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거도, 꼬타리 꼬지여 있는 곳(可居島)
가거도, 시간의 끝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섬
바다의 지극한 변방에서 길어 올린, 느림의 철학
“세상의 끝자락, 조용히 박혀 있는 섬 하나.”
“지도의 한쪽 귀퉁이에,
콕 꼬지여 있는 가거도.”
“바다의 가장자리,
조용히 놓인 고요한 점 하나. 가거도.”
우리는 흔히 여행을 '어디론가 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가거도는 묻는다. 여행은 정말, 어디로 가는 일이 맞냐고.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 끝자락에 떨어진 조그마한 점, 가거도(可居島)는 ‘살 수 있는 섬’이라는 뜻을 가진, 대한민국 최서단의 섬이다. 서울에서 하루를 걸려 목포로, 거기서 또 흑산도를 경유해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렇게 해서 도착한 이 섬은 더 이상 '어디로 가는 길'이 아닌, '어디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가거도의 가장 큰 매력은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천천히 ‘증발’하는 느낌에 가깝다.
이곳은 해가 가장 늦게 진다. 대한민국에서, 하루가 가장 마지막으로 끝나는 섬. 저녁 8시가 넘어도 해는 아직 바다 위에 떠 있고, 그 잔광은 마치 내일을 망설이는 듯 섬을 붙든다.
나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파도에 두 번쯤 부딪힌 뒤 겨우 이 섬에 닿았다. 이 섬의 느림은 불편함이 아니었다. ‘급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묵직한 허락이었다.
가거도는 작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다.
중국의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릴만큼 중국 땅과 가깝다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의 섬으로 , 독실산(639m)은 섬치고는 이례적으로 높고 험준하다. 파도가 깎은 절벽, 군데군데 박힌 붉은 지붕, 그리고 그 위로 한 뼘씩 자라는 시간들.
이곳은 대지보다 바다가, 건축보다 지질과 기후가 말하는 섬이다. 흑산도에서 더 먼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유배지로 쓰였고, 역사적으로도 고립된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사람보다 바람, 교통보다 기억이 더 오래 머무는 곳이다.
행정구역: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
면적: 약 9.2㎢
해발고도: 보리산 639m
인구: 약 300명 내외
교통: 목포 → 흑산도(3시간 내외), 흑산도 → 가거도(1시간 내외, 선박편수 적음)
기후: 연중 바람 강함, 안개 빈번, 해양성 기후 특성
섬 중앙에는 해발 639m의 독실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그 주변은 기암절벽과 해식애로 이루어진 웅장한 산세와 절경을 자랑한다. 특히 서쪽 해안의 섬등반도는 반도 형태의 지형으로, 전체 해안선이 주상절리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섬등병풍 바위’라 불릴 정도로 장관을 이룬다. 이 일대는 암봉과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 그리고 붉게 물드는 낙조 풍경으로 유명하다.
‘가거도’라는 이름은 “가히 거할 만한 섬”이라는 뜻으로, 사람이 살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다른 설에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섬”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리적으로 가거도는 서해안의 어업 전진기지로 매우 중요하다. 이 섬 앞바다는 한·중·일 어선들이 교차하는 황금어장으로, 멸치·조기·갈치·다랑어·돔 등 다양한 어종이 연중 모여들어 낚시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가거도 등대 앞바다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바닷새 번식지 ‘국흘도(구굴도)’*가 있다. 이 무인도는 여름철새인 슴새와 뿔쇠오리가 둥지를 틀고 번식하는 곳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는 백여 종의 철새들이 이 섬에서 쉬거나 번식하며, 생태적 가치 또한 매우 높은 섬이다.
고도 639m.
섬의 척추이자 감각의 전환점이다.
올라가는 동안 섬의 구조와 내가 가진 관성이 함께 흔들린다.
섬의 서쪽 끝자락, 노을과 함께하는 풍경의 압권.
섬의 외로움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섬의 과거와 삶의 방식을 전하는 작은 전시 공간.
바다 민속과 고립의 기억이 조용히 담겨 있다.
아무 설명 없이 존재하는 바위 하나.
그 고요는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깊다.
가거도 어부들은 멸치를 잡으면서 다양한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는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로 1988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든 물에 한배
썬 물에 한배 매일 저녁 두 배씩 잡았구나.
지화자 좋네.
에헤 어헤 어허 어하오….”
***영상링크*** 멸치 잡이 노래
https://youtu.be/ARk2DYHBNQ4?si=Kma9Y7RtZ0xWwCx1
가거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 모두 느슨해진 상태에서만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철학적 지점이다.
풍경은 단순하다. 파도, 바위, 풀, 바람. 그러나 이 단순함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 빈틈에 사람이 스스로를 투사하고, 떠나기 전까지 자신을 되짚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거도는 관광지가 아니다.
*사색지(思索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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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위치한 외딴섬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유인도다. 총면적은 약 9.71 km², 해안선 길이는 22km에 이르며, 2021년 기준 343세대, 504명의 주민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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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은 목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45km, 뱃길로는 233km 떨어져 있으며, 도달까지는 쾌속선을 이용해도 약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이는 그만큼 가거도가 *국토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絶海孤島)'*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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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중심에는 신안군 최고봉인 *독실산(639m)*이 우뚝 솟아 있다. 이는 한라산과 성인봉에 이어 국내 섬 중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곳에선 맑은 날이면 제주도와 중국 산둥반도까지 보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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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는 1580년경 서 씨가 최초 입도했고, 이후 1800년 무렵 나주 임 씨가 본격적으로 정착하면서 섬의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사시대 유물인 돌도끼·패총 등이 발견된 바 있어,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사람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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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도에는 수많은 관광명소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독실산 정상, 황홀한 석양을 자랑하는 섬등반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늦게 해가 지는 항리 해안, 그리고 고요한 사색이 흐르는 가거도 등대와 하늘공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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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은 *후박나무(한약재로 사용됨)*의 최대 생산지이며, 흑염소, 뿔소라, 돔, 멸치, 돌미역, 해삼 등 특산물이 풍부하다. 특히 8~10월은 멸치잡이 철로, 이 시기의 가거도 멸치잡이 소리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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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생태적으로도 가거도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등대 앞바다에 위치한 무인도 국흘도는 천연기념물 지정 철새 번식지로, 바다제비, 섬개개비, 슴새 등 수많은 희귀 조류가 이곳에서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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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도는 기암절벽과 천연 동굴, 다양한 희귀 식물과 약초가 자생하는 해양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며, 특히 가거초 인근은 전국 최고의 낚시터로 손꼽힌다. 낚시꾼들에게는 ‘섬 전체가 포인트’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다양한 어종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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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을 둘러싸고 있는 가거도 방파제는 그 자체로 ‘해양 건설사’다. 1979년 착공해 무려 28년에 걸쳐 완공된 대공사였으며, 수차례의 태풍으로 반복된 피해에도 불구하고 완성되었다. 최근에는 슈퍼 방파제(높이 28m) 건설도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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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육지를 오가기가 너무도 험난해, 주민들은 이틀 낮밤을 돛단배로 이동하거나 안개가 끼면 일주일 이상을 바다에 정박해야 했다. 그러나 2000년부터 시작된 섬 주민 운임지원제도 덕분에, 현재는 단 5,000원으로 목포까지 오갈 수 있어 육지와의 연결성이 대폭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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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도는 그 이름 그대로, *가히 거할 만한 섬(可居島)*이었다. 혹독한 자연과 고립의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도 묵묵히 빛나는 자연의 힘이 이 섬을 '대한민국의 끝이자 시작'으로 만든다.
가거도는 나에게 ‘여행’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 섬이었다.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 한 겹씩 나를 덜어내는 일.
그 느린 해가 바다 끝에 걸려 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도 괜찮은 것’을 생각했다.
가장 멀리 간 끝에서,
나는 나에게 가장 가까워졌다.
아주 먼 옛날, 이 나라 서쪽 끝 바다에 이름 없는 작은 섬 하나가 떠 있었습니다. 이 섬의 파도는 거세고, 바람은 사나웠으며, 안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섬을 덮었습니다. 그래서 이 섬엔 사람이 살 수 없었습니다. 땅은 척박하고, 바다는 너무 깊고, 해는 너무 늦게 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곳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 여인이 섬등반도 절벽 끝에 올라 매일같이 저녁마다 등불 하나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물었죠. “이 거친 섬에 왜 등불을 켜는 거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다를 향해 등을 돌리고, 불빛을 하늘보다 더 오래 간직하려 애쓸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태풍이 섬을 삼킬 듯 몰아쳤습니다. 뱃길은 끊기고, 조업 나간 어부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날 가거도의 밤은 까맣고 조용했습니다.
그날 밤, 위태로운 섬등반도 위에 여인이 올라 밤새 등불 하나를 들고 온 밤, 바다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 빛을 보고, 바다를 헤매던 배들이 길을 찾았고, 한 척, 두 척… 모두 무사히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 날, 여인은 그들을 돕고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섬을 일러 “가히 머물 만한 곳, 가거도(可居島)”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 섬은 낯선 이도, 낚시꾼도, 철새도 기꺼이 머물다 가는 섬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낙조가 붉게 깔리는 날이면 섬등반도 절벽 끝에 누군가 등불을 켜는 모습을 봤다는 사람이 가끔씩 나타납니다. 그 등불은 바다의 길을 비추는 것도, 혹은, 마음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돌아갈 길’을 가르쳐주는 빛일지도 모른다는 전설과 함께...
여행에세이, 섬, 여행감성
― 《섬 thing Special》: 《'가장자리 섬', 가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