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부터 왜?라는 궁금증이 들면 나 스스로 답을 완전히 얻을 때까지 골똘히 생각하면서 뿌리를 뽑는 성격이었다.
없어진줄 알았던 나의 호기심은 10년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어떤 질문을 해도 그 자리에서 시원시원하게 대답해주는 법륜스님을 보면서 불교라는 종교가 궁금해졌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불교 TV를 보고 유튜브를 보고 불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밥먹고 잠자고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몇년간 읽고 또 읽었고 보고 또 보았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질문들을 속 시원하게 풀수 있는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색은 공하지만 어떻게 공한 것이 색이 될수 있을까?(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걸까?(만법귀일 일귀하처)
식작용과 갈애를 끊으면 어떻게 윤회를 벗어나서 열반에 드는 걸까?(12연기법)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왜 뜰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을까?(선문답)
부모미생전 본래면목(부모님께 몸 받기전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깨달음을 왜 '백척간두진일보'라고 했을까?(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죽을텐데..)
이중표 교수의 12연기법이라는 책을 3번 읽었다.
첫 번째는 정독을 하고 두 번째는 줄을 그으면서 읽고 세 번째는 줄 그은 내용을
중심으로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읽었다.
무언가 답을 얻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답은 2차원의 답이었다.
우연히 서양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되면서 3차원의 답을 알게 되었다.
2차원 평면에 사는 사람은 결코 3차원 입체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2차원을 고집하면 유리병 안에 갇히게 되고 우물속을 벗어나지 못한다.
3차원 유리병 밖의 세상, 우물 밖의 진리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같다.
동굴 속에서는 태양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동굴을 벗어나면 진리라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볼수가 있다.
3차원 입체를 일단 경험하면 4차원 시공간을 걸어갈수가 있게 된다.
걷기 시작하면 뛸수 있고 뛰기 시작하면 날수 있다.
나는 이제 막 유리병, 동굴, 우물 밖으로 벗어나온 어린아기와 같다.
고개 숙인 2차원 평면에서 겨우 고개를 들어 3차원을 바라볼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2차원을 기어가는 것과 3차원을 아장아장 걸어갈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10년 전 읽었던 12연기법을, 그리고 위의 여러 가지 질문들을, 이제는 버벅거리지 않고 3차원적으로 대답할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면, 어느 한 순간 어두웠던 동굴속의 횃불이 단박에 켜지게 된다.
어둠 속에서 손으로만 만져봤던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게 된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나는 앞으로 ‘철학을 동화처럼’ 쓰고 싶고, 쓸 것이고 공유하고 싶다.
내가 느꼈던 지적 희열과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고 내 삶의 목적이자 보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