 산길에 비까지 오니 몇 번이나 길을 놓치고 헤맸다. 사람이 많이 다닌 산이 아니었다.
비는 꾸준히 내렸다. 물에 담갔다 꺼낸 사람처럼 온몸이 다 젖었고 목욕탕에라도 온 듯 손가락 끝이 불어 쭈글쭈글하다. 급기야 신발 안에까지 물이 침투해 들어온다.
삼년 전 비내리는 10월 어느날 설악산 길골에서 계곡을 건너다 물에 빠진 이후 이렇게 홀딱 젖어보긴 처음이다. 그땐 저항령 찬 바람에 덜덜 떠느라 계곡물에 빠진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었는데, 그나마 지금은 여름이라 다행이다.
서봉에 올라서니 바람이 세다. 젖은 샌드위치를 먹다 보니 조금 추워져서 비옷을 꺼내입었다.
잠시 걷힌 구름 사이로 저어기 장산 정상이 언뜻 보인다. 어휴 저길 언제 가나. 까마득하다.
박배낭을 멘 탓도 있지만 산행이 너무너무 힘들다. 일단 이렇게 큰 산인 줄 몰랐다. 그리고 비가 너무 내린다. 아무리 배낭 커버로 꽁꽁 싸맸다지만 습기를 먹은 배낭이 축축 처지고, 젖은 바지는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한다. 저항을 포기하고 물기에 완전 투항해버린 신발은 걸을 때마다 찌걱찌걱이다. 기진맥진, 어쩔 수 없이 옮기는 걸음에 어지럽고 속까지 울렁거린다.
어기적거리며 정상 데크에 도착하니 오후 5시. 네 시간 반을 걸었다. 문식이는 안경이 없어졌다고 길을 되짚어 내려가더니 못 찾고 그냥 돌아왔다. 안경 쓰는 사람이 걷는 도중에 안경을 잃어버리는 게 가능한 일인가? 둘 다 정상 상태가 아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강원내륙과 충북, 경북에 엄청난 비가 왔고 영월에서 멀지 않은 경북 봉화에는 300mm 넘는 물폭탄이 쏟아져서 여러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도 났단다. 어쩐지 비가 많이 오더라니.
다행히 비가 멎길래 얼른 텐트를 치고, 무겁게 지고 온 닭갈비를 익혀서 막 먹기 시작하는데 멈춘 줄 알았던 비가 다시 쏴아....
닭갈비인지 닭곰탕인지 알 수 없는 음식을 허구허구 퍼먹었다. 막걸리 한통을 가져왔는데 컵에 따라놓으니 자동 리필이 되어 줄지를 않는다.
성향 차이겠지만 나는 쉘터니 테이블이니 장비를 싸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캠핑을 하기 위해 산에 오는 게 아니라 산에 돌아다니기 위한 수단으로 야영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당해도 할말은 없다.
앗 그런데 갑자기 트이기 시작하는 이 조망은.....
어릴 때 낡은 브라운관 티비를 틀면 처음에 흐릿하다가 점점 또렷해지듯이
산봉우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저녁 햇살을 받아 빛나기 시작한다.
이런 몽환적인 석양이 찾아왔다.
반대쪽에는 무지개.
이렇게 놓고 타임랩스를 찍었다.
그렇게 해가 져 가는 하늘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비에 씻긴 하늘이 투명했다.
"아, 지금 너무 행복하다."
말해놓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 입으로 이렇게 단순명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행복하다는 말을 언제 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지금 이 산이 좋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나의 평소 말투가 쓸데없이 복잡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따스한 저녁 햇살과 뭉롱한 풍경에 기쁜 나머지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해방의 순간을 맞이했던 장면은 차마 여기에 올릴 수는 없다.
그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밤이 찾아왔다.
밤새 달빛이 밝았다.
장산의 확실한 매력이 한 가지 있다. 주변 산들보다 월등하게 높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시야가 높다. 그래서 자꾸만 설정샷을 찍고 싶은 유혹이 든다.
서봉 안부까지 되돌아간 후 하산하다 길을 잃었다. 역시 산길이 너무 희미하다. 나뭇가지에 긁혀가며 두어 번은 겨우 길을 찾아냈지만 나중엔 포기하고 계곡으로 뚫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앞을 막고 배낭과 피부를 긁어대는 나무, 아니면 잡으면 힘없이 부러져서 균형을 잃게 만드는 썩은 나무, 거의 두 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땀범벅이 되어 계곡 근처로 내려섰다. 아직 절음박골의 중단부 정도.
그런데 계곡을 만나자마자 마주친 광경은 눈을 의심케 했다.
길도 없는 산 속에 다 썩어가는 승용차가 버려져 있었다!!!
영화에 보면 저런 데에 마약쟁이 노숙자가 살든지 아니면 시체가 있던데...
기분이 으스스했다.
GPS 좌표 없이 다시 가자고 하면 아마 못 찾을 것 같다. 길 없는 산 속을 헤매다가 숲을 뚫고 내려왔는데 하필 처음 마주친 것이 자동차라니. 하늘에서 떨어졌나? 저긴 차가 다닐 도로는커녕 사람 다니는 길 찾기도 힘든데.
본네트 부분은 통째로 사라지고, 문짝도 없고, 바퀴도 없고, 트렁크 뚜껑도 없고, 주변에는 기계 부속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대체 어떤 사연으로 저 자동차는 이곳에 남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쉽지만 차 안을 살펴보진 않았다. 그 순간엔 차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몰라 살짝 무서웠고, 무엇보다 너무 덥고 힘들고 지쳐서 얼른 내려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후에도 등산로라기보다는 물이 흘러 패인 자국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역시 사람이 많이 다니는 산은 아니다.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산과 마을이 만나는 곳엔 폐허로 남은 숙소 건물이 있다.
광산 노동자들의 즐거움과 슬픔, 사랑과 미움, 그 모든 이야기들은 이제 저 깨진 유리창과 불에 그을린 자국으로 남았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떠나간 이들의 자리에서 텃밭을 일군다.
오래 전에는 저 산중까지 사람이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까 걸어 내려오던, 잡목이 우거진 물 흐른 자국은 한 때는 그럴듯한 비포장도로여서 그 위로 차가 다녔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난 후, 영월 상동에는 또 비가 왔다.
모든 것이 내리는 비와 함께 조금씩 조금씩 씻겨 사라져간다. 물론, 우리의 산행처럼 비와 함께 새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들도 있다.
장마철이다.
이 산행의 GPX는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910118/5757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