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바다 위에 남겨진 마음, 추자도(楸子島)
'“섬인데도 떠도는 것이고,
바다인데도 머무는 것이다.”
사람은 가끔,
지나간 감정이 흘러가는 곳을 그리워한다.
추자도는 그런 섬이다.
"바다의 경계에 선 섬."
"머물다 떠난 이들의 마음이 있는 곳.
추자도는 기억의 속도로 흘러간다.
바다 위 어딘가에 가만히 떠 있는 추자도.
배로는 빠르면 1시간 반,
그러나 도달한 순간, 시간은 멈춘다.
‘추자(楸子)’라는 이름은
늦가을 피는 추자나무에서 왔다고도,
예전 바다에 떠도는 이름 모를 꽃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하여 추자도는 ‘지나가면서 남는 섬’이다.
항상 거쳐 가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다.
✅ 상추자 – 추자항
섬의 중심이자 출발점.
배들이 정박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곳.
그러나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기억마저도 정박하는 장소.
✅ 하추자 – 진리마을
섬의 남쪽, 조용한 어촌마을.
바람은 낮게 불고, 바다는 말이 없다.
진리항을 거닐다 보면
지나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물에 비친다.
✅ 대서리 – 봉글레길
등대로 향하는 외길.
낮은 돌담과 마른 갈대,
그 길을 따라가면 등대 아래 당신만의 사연을 남기게 된다.
사람보다 더 오래 거기에 있었던 바람이
천천히 이야기를 지워간다.
✅ 추자 등대
한라를 바라보며 등불을 지키는 외로운 빛.
그 빛은 오가는 배가 아니라,
떠나지 못한 감정을 비춘다.
행정구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면적: 약 7.57㎢ (4개의 유인도와 수십 개의 무인도)
인구: 약 1,600명
교통: 완도항/제주항 → 추자항 (여객선 약 1.5~2시간)
특징: 바다 한복판 섬, 대규모 어장, 바다낚시 성지
대표 명소: 추자등대, 진리포구, 봉글레길, 해녀묘, 추자도길 11코스
추자도에서는 흔한 것들이 없다.
카페도, 번화한 상점도, 인파도.
그 대신,
낡은 방파제 위의 고양이,
낚시꾼이 던져 놓고 간 말 없는 의자,
굽은 길을 따라 선 폐가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껴안고 있다.
여기서 듣는 바닷소리는
지금의 파도가 아니라
몇 년 전, 누군가가 울다 간 파도처럼 들린다.
– 혀끝에 앉은 섬의 바람
“처음엔 짜다. 그런데 자꾸 생각난다.
결국, 밥보다 먼저 손이 간다.”
추자도의 젓갈은 그런 맛이다.
입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중독되는 맛.
추자 바다에 멸치 떼가 몰려드는 철이면,
섬 어귀마다 은빛 비늘이 바구니를 가득 채운다.
그 멸치들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갈 때,
섬사람들은 손 대신 시간을 섞는다.
소금은 단순히 짜기 위한 재료가 아니다.
시간을 붙잡고, 기억을 눌러 담는 도구다.
그렇게 몇 달.
햇살과 바람과 파도가 숙성의 친구가 되어
추자 멸치젓은 깊은 감칠맛으로 태어난다.
한 숟갈 떠서 따끈한 쌀밥 위에 올리면,
이건 반찬이 아니라 하나의 바다다.
비린내는 없다.
대신 입 안 가득 찬 묵직한 구수함과 투명한 짠맛.
혀끝에선 짠데, 목을 넘기면 달다.
마치 삶처럼.
젓갈은 말이 없다.
그저 숟가락 끝에서 천천히, 아주 조용히 섬의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 이건 누가 만들었어요?”
묻고 싶지만, 대답은 없다.
다만, 그 맛 속에 누군가의 손길과 날씨와 그 해의 바람이 배어 있을 뿐이다.
추자도의 젓갈은 사람을 붙잡는다.
여행을 마치고 육지에 돌아와도
자꾸 냉장고 속 그 작은 항아리를 열게 만든다.
그건 입맛 때문이 아니다.
섬에서 느꼈던 바람, 소금기, 그리고 ‘그 섬에 있었다’는 기억을 다시 입 안에 데워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흰쌀밥 위에 조심스레 젓갈 한 숟갈을 올린다. 그리고 그 위에, 한 모금의 추자도를 얹는다.
– 젓갈은 기억을 삭힌다
“밥상은 할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젓갈이 있었다.”
추자도의 부엌은 크지 않다.
해풍을 막기 위한 낮은 담장,
낡은 창틀 너머 햇살이 비치는 부엌 안.
그곳에선 늘 조용히 무언가가 삭고 있다.
추자도의 젓갈은 재료가 특별한 게 아니다.
바다가 특별한 것이다.
이곳 바다는 멸치가 몰려드는 자리다.
은빛이 흐드러지게 모이면, 할망들은 그날 잡은 멸치를 소금과 함께 바로 항아리에 넣는다.
거기엔 들깻잎을 겹쳐 넣는 집도 있고,
청양고추를 몇 알 살짝 띄우는 집도 있다.
어떤 비법도, 같은 맛이 되지 않는다.
그건 손맛이 아니라 기억의 맛이기 때문이다.
"할망, 이건 언제 먹어요?"
"초겨울에, 첫눈 내릴 때 뚜껑을 열어보자."
할망의 말엔 시간이 들어 있다.
날짜가 아니라, 기후와 냄새, 감각과 기다림이 약속이다.
항아리 속엔 바다의 소리도, 바람의 무게도 함께 들어 있다.
그 속에서 젓갈은 천천히 삭는다.
짜게, 깊게, 그리고 부드럽게.
할망은 그것을 매일 열어보지 않는다.
기다릴 줄 안다.
그건 음식이 아니라 사람을 품는 법이다.
하지만 밥이 사라지고 나서도
젓갈은 그 자리에 남는다.
그 짠맛에 밥을 더 떠오르게 되고,
그 향에 다시 섬을 떠올리게 되고,
그 유약한 촉감에 할망의 손등이 떠오른다.
“손으로도 말하지 않고,
맛으로 모든 걸 알려준 사람이었지.”
그건 사랑이었다.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아도 밥상으로 가득 전해지던 마음.
추자도에서는 지금도
작은 부엌에서 항아리들이 조용히 숨을 쉬고 있다.
할망의 딸이, 그 딸의 며느리가,
이젠 손녀가 그 손맛을 이어간다.
젓갈은 여전히 짜지만, 그 안의 시간은 부드럽다.
그건 사람의 시간이다.
“할망의 젓갈은 단지 발효된 음식이 아니라,
삭히고, 기다리고, 품어내는 ‘살아 있는 마음’이었다.”
추자도식 새우잡이 노동요
어야디야 차차차
그물 속에 별이 들었네
손끝에 달라붙은 새우
살살 풀어 담아라
할망은 염통으로 간을 보고
아지매는 항아리에 바람을 담네
어야디야 할망젓갈
짜도 좋고 달아도 좋다
추자 바다는
새우도 슬퍼서 울다 간다
추자도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나가도 괜찮아.
다들 그렇게, 머물렀다 간단다.”
나는 포구 옆 나무 벤치에 앉아
하늘과 바다 사이에 가만히 녹아들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오래 걸려 있던 마음 하나가
그곳에서 천천히 풀어졌다.
"추자도에서의 하루는,
지나간 하루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추자도에 떠도는 이야기
추자도에는 오래된 풍문이 하나 있다.
"그 섬은, 사람을 보내지 않는다."
처음 들었을 땐 웃었지만,
몇 날 며칠을 이곳에 머무르다 보면 그 말이 조금씩 진짜처럼 느껴진다.
해무가 낮게 깔린 날이면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그 사내가 섬에 나타난 것도 그런 날이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배가 뒤집혔다거나, 조난을 당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어느 날,
하추자 진리포구의 폐창고를 혼자 수리해서 들어가 살고 있었다.
사내는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그 흔한 막걸리 한 사발 나누지 않았고,
마을회관에도, 성당에도, 장터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매일 밤,
그는 낡은 나무배 하나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이상한 건,
그가 그물을 던지는 걸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낚싯대도 없고, 미끼도 없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배는 무겁게 돌아왔고,
사내는 그걸 그대로 창고 안에 들였다.
“아니, 그럼 대체 뭘 끌고 오는 거야?”
처음엔 사람들끼리 수군거렸지만,
점점 그 수군거림은 불안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한 해녀가 며칠째 바다에 나간 채 돌아오지 않던 날.
그녀의 물안경이사내의 폐창고 앞 돌계단에 놓여 있었다.
1 년 전, 낚시 도중 실종된 젊은이의 어머니는 그의 낡은 고무장화를 포구 맞은편 등대 바위 위에서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진흙 한 톨 묻지 않은 채.
심지어 15년 전, 바다에 빠져 실종된 뱃사람의 파이프가 그 폐창고 안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처음엔 모두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무겁게 말했다.
“그 사내는 그물을 바다에 던지는 게 아니야.
바다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거지.”
누군가는 그를
‘죽은 자의 물건을 대신 건져주는 이’라고 불렀고,
또 누군가는,
‘떠나지 못한 혼을 모으는 사내’라고도 했다.
그리고, 태풍이 예고되던 어느 밤. 그 사내는 마지막으로 배를 탔다. 바다엔 섬을 삼킬 듯한 파도가 일었고, 등대 불빛은 갈라져 보일 정도로 흔들렸다.
밤이 지나고, 폐창고는 무너져 있었다.
사내도, 배도, 그리고 그가 끌어올렸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창고 폐허 속에서 낡은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줄줄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 아무개, 1987년 6월 실종
김 아무개, 1992년 추락 사고
이 아무개, 2004년 실종…
그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돌아갈 수 없던 사람들을
바다에서 꺼낸 자.”
지금도 추자도에서는 큰 풍랑이 예고되는 날,
사람들이 포구 근처에 작은 바람막이 창고 모양 돌무더기를 쌓는 풍습이 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시작한 이도 없지만 모두 말없이 그렇게 한다.
혹시라도 떠내려간 무언가가,
아니, 누군가가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저, 그 사내가 여전히 어딘가에서 바다를 건너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조용한 두려움과 함께.
✧추자도에 가면 꼭 한 번, 진리포구 폐창고 자리에서 바다를 바라보세요.
그곳에선, 당신이 잊고 지낸 무언가가 다시 불려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여행에세이, 섬, 여행감성
― 《섬 thing Special》: 《길이 닿지 않는 섬, 추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