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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thing special/강화도

3. 강화도(江華島) "강화도, 문이 되다."

by 이다연

강화도, 문이 되다

바다 위에 세운 역사, 저항과 개방의 섬

서해의 바람을 따라가다 보면
강처럼 잔잔하고, 바다처럼 깊은 물길 너머
한 나라의 역사가 뿌리내린 섬, **강화도(江華島)**가 나타난다.

섬이란 원래 고립된 땅이지만,
강화도는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맞서며 문을 지켜온 섬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문을 열어,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섬은 경계인가, 길인가?”

그 질문의 답은,

오늘도 해협 위를 건너는 햇살과 바람 속에 있다.

바다의 물결은 늘 닫혀 있으면서도, 항상 열린다.
섬은 그런 모순 위에 존재한다.
강화도는 그 오랜 세월,
침입자에게는 저항의 벽이었고
또한 어느 날, 문득 세계를 향한 출구가 되었다.


그 섬에선 총소리가 몇 번이나 울렸고,
서늘한 외교문서가 목판처럼 눌러 찍혔으며,
지금도 그 끝자락 전망대에선 바람이 북쪽을 향해 분다.

1. 강화도의 위치와 지리

"강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 한반도 경계의 섬"

강화도는 한반도의 서쪽, 인천광역시 북단에 위치한 섬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섬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언제나 육지와 바다를 잇는 통로였다.

행정구역: 인천광역시 강화군

면적: 약 302㎢ — 제주도 다음으로 큰 한국의 섬

위치: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약 45km

접경지역: 북쪽으로는 김포를 경계로 하고,
맑은 날이면 북한 황해도 연백평야가 눈앞에 펼쳐지는 분단의 전선.

2. 고려의 숨결, 강화

"섬으로 옮겨진 수도, 그리고 지켜낸 문화의 성채"


1232년, 몽골의 철기 군이 한반도를 압박하던 그때,
고려 왕실은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긴다.

바다로 둘러싸인 이 섬은, 단지 피난처가 아닌 나라의 운명을 지켜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섬은 곧 수도가 되었고,
그 안에서 왕은 통치했고, 백성은 버텼으며,
불교와 학문, 그리고 책과 기술은 그 위에 뿌리를 내렸다.


*고려궁지*


지금은 무너진 돌담과 빈 터뿐이지만,
그곳엔 6대 왕이 머물며 나라를 지켰던 흔적이 서려 있다.

시간은 흘러 성곽은 허물어졌지만,

고요한 나무들 사이로 숨죽인 역사의 기척이 들려온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몽골군의 칼날보다 더 강한 것은 믿음이었다.

고려는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팔만 개가 넘는 목판에 대장경을 새겨 불법의 힘으로 전란을 막고자 했다.

이 경전의 초판본이 바로 이 강화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목판은 나무였지만,

나라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성벽이었다.


고려 왕릉과 귀향의 땅

섬이 수도였던 그 시절, 왕들의 무덤도 강화도에 자리 잡았다.

특히 **홍릉(고종의 무덤)**은 섬의 중심에서
바다 너머 세상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일제 강점기 홍릉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왕족과 대신들의 유배지로도 활용되며, 강화는 권력과 추방, 영광과 회한이 뒤섞인 땅이 되었다.


강화도는 단지 역사의 배경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의지’였고,
바다 위에 세운 ‘문명’이었다.

그리고 그 숨결은,
지금도 바람을 타고 궁궐 터와 사찰의 처마 끝에서

조용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3. 문을 두드린 함포들

“섬은 문이었다. 그 문을 향해, 세계가 총구를 겨누었다.”

강화도의 바다는 한때, 총성으로 물들었다.
19세기 중반, 조선이 쇄국의 빗장을 굳게 걸고 있을 때,
먼바다를 건너온 함대들이 강화 앞바다에 정박했다.

섬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아니었다.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문’이 되었고,
그 문을 열기 위해 세계는 함포를 들이밀었다.


[병인양요](1866)

프랑스는 천주교 박해 사건을 구실로 군함 7척과 병력 600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했다.
외규장각이 불탔고,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되었다.
이때 강화를 지키던 정족산성의 승병들이 최후까지 싸웠다.

오늘날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의궤’는

바로 이때 반출된 것.

지금도 돌아오지 못한 책들이 바다 건너에 남아 있다.


[신미양요] (1871)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명분 삼아 강화도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광성보와 초지진, 그리고 덕진진에서 조선군과 미군이 정면 충돌했고, 500명이 넘는 조선 수비병이 전사하며 피로 물든 전장이 되었다.

-광성보에는 지금도 당시 전투를 기리는 충렬사와 순절비가 남아 있다.


[강화도 조약] (1876)

그리고 그 5년 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며
강화도 앞바다에 군함을 정박시켰다.
결국 조선은 강화도 조약이라는 이름 아래
문을 열고 말았다 — 그것은 굴욕의 개항이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세와 맺은 첫 근대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 시대의 시작이었다.
섬은 더 이상 ‘방어선’이 아니었다.
이제 그 섬은, 세계로 이어지는 굴절된 통로가 되었다.


바람은 아직, 묻고 있다

지금 강화의 해협에는 안개가 잦다.
그 안개 너머, 언제인지 모르게 꺼진 함선들의 연기가

떠도는 듯하다.
그 총성과 불꽃은 사라졌지만, 그날의 문 앞에서 벌어진 선택들은 아직 섬의 돌담에 남아 있다.

섬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당신이 언제든 문을 열고 마주하게 되는 ‘기억의 현장’이다.
그리고 강화도는, 그 문이 가장 먼저 열렸던 섬이다.





-----Legend

하늘의 돌을 쌓던 날
-마니산 참성단의 전설


아주 오래전, 하늘과 땅이 아직 가까웠던 시절,
한 사내가 백두산 깊은 숲을 나와
넓은 들과 강을 지나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단군왕검.
하늘의 뜻을 받아 세상을 다스릴 이었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터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마침내 강과 바다가 만나는 땅,
물결 잔잔한 섬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강화도,
그리고 마니산이었습니다.


그곳은 낮은 바람이 부드럽고,
하늘과 바다가 서로 닿을 듯 가까웠습니다.
단군은 그 자리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기로 마음먹습니다.
"이 나라가 하늘의 뜻 안에 머무르길."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산 정상에 돌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씩, 정성스럽게.
돌에는 기도가 깃들고,
그 위에는 별빛이 내려앉았습니다.

완성된 제단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고,
밤이 되면 그 돌들 사이로
별 하나씩 내려와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참성단(塹星壇)’,
— 별이 잠시 머무는 제단이라 불렀습니다.

그 후, 나라의 백성들은 해마다 그곳에 올라
해를 향해 소원을 빌고,
하늘에 감사의 마음을 올렸습니다.


지금도 매년 정월 초하루,
사람들은 어둠을 걷고 새벽을 오르는 마음으로
마니산을 오릅니다.

바람은 여전히 산등성이를 넘고,
돌은 말이 없지만
그 위에 서면 누구나 느낍니다.

"이곳은 하늘이 먼저 내려다본 자리.
그리고, 사람이 처음 하늘을 올려다본 자리."


에필로그

강화도는 늘 물과 바람 사이에 놓여 있다.

가장 먼저 닫히고, 가장 늦게 열리는 문이었으며

한 나라의 두려움과 용기를 동시에 품은 섬이었다.


침입자에게는 성벽이 되었고,

고통의 순간마다 스스로를 숨길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지나 강화도는 결국,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 섬의 흙과 돌, 바다와 하늘은
과거의 흔적을 묻어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흔적들을 품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곳이 되었다.


강화도는 역사를 막지 않았고,

그 흐름을 품은 채,
오늘도 바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터전이 되어 있다.

바다 건너 들려오는 목소리,
마니산 꼭대기에 퍼지는 아침 햇살,

성곽 아래 흔들리는 풀잎 하나까지—
모두가 말해준다.


이곳은 끝이 아닌, 시작의 언저리라고.

그래서 강화도는, 단지 하나의 섬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이고, 기다림이며,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열어야 할 또 하나의 문.

*‘섬 thing special’**한 공간입니다.


여행에세이, 섬, 여행감성

― 《섬 thing Special》: 《'문이 되다',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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