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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thing special/ 안면도

12. 안면도, 바다 너머 숲이 말을 거는 섬(安面島)

by 이다연
사막처럼 건조한 마음에,
초록의 바람이 스며든다.
“섬인데도 육지 같고,
육지인데도 섬 같은 곳.”
“길 위에 떠 있는 숲 하나, 안면도.”
“나무가 바다를 보고 있고,
파도가 숲을 스친다.”


1. 섬, '연결과 고립 사이'

안면도는 이름부터가 묘하다. ‘얼굴을 맞댄다’는 뜻의 '안면(顔面)'이 아니라, ‘편안히 머문다’는 ‘편안 안(安)’과 ‘낯 면(面)’. 그 이름은 마치, 이 섬이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장소라는 듯하다.


충청남도 태안군에 속한 이 섬은 원래 '섬'이었으나, 1970년대 안면교가 개통되며 육지와 이어졌다. 그러나 안면도는 여전히 ‘섬’이다. 행정구역상의 연결은 이곳의 고립된 감성을 지우지 못했다.


바다와 나무, 소나무 숲과 해안선이 동시에 흐르는 풍경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이질감을 품고 있다. 마치 ‘섬 같지 않은 섬’이라는, 아이러니한 정체성.


2. 바다와 숲, 이중의 리듬

안면도를 걸으면 발밑이 부드럽다. 모래사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깊게는 나무와 물이 동시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동쪽은 바다, 서쪽은 해변, 그 사이에 울창한 소나무 숲과 해안 사구(沙丘) 지형이 자연스럽게 포개져 있다.


안면도는 걷는 방식부터가 다르다. 바다를 향해 걷다가, 어느 순간 숲 속으로 스며들고, 다시 파도 소리에 끌려 나오는 리듬. 가거도가 시간을 증발시키는 섬이라면, 안면도는 ‘이중의 시간’을 겹쳐 사는 섬이다. 바다의 파동과 숲의 숨결이 겹쳐지는 사이, 나는 속도를 조율당한다.


3. 생태, 지질, 기억의 단면

안면도의 자연은 유려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뚜렷한 선들이 존재한다.

▶️ 100만 그루의 해송이 자라는 ‘안면 송림’
▶️ 모래언덕과 바람이 만든 ‘해안 사구 지형’
▶️ 동양 최대의 태안 해안국립공원 일부
▶️ 그리고 꽃지해변, 백사장항, 삼봉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해양 휴양 벨트'

과거에는 이 섬도 유배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치유 지다. 전쟁의 상흔과 피난민의 흔적이 깃든 이곳은, 어느새 ‘쉬어갈 수 있는 얼굴’을 닮아 있다.


4. 안면도 정보 요약

행정구역: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일원

면적: 약 113㎢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인구: 약 9,000명

교통: 서산 IC → 안면교(자동차 이용, 약 2시간 반 소요)

특징: 국내 최대 소나무 군락지, 해안사구 생태계, 사계절 꽃축제, 어촌체험마을

※ 대표 명소: 꽃지해변, 안면도자연휴양림, 백사장항, 두에기해수욕장, 영목항등이 있다.


5. Top 5: 다섯 개의 시점(視點)

✅ 꽃지해변 낙조
섬의 서쪽 끝, 할미·할아비 바위 사이로 붉게 녹아드는 태양. 낙조는 풍경이 아니라 경험이다.


✅ 안면도자연휴양림
고요한 소나무 숲길을 걷는 순간, 숨이 깊어진다. 나무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문.


안면도, 붉은 숨결로 쭉쭉 뻗은 소나무의 숲. 매끈하게 뻗은 안면송이 휴양객을 반기는 이 숲은, 조선 시대부터 국가가 직접 관리해 온 국내 유일의 소나무 천연림이다. 2001년, 제2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는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안면송은 일반 소나무와는 조금 다르다. 줄기는 붉은빛을 띠고, 키는 무려 14~16m에 달해 보통 소나무보다 3~4배나 더 크다. 현재 안면도 일대에는 약 430헥타르에 걸쳐, 80~120년 수령의 안면송 14만 1천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맑고 청량한 소나무의 숨결이 가득한 이 숲길에 들어서면, 마음은 어느새 산뜻해지고,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워진다.


✅ 백사장항 새벽 어시장
파도가 남긴 소식이 새벽 어판장에 펼쳐진다. 사람과 바다가 가장 가까워지는 시간.


새벽 4시 30분. 안면도의 바다는 아직 어둡지만, 백사장항 어시장에는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공기는 쌀쌀하지만, 그 안에는 밤새 바다가 들고 온 소식이 서서히 풀려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어부들이 배에서 고기를 옮긴다. 갈치, 멸치, 주꾸미, 광어… 한껏 젖은 그물 위엔 아직 생명의 온기가 남아 있다.


바다는 말이 없지만, 어시장은 파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이건 오늘 물 좋아. 살집 봐라.”
“대전에서 올라왔어요? 6시쯤엔 다 빠지니까 빨리 보셔야 해요.”

아낙네들의 손놀림이 분주하고, 중매상들은 눈빛 하나로 값을 묻고 깎는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고기 사고파는 시장이지만, 사실은 밤바다를 건넌 수고와 기다림, 사람과 바다 사이의 약속, 그리고 하루를 살아내는 리듬이 여기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어시장 지붕 위로 걸려오면,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누구는 육지로, 누구는 부둣가로, 그리고 누군가는 다음 물때를 기다리며 배로 돌아간다.

백사장항의 새벽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과 발에 흡수되어 하루를 움직이는 에너지로 녹아든다. 그때야 깨닫는다. 가장 먼저 깨어나는 바다는, 사실 가장 먼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곳이라는 걸.


✅ 해안사구 탐방로
모래가 바람을 품고, 바람이 풍경을 다시 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형의 마법.


안면도의 해안선은 단순한 경계선이 아니다. 그곳은 바람과 모래가 매일 조금씩 세상을 새로 그리는 화폭이다. 해안사구 탐방로에 들어서면, 먼저 발끝이 부드럽게 푹 꺼진다. 그것은 땅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잠시 자리한 풍경’ 위를 걷고 있다는 신호다.


모래는 누군가의 흔적을 남기기도 전에 지워버리고, 바람은 그 위에 또 다른 선을 그린다. 이곳의 모래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절과 날씨에 따라 능선처럼 쌓였다 흐트러졌다를 반복한다. 그래서 이곳은 늘 같지만, 매일 다르다.


사구는 바다의 호흡으로 만든 작은 사막, 바람의 시간으로 조각된 풍경 조각이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송림의 경계선이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바다가 쏟아지듯 나타나기도 한다. 이 리듬 없는 리듬 속에서 나는 자연의 계획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실감하게 된다.


어쩌면 이곳은 우리가 길이라 믿는 것조차 사실은 ‘임시의 길’이라는 걸 알려주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지나가면 그 위에 또 바람이 덮고, 그 흔적은 사라지되, 걸어간 마음만은 모래 안에 어딘가 남아 있게 되는 것.

안면도의 해안사구는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잠시의 시간을 품고 흘려보내는 곳이다.


✅ 영목항 해돋이
가장 조용하고 가장 단단한 새벽. 먼바다에서 터지는 햇빛이 이 섬의 하루를 연다.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새벽 다섯 시. 영목항에는 고요가 층층이 쌓여 있다. 배들은 멈춰 있고, 바다는 숨을 고르며, 사람들의 목소리조차 잠들어 있다.


이곳은 안면도의 하루가 가장 먼저 열리는 자리이자, 가장 마지막 고요가 굳건히 버티는 공간이다. 먼바다 수평선이 아주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면, 모래 위의 바람도, 고동 소리도, 갈매기 울음도 마치 약속한 듯, 그 타이밍에 맞춰 깨어난다.

그러다 갑자기 수평선 너머로 한 줄기 불빛이 터진다.

처음엔 가늘게, 그러다 점점 넓고 강하게 퍼지며 바다를 붉은빛으로 물들인다. 그 해는 뜨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뚫고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솟아오른다. 그 장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조용해진다. 누군가는 손을 모으고, 누군가는 그저 숨을 죽인 채 바라본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모두가 마음 한쪽에만 간직하려는 듯한 눈빛을 한다. 그 해가 수면 위로 완전히 오르면, 영목항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배들이 떠나고, 어민들이 모이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끌고 나온다.


그러나 단 한순간, 그 모든 움직임보다 먼저 이 섬을 깨운 것은 수면 위에서 터진 태양의 첫 숨이었다. 영목항의 해돋이는 말하듯 속삭인다.

“어제는 잠들었고, 오늘은 시작된다. 그러니 다시 걸어보라.”


6. 사유의 경계선

안면도는 관찰하는 섬이 아니라, 스며드는 섬이다. 느릿한 바다와 고요한 숲 사이에 서면, 나는 나의 중심에서 조금씩 비켜서게 된다.


안면도는 관계의 경계에 선다. 바다와 육지, 자연과 사람, 현재와 기억의 경계.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감정의 섬. 그래서 이 섬은, 조용한 성찰의 물결을 품고 있다.


7. Epilogue

안면도는 나에게 ‘쉼’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섬이었다.

스스로를 밀어붙이던 내게, 안면도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속도를 내려놓아도 돼."
"이곳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괜찮아."


나는 꽃지의 바다 앞에서 멈췄고,
송림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으며,
모래언덕 위에서 고요히 나를 들여다봤다.

그 모든 정지의 순간이,
가장 깊은 흐름이었다.


♡-Legend

《꽃지 해변의 저녁 불빛》-♡

-승언 장군과 미도 부인의 사랑 이야기


아주 오래전, 신라의 마지막 불꽃이 바다를 타고 퍼지던 시절. 서해 바다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작은 섬, 지금의 안면도에는 *승언(承彦)*이라는 장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단단했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눈을 가진 사내였다. 그의 아내 *미도(美道)*는 이름처럼 아름답고 고운 마음씨를 지닌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바다의 부부”라 불렀다. 해가 뜰 때 함께 걷고, 해가 질 때 함께 앉는 이들이었기에. 하지만 전쟁의 그림자는 사랑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승언 장군은 장보고 대사의 호출을 받고 급히 청해진으로 떠나야 했다. "며칠이면 돌아오리다." 그는 짧게 말했고, 미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갑옷 끈을 매주었다.


그러나 며칠은 몇 달이 되었고, 몇 달은 끝없는 바다로 이어졌다. 미도는 매일 해가 질 무렵, 꽃지해변의 젓개산 언덕에 올라 바다가 물드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은 해가 저무는 방향으로 고정되었고, 바람은 그녀의 고운 머리칼을 흔들며 그 기다림의 시간을 셌다.


바다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어느 날. 파도는 거칠고, 노을은 검붉게 떨어졌다. 미도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고, 그 후로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댔다. 그다음 날 아침, 그 자리에 할미바위가 하나가 솟았다고.


며칠 뒤 그 곁에 또 하나의 바위가 생겨났다. 할아비바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장군의 영혼이 돌아와 미도의 곁에 선 것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바다조차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어 바위로 맺어주었다고 했다.


지금도 꽃지해변의 노을은 깊다. 낙조가 두 바위 사이로 정확히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세상은 멈춘 듯 조용해진다. 그때 누군가 귀 기울이면, 바다 너머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기다렸소.”

“오래, 꽤 오래 기다렸소.”


여행에세이, 섬, 여행감성

― 《섬 thing Special》: 《'연결과 고립사이', 안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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