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해서 그래/ 세이브 포인트 앞에서

정답을 알면서도 우회하는 밤

by 이다연



난 원래
결정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다.

정답이 보이면 바로 선택하고,
선택했으면 그 결정을 존중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결정장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결정을 알면서도
자꾸 우회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정답은 분명한데,
길은 괜히 돌아가고,
결론은 자꾸 미뤄진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만두면 되는데,
그만두기가 쉽지 않아서다.


포기라기엔 아직 마음이 남아 있고,
유지라기엔 이미 너무 지쳐 있다.


그래서 나는 결정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결정을 미룬 상태로
그 자리에 머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첫 번째.

메일 하나를 보내면 끝나는 일이다.

내용도 다 썼고, 보낼 사람도 명확하다.

그런데 제목을 다시 읽고,
문장을 한 번 더 고치고,

“이 말이 너무 딱딱한가…”
“아니, 너무 부드러운가…”

하다가 임시 저장으로 남긴다.


그리고 메일은 보내지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나간다.

정답은 분명하다.

보내면 된다.

그런데 보내는 순간
이 일이 진짜 시작될 것 같아서
자꾸 미룬다.


두 번째.

일의 중심에서 내가 결정권자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이 안건은 내가 정리하면 끝이다.

그래서 의견을 다 듣고 나면
사람들이 나를 주시한다.


그 순간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검토해 볼게요.”

사실 검토는 이미 끝났다.


결론도 나 있다.

다만 결정하는 순간 그 결과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아서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된다.

정답을 피하기 위한 아주 정중한 우회다.


세 번째.

이제 생각이 정리되면 그만두면 되는 일이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나를 너무 소모시키고 있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막상 손을 놓으려 하면
이런 생각이 먼저 든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빠지면 누군가 곤란해질 텐데…’
‘조금만 더 버티면 나아질까…’

그래서 그만두지 않고 속도를 늦춘다.

결정을 하지 않는 대신 지친 상태로 계속 간다.


정답은 알고 있다.
그만두면 된다.

그런데 그만두는 순간
이 역할이 끝나버릴 것 같아서
자꾸 우회한다.


그래서 나는 결정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을 아는 채로 미루는 사람이 되었다.


그럴 때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이
거대한 게임이라면.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일하는
하나의 캐릭터라면.

레벨은 꽤 올랐지만 체력은 바닥.
퀘스트는 중반부인데 회복 아이템이 없다.


게임 속 캐릭터라면 이럴 때 이렇게 한다.

잠시 멈춘다.
세이브 포인트에 서서 장비를 점검하고
다음 선택을 준비한다.

아무도 그걸 패배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다르다.

잠시 멈추는 걸 무능으로 오해하고,
결정을 미루는 자신을 자기검열한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본다.

정답을 알면서 우회하는 이유는
결정을 못 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은 마음을
일에 써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잠시 놓는 건 회피가 아니라
회복일 수 있다.

결정하지 않는 시간도
다음 선택을 망치지 않기 위한
로딩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렇게 묻는다.

지금 필요한 건 결론일까,
아니면 잠깐
캐릭터를 세워두는 일일까.


정답은 조금 늦어도 된다.

캐릭터는
언제든 다시 움직일 수 있으니까.


고독해서 그래.

결정을 미루는 내가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나를 더 이상
소모시키지 않으려는 중이라는 생각이
오늘은
조금 현실적이고,
조금 위로가 된다.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1《고독해서 그래》: 《세이브 포인트 앞에서》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