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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thing special/ 매물도

9. 매물도(每勿島)

by 이다연


“바다가 길을 열 때, 나는 그 위를 걷는다”


파도는 늘 닫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섬에선,
어느 순간 그 파도가 갈라지고 길이 생긴다.


바다가 허락한 그 짧은 시간, 나는 두 섬 사이를 걷는다. 매물도와 소매물도 사이,

물결 아래 숨어 있던 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바다 위에 발을 내딛는 기분은 마치 시간의 경계를 걷는 일처럼 아득하다.


이 길은 늘 열려 있지 않다.

물때를 맞추지 않으면 섬은 닫혀 있고, 발길은 미끄러지고, 기다림만이 남는다. 그래서 이 섬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열릴 때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어요.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이 섬에 닿을 수 있어요.”


그렇게 바다는 우리에게 잠시의 길을 내어주고, 다시 천천히 닫아간다. 닫히는 바다를 뒤로하고, 열린 기억을 품고 돌아오는 섬.

그것이 매물도였다.


2. 등대섬, 그리고 열리는 바닷길

– 바다가 스스로 열어주는 길 위에서

처음 이 섬을 찾았을 때,
안내 표지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물때를 반드시 확인하세요.
길이 열릴 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한 줄 문장은 마치 누군가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열려 있지 않고, 가까이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단 한순간, 바다가 스스로 문을 열어줄 때만 건너갈 수 있는 그 길.


등대섬 – 바다 위의 고요한 불빛


소매물도 끝자락에 자리한 등대섬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자 상징이다. 작은 섬 위에 덩그러니 세워진 등대,
그리고 그 등대로 이어지는 파도의 길. 등대섬에 닿는 길은 매일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이 빠지는 물때, 단 몇 시간 동안만 소매물도와 등대섬 사이에 바다 아래 숨겨졌던 길이 열린다.

그 길을 걷는 순간, 발아래는 여전히 바다이고, 옆에서는 파도가 조용히 속삭인다.


길이 잠시 허락되었을 뿐, 언제 다시 닫힐지 모른다는 긴장과 설렘. 그 사이를 걷는 감각은 마치 시간과 자연 사이를 건너는 듯한 느낌이다.

후박나무
순서대로 둥글레, 작약, 아이리스


3. 매물도의 풍경

– 바다를 따라 선이 흐르고, 바람을 따라 곡선이 흔들린다

매물도의 풍경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물결처럼 굽이진 해안선,
바다로 뚝 떨어지는 깎아지른 절벽,
능선 위로 흐르는 산책로와,
그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는 바람.


✅ 1. 절벽의 리듬

– 날 선 침묵과 굽은 선의 조화

매물도는 전체적으로 급경사 지형이다.

섬의 끝자락엔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형성돼 있으며, 그 아래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하루의 모든 생각을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 너머로 절벽이 이어지고, 그 아래는 푸른 수직이다.

절벽 위에 서면,
내 마음의 경계도 조금씩 무너지는 것만 같다.


✅ 2. 곡선의 산책길

– 소매물도 능선을 따라

소매물도의 등산로는 산이라기보단 바다 위 언덕길에 가깝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 한쪽은 절벽, 한쪽은 숲길. 중간중간 마주치는 해변 전망 포인트는 걸음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멈추게 한다.

특히 늦은 오후, 섬이 그림자를 길게 늘이면 모든 곡선이 황금빛 실루엣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물때를 잘 맞추어야 갈 수 있는 소매물도

✅ 3. 푸른 곡면 위에 놓인 마을들

섬에는 작은 마을들이 내려앉아 있다. 돌담, 낡은 지붕, 바다를 향한 창문들. 사람보다 바람이 더 많이 드나드는 공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집들 사이로 조용히 길이 이어지고, 그 끝에 바다 한 조각이 놓여 있다.


매물도는 거대한 풍경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고 정교한 곡선들,
바람과 물결이 만든 숨결 같은 선들이
이 섬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연의 선과, 마음의 곡선이 닮아 있다는 것을 배운다.

동백숲
날이 좋아야만 보이는 홍도 전망대


4. Editor’s Pick

한 줄의 고요를 위한 여행

소매물도의 바닷길은 늘 열려 있지 않다.


파도가 물러나고, 바다가 잠시 숨을 고를 때— 그제야 비로소 길이 드러난다.

물결 아래 감춰졌던 모래와 바위들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미는 그 시간.

나는 천천히 걷는다. 마치 바다의 비밀을 훔쳐보는 사람처럼.


매물도는 다녀오고 나서야, 그 고요함의 깊이를 알게 되는 섬이다. 섬은 아무 말이 없고, 등대는 오직 저녁에만 불을 켜며, 바다는 스스로의 리듬으로 열렸다 닫힌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우리는 익숙한 말 대신 오랫동안 머물던 생각 하나를 내려놓는다.


이 여행은 목적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고요 한 줄을 얻기 위해 떠난 길.

그리고 지금, 그 한 줄의 고요.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아주 천천히,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5. 매물도의 명소 Top 5

– 자연이 만든 감정의 포인트들

매물도에는 유명한 관광지도,
거대한 랜드마크도 없다.


하지만 그 대신, 한 걸음 머물게 만드는 순간의 장소들이 있다.


✅ 1. 소매물도 등대섬 바닷길

매물도를 대표하는 절대적인 명소

물때에 따라 드러나는 바닷길, 파도 위에 놓인 듯한 길

길이 열릴 때만 건너갈 수 있는 시간의 통로

“한 번은 꼭, 고요 속에서 이 길을 걸어보기를.”


✅ 2. 등대전망대

등대섬 정상에 위치한 등대

아래로 펼쳐진 짙푸른 남해,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선

날씨가 맑은 날엔 대한해협까지 보인다

“세상의 끝에 선 듯한 감각, 그리고 무한한 시선”


✅ 3. 소매물도 능선길

섬을 따라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의 등산로

해안선을 따라 바다와 숲을 번갈아 걷는 경로

곳곳에 숨은 쉼터와 전망대가 있어 ‘잠깐 멈춤’이 자연스럽다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 4. 장군바위 & 기암절벽 지대

소매물도 남쪽 해안에 위치한 바위군

파도에 깎여 생긴 조각 같은 암석들과 수직 절벽

바다 너머로 해가 질 때, 암벽의 선이 붉게 물든다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고요한 드라마”


✅ 5. 매물도 선착장 마을

섬의 관문이자 삶이 시작되는 곳

고깃배, 밧줄, 말린 생선, 그리고 바다를 향한 오래된 시선들

주민들과 눈을 맞추는 짧은 순간, 이 섬의 속도를 느낀다

“떠나는 순간에도 섬은 조용히 인사한다”


매물도의 명소는,
단지 볼거리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머무는 감정,
기억 속에 남는 풍경,
그리고 느리게 스며드는 고요이다.


6. 대항마을/당금 마을


1) 대항마을

위치: 대매물도 서남쪽 해안
특징

대매물도의 대표 선착장이 있는 곳

통영 여객선이 도착하는 매물도 관문

언덕진 해안선에 집들이 계단식으로 배치


바다를 향해 열린 창들이 인상적이며, 아침 햇살보다 석양이 더 아름다운 마을


포인트

대매물도 등산로 출발점 역할 (→ 당금 마을, 소매물도 방면)

항구 주변에 작은 식당, 민박, 매점 존재

통영 앞바다와 욕지도 방면으로 뻗은 바다 조망이 탁월


“섬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면,
그건 대항마을일 것이다.
뱃길이 닿는 곳,
여행의 첫 장면이 시작되는 자리.”


2) 당금 마을

위치: 대매물도 동북쪽 해안
특징

해가 가장 먼저 드는 마을, 조용하고 고즈넉함

등대섬이 보이는 방향으로 열린 열린 수평선

주거지보다 텅 빈 길, 넓은 하늘, 바닷소리가 인상적인 마을

예전에는 학교와 교회가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폐교 또는 폐가


포인트

소매물도 도보 진입 루트의 시작점

가끔 해녀분들의 물질 장면을 볼 수 있음

조용한 쉼터 분위기, 촬영·글쓰기·사색에 최적화된 분위기


“마을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사람보다 고요가 더 많이 사는 곳.
당금은 섬에서 가장 천천히 움직이는 마을이다.”

7. Epilogue

바다가 길을 닫을 때, 마음은 길을 열었다.


소매물도에 닿았을 때,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저 걷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지도, 꼭 어딘가에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바다가 길을 열었고, 나는 그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파도가 물러난 자리에, 세상이 펼쳐졌다. 길은 길 답지 않았다. 미끄럽고, 울퉁불퉁하지만, 바다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위를 걷는 순간만큼은 나는 아주 확실하게 어딘가에 도착한 사람이었다.


돌아오는 길,
바닷길은 다시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 앞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닫히는 바다가 내 마음의 문 하나를 천천히 열어주었음을.




♡-Legend/ 《매물도의 슬픈 등불》-♡


남해 끝 바닷섬, 매물도.

그곳에는 해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던 한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오랜 기다림 끝에 쌍둥이 오누이를 얻게 되었죠. 기쁨은 컸지만, 섬엔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풍문이 있었어요.

“남매 쌍둥이는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바다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


부부는 오랜 갈등 끝에 딸아이를 무인도에 남겨두고, 아들을 건너 섬에 보내기로 했어요. 그 바위섬엔 ‘애기바위’가 있었고, 거기에 바치면 한 명은 살 수 있다는 가혹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죠.

아버지는 무인도에 움막을 짓고, 딸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뒤 어느 날 밤 몰래 떠났습니다. 잠든 딸의 머리맡에 마른반찬과 작은 솥만 남긴 채로요.

세월이 흘러서 바다 건너 남겨진 오라비는 장성했고, 누이의 기억은 희미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맑은 가을날, 그는 먼 바위섬에서 연기를 보았습니다.


"저곳에도…
누군가가 살고 있구나."


보름달이 뜨는 날, 바다는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바람은 거셌고, 구름은 달을 가리고 있었지만, 호기심 가득한 청년은 바위섬을 향해 노를 저었지요. 드디어 뱃머리가 섬에 닿았고, 그가 섬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순간, 달빛이 구름을 뚫고 쏟아지며 서로의 얼굴을 밝혔습니다.


“누이야!”

“오라버니…?”


처녀가 내미는 청년의 손을 잡으려 하자, 하늘에서 천둥이 쪼개지고 벼락이 바다를 가르며 두 사람을 삼켜버렸습니다. 며칠 뒤, 어부들은 바위섬에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 듯한 두 개의 바위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조금 앞으로 기울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앞에서
영원히 닿지 못할 거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오누이바위’라 불렀고, 달이 가장 밝은 밤이면 바위 사이에 물안개가 피어올라 마치 누군가 다시 만나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그리웠을까?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바위는 아직도 서로를 향해 서 있다는 것입니다.”

여행에세이, 섬, 여행감성

― 《섬 thing Special》: 《'등대 섬', 매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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