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같은 첩자 체험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인상을 토대로 편하게 감상을 남겨보았습니다.
스포주의보: 아주 작은 스포일러도 원치 않는 분께서는 아래를 읽으시기 전에 작품을 먼저 감상하고 오시기를 권합니다. 아래 박스 안에 언급 범위를 명시하였습니다.
이 아래 몇 개 문단은,
1.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 대해,
시놉시스쯤 되는 정도, 작품 초반부의 내용을 언급합니다.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나 방향성에 대해 논합니다.
2. 드라마 <<슬로 호시스 시즌 1>>에 대해,
1화의 장면 두어 가지를 언급합니다.
3. 영화 <<킹스맨>>과 <<007 스카이폴>>에 대해,
주인공의 옷차림이나 영화 분위기를 언급합니다.
이번 글에 게시된 포스터 및 책표지의 사진 출처:
007 스카이폴,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슬로 호시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24년 말에 <<슬로 호시스>>라는 영국 드라마를 시청했다. 게리 올드만이 출연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는 거의 처음으로 스파이물에 장르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스파이를 주로 액션 영화 속에서 만나 왔다. 몇 년 전에는 화려한 스파이들이 나오는 <<킹스맨>>을 ott로 즐겁게 시청했었다. 또 내가 극장에서 가장 최근에 봤던 스파이 영화는 <<007 스카이폴>>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거기서도 일단 스파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스카이폴이 개봉한 2012년 이후로 나는 십 년이 넘도록 스파이가 나오는 영화를 극장가에서 만나보지 못했다. 혹은 보고서도 그 인물이 스파이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끔 만난 스파이들은 약간 직업이 아니라 스포츠 스타의 모습이었다. 게릴라에 능한 정예 군인 출신이 은퇴한 후에도 심장에 분비되던 호르몬을 그리워해,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로서 스파이 주인공 역할에 도전하게 된 느낌이 좀 있다. '스파이'나 '간첩'이라는 역할에 내가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인상에 부합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스파이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긴 했지만 영화 자체는 두 편 모두 재밌게 봤고 훌륭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서 '진정한' 스파이를 만나기 위해 몇 년 전 ott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라는 영화에 도전해 보기도 했는데, 틀어놓고 쿨쿨 잤다. 결국 스파이 나리를 만나뵙지 못했다. 농담삼아 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독자를 방심의 선잠 속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진정한 스파이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 작품의 원작은 이번 글에서 다룰 소설인 <<추운 나라에서>>의 작가가 썼다...)
그러다가 드디어 '진짜'라고 생각되는 스파이를 찾았다. 애플tv에 등록된 <<슬로 호시스>>라는 영국 드라마였는데 너무 재밌었다. 나는 일 주일도 넘기지 않고 네 개 시즌 총 24회 되는 분량의 드라마를 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보면서 '이게 진짜 스파이물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갖게 되었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평가하는 데 '진짜다' 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지만, 보면서 그런 상상을 절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스파이들에게 닥치는 시련은 그다지 영웅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양복을 차려입고 활보하는 제임스 본드나 킹스맨 요원들처럼 멋진 모습도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슬로 호시스>> 속 '추잡한' 주인공의 모습은 스파이에 대한 나의 악의적 상상에 그대로 맞장구를 치는 듯했다. 구멍난 양말을 신고 화면 너머로까지 냄새가 나는 듯한 복장으로 마치 '나 걸뱅이요' 외치듯 등장한 게리 올드만의 모습은 <<레옹>>의 노먼 스탠스필드, <<다크 나이트>>의 제임스 고든으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던 나를 신선한 충격에 빠뜨렸다. 1화인지에서 주인공이 쓰레기통을 사무실에 쏟아 놓은 채 고무장갑을 끼고 쓰레기를 뒤지는 '첩보' 장면에서, 나는 이 드라마에 반해 버렸다. 크고 작은 재미의 고저는 있었지만 나는 결론적으로 이 드라마를 보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그런 즐거운 경험의 연장선에서 찾게 된 소설이다. 주어진 임무에서 실패하고 본국으로 도망치듯 귀환한 주인공 스파이가 낭인 수준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점에서 나는 기대에 정확히 부합하는 소설을 찾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꼴사나운 실패가 진정한 스파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꼴사납게 실패한 스파이는 그 실패로써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나 진짜 스파이요' 하고 말을 건넨다. 직업적 실패를 다루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정말로 스파이였음을 그 실패 자체만으로 뒷받침하며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주인공이 실패하지 않았으면, 즉 그가 완벽한 스파이로 커리어를 흠없이 가꾸고 평화로운 노년을 맞이했다면, 그는 영영 그런 고백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성공담은 기밀에 부쳐졌을 것이다. 이 상황은 이야기로서 아주 매력적이다. 스파이에게는 성공적 고백과 성공적 성취가 공존할 수 없다는 매력적인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가도 영화감독도 스파이를 소재로 기꺼워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이 든다.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치는 것은 잘 만든 작품에서 으레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007 영화의 주인공이 '나 실패했소' 말하는 것과 이 작품 주인공이 '나는 실패했다' 말하는 것은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좀 거칠게 말해보면, 007 주인공의 실패했다는 말은 '나는 시련을 겪었노라'라는 다소 웅변적인 말로 바꿀 수 있고 '그러나 딛고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까지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다. 반면 이 작품 주인공의 말은 '이번에 일을 아주 조져 놔서 큰일이다', '계획에 빵꾸가 나버렸는데 어떻게 메꿔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007 주인공은 스파이다'라고 이를 때 스파이라는 말은 그의 양복을 치장하는 번쩍거리는 금속 명찰 같은 것이 되어서, 스파이라는 것이 숨겨져야 할 어떤 것조차 되지 않는다. 제임스 본드는 영웅적이고, 구둣발을 디디듯 좌절 위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고, 흘러내린 구두끈을 다시 묶듯 재기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실패를 매듭지은 뒤 몸을 일으킨 뒤에는 손을 털고 비장미를 향수처럼 뿌려 쓴다. 그러나 <<추운 나라에서>>의 주인공 앨릭 리머스는 무엇보다도 직업적으로 실패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파이도 인간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이 소설의 세계관이 우리 현실과 인접해 있다는 실감을 갖게 한다.
그는 초인적 수준의 활약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는 인물이 아니다. 본국에서 그를 기다리던 상사를 만나서도 독일에서의 실패에 변명의 말을 주워섬기지 않는다. 실패에 대한 징계처분을 잠자코 기다릴 뿐이다. 그런데 그의 상사인 감독관은 실패에 대한 해명도 반성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그의 실패를 첩보의 기회로 활용할 참이다. 그들은 한 번의 실패 때문에 그간 쌓아온 눈부신 성공의 영광이 몰수된 인간으로 앨릭 리머스를 정의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는 정보국 요원직을 내려놓고 반강제로 은퇴한다. 정보국에서는 모두들 그의 불명예스러운 말로에 대해 수군거리고, 그가 정보국 돈을 착복했다는 소문까지 더해져, 그는 실패의 대가로 명예까지 빼앗긴 남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술을 마구 퍼마시고, 사람을 때려 감옥에 가기도 하는 등, 그는 정말로 그런 인간이 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실패를 껴안고 뒹굴며 적국 스파이의 이목을 끈다. 조국을 증오해 배신을 결심한 척 자연스럽게 적과 접선하겠다는 것이 그와 그의 상사가 수립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전략은 상사인 감독관의 다음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전향자가 아닐세. 무엇보다도 그들은 <<추론>>하기를 원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153쪽.)
적들이 그의 배신 행위를 믿을 수 있는 것도 그가 '배신할 만한 이유가 있는 인간'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침투해서 차근차근 목표물의 심장부 쪽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인 국제정치의 이면 속으로 들어가보는 혈관 내시경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치밀하게 짜인 추리 소설을 읽을 때와 유사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스포주의보: 이 아래 문단부터 스포일러가 좀 더 강해집니다.
이 아래 몇 개 문단은,
1.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 대해,
작품 속 인물의 행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논합니다.
중반부를 넘어서까지 작품 내용을 논합니다. 단, 최후반부(결말)만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한 스파이의 행적을 그럴 듯하게 보여 주어 독자에게 그것을 생생하게 따라가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심오한 소설이 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이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았겠는가 생각해본다.) 리즈라는 인물이 거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자 된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앨릭 리머스와 같은 방향의 관점을 공유하며 소설을 바라보지만, 그의 연인인 리즈라는 또 하나의 렌즈를 통해 이 소설을 다각도로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리즈는 약간 순진한 성격에다가 착한 심성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정보국에서 해고당한 뒤 자신이 근무하는 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은 리머스와 사랑에 빠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기존의 삶에서 이탈해, 새로운 세계, 스파이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순박한 리즈가 견지하고 있는 상식적 입장, 새로이 밝혀지는 세상의 물밑에 대한 생경함이 소설의 한 주제의식을 이룬다. 리즈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말수가 적고, 말을 할 때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냉소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늘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 비밀스러운 사람이다. 리즈에게 그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리머스가 첩보원이라는 사실을 리즈가 깨닫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리즈는 스파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파이들이 활동하는 음지의 세계에 전제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릇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그런 대상에 대한 몰이해가 독자의 입장에서 읽힐 때, 그녀의 몰이해는, 사려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이 세계가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라고 파악되기 시작한다.
리즈가 작품의 무대와 부딪혀 만들어내는 이 마찰음 덕분에 소설의 재미와 의미는 배가된다. 긴장감 있게 첩보 과정을 따라갈 때 독자는 앨릭 리머스의 관점을 따라가지만, 독자가 실생활에서 견지하는 일상적 태도와 공명하는 인물상은 리즈다. 이 이중의 관점을 통해 소설의 세계가 입체감을 얻는다.
나는 이 소설이 현실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도 참신성을 느꼈다.
소설과 현실의 관계는, 소설이 세상의 전부를 담을 수 없다는 한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은 이 세계에서 몇가지 세간살이를 빌려올 수는 있겠으나, 결국은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새살림에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곳을 찾아가는 손님에 비유될 수가 있겠다. 그것이 한계이자 본질적 특징인바, 그것을 소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따라서 소설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전에 없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고안한 소설은,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새로운 사조를 개척하는 빌미가 된다고도 할 만하다. 예컨대 낭만주의나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들 또한, 그 주의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담아내고 담아내지 않는지(못하는지)를 보고서 구분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느꼈을 현장감과 리즈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들어오는 부조리한 세상의 모습 같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이 소설은 사실주의적 방식으로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사실주의적 방식이 첩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진행됨으로써, 여느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채로운 소설적 경험이 제공된다.
이 리얼한 첩보소설 속에서, 현실은 그 자체가 첩보 활동의 표적이 되어, 거대한 적대국처럼 다뤄진다. 현실은 모방의 대상이 되길 넘어서서 침투의 대상으로 다뤄진다. '해고당한 직장인의 전락이 실은 간첩질을 위한 예비단계였다'라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독자에게 설득력 있는 필치로 수용되는 순간, 독자는 이 소설뿐아니라 우리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 또한 그 이면에 생각지도 못한 계획을 숨기고 있다는 상상을 해볼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은 권모술수의 더러움과 암약의 비열함이 우리 세계의 증상임을 폭로하는, 사실주의의 일반적인 기대 효과와는 별개로 얻게 되는 상상이다. 더러운 권모술수와 비열한 암약이 소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도 있을 수가 있겠다는 상상을 더얹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 소설 속으로 집들이를 해서 보는 것은, 끓고 있는 국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탕솥 옆쪽에 걸려 있는 자라다. 등껍질을 이고 부엌 한쪽에 걸려 버둥거리는 자라를 보고 놀란 독자들은, 책을 덮고 귀가한 뒤에는 자기 집 부엌에 걸린 솥뚜껑을 오래도록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희열은, 단순히 자라와 솥뚜껑이 닮았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 걸려 있는 것도 실은 자라의 등껍질이 아닐까 하는 묘한 의심에서 온다.
이 소설 속 스파이는 동시에 두 곳으로 침투한다. 소설 속에서 적국으로 침투하는 동시에, 소설 속에서 소설 밖 독자의 세계로 침투한다. 킹스맨은 영화 <<킹스맨>> 속에서만 활약한다. 제임스 본드가 날린 총탄도 제임스 본드가 노는 세상 밖을 넘어가지 못한다. 우리의 현실 인식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인식의 방벽을 뚫는 한 수단으로 리얼함의 힘을 빌려 국경을 넘어왔다. 넘어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소설을 세계에 '도킹'시켰다. 우리가 음모론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즐거움, 지적 희열과도 흡사한 기묘한 음모론적 즐거움을 소설로 재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사실주의에 기반하면서 '사실'에 대한 혁신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까지 성공한 멋진 작품이 아닐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