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체감되지 않을까
출산율 0.7명.
세계 꼴찌다.
정부는 매번 긴급대책이라며 온갖 지원책을 쏟아낸다.
200만 원 바우처, 10만 원 아동수당, 신혼부부 특별공급….
겉보기에는 푸짐하다.
하지만 이건 아이 낳을 세대를 향한
진짜 대책이 아니라 쇼윈도 장식품에 불과하다.
현실을 모르는 정책은,
당사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정작 부모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
집, 돌봄, 일자리.
이 세 가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리 수당을 퍼부어도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200만 원은 산후조리원 한 달 비용에도 못 미친다.
10만 원 아동수당은 기저귀와 분유에 끝난다.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을 외치지만,
대기 줄만 늘어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돈을 쥐여주며 “이제 낳아라”라고 말하는 건,
마치 흉가에 꽃 장식만 해놓고 들어가 살라 강요하는 것과 같다.
외형은 번듯하지만,
안은 썩어 있다.
보통의 20‧30대는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나조차도 그랬다.
그러나 부모보다 나아질 수 없는 첫 세대가 되었다.
집값은 하늘로 치솟고, 물가는 부모 세대의 몇 배로 뛰었다.
자신의 삶도 버거운데,
어떻게 아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욕망조차 달라졌다.
여행, 취미, 반려동물, 자기계발….
자유롭고 책임 없는 삶이 출산보다 더 가치 있어 보인다.
본능보다 두려움과 체념이 앞서는 사회가 된 것이다.
출산정책은 돈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의 신뢰 문제다.
부모가 안심할 수 있는 주거는 보장되지 않고,
아이를 맡길 국공립은 턱없이 부족하고,
육아휴직은 권리가 아닌 눈치가 되어버렸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현금을 던지는 건 대책이 아니라 눈 가리고 아웅이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버텨온 게 기적이다.
한국의 출산정책은 ‘생색내기 퍼주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청년들이 원하는 건 시혜가 아니라 존재 가능한 삶의 조건이다.
아이를 낳을 자유조차 빼앗아 놓고,
매달 몇 만 원 쥐여주는 걸 대책이라 부른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의 무책임이다.
출산정책은 지금처럼 쇼윈도에 걸린 장식이 아니라,
아이와 부모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토대를 세우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