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을 바꾸겠다면 먼저 신뢰부터.
우리는 1987년의 그릇으로 2025년을 살고 있다.
데이터가 권력이 되고, 알고리즘이 판단을 대신하고,
기후가 일상을 흔든다.
개헌의 필요성 자체는 분명하다.
환경권을 현실화하고,
디지털 권리를 기본권 층위로 끌어올리고,
중앙·지방의 권한도 시대에 맞게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까진 논쟁이 아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개헌은 제도 미세 조정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일이다.
누가 설계 테이블을 점하느냐에 따라
향후 수십 년의 권력 지형이 결정된다.
그래서 정치는 개헌을 “개혁의 도구”보다
정치의 무기로 다루고 싶어 한다.
의제만 띄워도 전국이 시끄러워지고,
그 혼란 속에서 판을 새로 짜고 쥐고 흔들 유인이 생긴다.
지금의 개헌 담론이 불편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개헌을 테이블에 올리는 순간,
모든 이슈가 빨려 들어간다.
민생 어젠다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갈등이 갈등을 먹는다.
“찬반”으로 정렬되는 판에서
설명은 사라지고 선동이 남는다.
개헌은 합의의 엔진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분열의 증폭기로 움직일 위험이 크다.
정치가 얻는 건 프레임,
국민이 잃는 건 시간과 신뢰다.
권력구조를 한 번에 갈아엎겠다는 욕심은 부작용을 키운다.
우리가 먼저 손댈 수 있는,
그리고 합의가 가능한 영역부터 가자.
기본권의 현대화: 데이터 자기결정, 자동화 의사결정의 설명 요구, 이동권·삭제권 같은 디지털 권리.
환경·세대 정의: ‘원칙’이 아니라 책임과 이행이 보이는 조항으로.
긴급권·계엄 통제: 발동 요건을 좁히고 사후 통제를 헌법에 못 박아 리스크를 줄이자.
지방분권·재정 원칙: 중앙-지방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재정 자율을 제도화하자.
이건 원포인트로도 가능하다.
권력구조처럼 진영의 유불리가 크게 갈리는 의제는
트랙을 분리해 천천히, 길게 논의하자.
개헌은 ‘무엇’만큼 ‘어떻게’가 중요하다.
절차가 신뢰다.
시민 숙의: 무작위 추출 시민의회(100~150인)와 전문가위원회를 병렬로 둔다. 최소 6~9개월.
다중 초안 경쟁: 국회특위는 1안이 아니라 2~3개 초안을 병렬 심사하고, 공개 병합한다.
영향평가의 의무화: 권력구조 변화가 교착·예산·정책 연속성에 미치는 효과를 시뮬레이션해 공개한다.
이해충돌 최소화: 현직 권력의 직접 설계 개입을 제한하고, 심판(중재)은 독립기구가 맡는다.
공개 검증 시간: 국회 의결 전 최소 90일의 공청·토론 기간을 보장한다.
국민투표 설명서: 찬반 양측의 공식 논거·부작용·비용을 동일 지면·동일 예산으로 배포한다.
절차가 투명하면 결과가 설득력을 얻고,
설득력이 쌓여야 국민투표가 합의의 장이 된다.
0단계(즉시): 개헌을 정쟁 카드가 아니라 국가 과제로 선언. 민생 패키지와 병행.
1단계(6~9개월): 시민의회+전문가위가 기본권·긴급권·환경 챕터를 먼저 숙성.
2단계(6개월): 국회특위가 다중 초안 공개 병합.
3단계(3개월): 전국 토론·TV 공개 청문·공식 설명서 배포.
4단계: 국민투표(1차). 권력구조는 차기 국회에서 트랙2로 장기 심층 논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신뢰의 순서다.
신뢰 없이 바꾼 룰은 다음 정권에서 다시 흔들린다.
헌법은 정권의 매뉴얼이 아니라 시민의 계약서다.
개헌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방식으로는 위험하다.
우리는 ‘누가 이기느냐’보다
‘어떻게 합의하느냐’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
판을 흔드는 개헌이 아니라 신뢰를 복원하는 개헌.
그게 1987년 이후,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보여줄 최소한의 성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