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페이지의 여자

기억의 상실

by 이다연

ㅡㆍㅡ


그때를

묻지 마세요
나는 기억하지 못해요


아니,

기억이라는 문이
내 앞에서만 조용히 닫혔어요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 시절의 나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앨범 속 웃는 여자,
낡은 옷 속 쪽지,
그때 쓰인 일기장의 필체


모두가 나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아는 방식으로 알지 못해요


그 시절은 마치

누군가의 꿈을 훔쳐온 것처럼
익숙한 얼굴에 낯선 마음이 들어 있어요


나는 내 인생의 일부 장면이

지워진 필름처럼
덜컥거리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공백은
무엇보다 명확하게 말하죠

그 자리가 있었다는 걸


나는 매일

그 자리를

조심히 지나갑니다


다시 쓰지 않고,
억지로 꺼내지 않고,
그저 존재했던 흔적을 인정하며


때로는 기억보다 잊힘이

더 오래

누군가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비워진 부분을 가진 채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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