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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pr 06. 2023

어렵기만 한 '호칭'과 '존칭'

글로벌 다양성 이해 (문화 차이, 제21화)

위상과 예우 

호칭과 존칭 



위상과 예우 

‘예’는 모두가 지키고 존중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조선시대 예법은 ‘서열의식’으로 복잡다단했다. “예'는 인간의 도리로서 위계질서를 아울렀기에, 계층 간의 서열, 즉 임금과 부모, 친척, 친구, 상하 간의 질서에 이어, ‘나이’라는 ‘장유유서’(長幼有序)까지 개입되었다. 덕분에 굳이, 복잡한 호칭이나, 서열, 형식, 질서 등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나이’와 ‘위상’에 대한 ‘예우’를 의미하였기에, 적절한 ‘호칭’의 사용은 매우 복잡한 대인 관계의 해법을 해결해 주는 방안이었다. 

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사진출처:가톨릭뉴스)

필자의 고향은 매우 보수적인 마을이었다. 면 소재지의 초등학교에는 '급사'일을 하는 노인이 한 분 계셨는데, 주변 어른들은 그를 “고지기 (창고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라 부르며 하대하였다. 그런데, 그 '고지기'의 아들이 6.25 전쟁이전에 해군에 자원 입대하였고, 세월이 지나 해군에서 분리된 해병대에서 장군이 되었다. 그 당시에만 해도 군대가 “백(둿 배경)'이 통하던 시절이라, 친척 아저씨께서 마침 해병대에 입대한 늦둥이 아들을 위해 큰 마음먹고 고향출신인 그 장군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아저씨는 그 장군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되셨다. 원래라면, '고지기'아들도 '고지기'이니 그냥,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고직아, 이리 오너라”하고 부르면 되는데..., 상대가 장군이고, 부탁하러 온 처지이니 이게, 영 그럴 수가 없어서, 생각도 못해, “고지기 아드님, 계십니까?”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그 장군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에도 “아이고, 어르신 어떻게 예까지 오셨습니까?”하며 달려 나와 환대를 하며, “제발, 말씀 좀 낮추시라”라고 하였다 하는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그때만 그랬을까?   


호칭과 존칭

조선시대의 양반과 상놈에 대한 신분차이가 해소된 지금도, 호칭문제가 틀어지면 원수보다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가 십상이다. 누군가에게 기대했던 호칭을 듣지 못하거나 이유 없이 ‘하대’라도 당하면 목숨까지 담보하여, ‘무시’와 ‘반말’을 듣는 이유를 따져야 했다. 우리 사회의 호칭과 존칭어는 상하 관계의 설정 기준이다. 나의 위상에 대한 상대의  접근 ‘태도’를 가늠한다. 이게 뒤틀리면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감정싸움으로 귀착되고... 즉, 문제의 ‘본질’보다 호칭이 우선하는 것으로, ‘내’ 주관이 앞서므로 문제 해결은 둿전이 된다. 노사협상이나 각종 개인 간 협상에서 우리는 ‘해법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감정 문제’로 얼마나 많이 실패하는지? 


나이와 연륜이 지혜와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배운 방법은 새로운 세상에서 무효하고, 익숙한 관행은 누군가에게 불편하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얽히면, 더욱 무례하고 뻔뻔해져 인간관계 예의는 실종되기 일쑤다. 그런데도, ‘예’를 들먹이며 억지로 대접받으려는 사람도 있고, 당연히 해 줘야 하는데도 안 해 주려 버티는 사람도 많다. 얼마 전까지 지하철 안에서 이런 류의 싸움이 잦았다. 공중 생활에서 '예의'가 피곤해졌다. 

호칭, 반말 등으로 괜한 감정싸움(출처: 뉴스1)

우리의 호칭은 쉽지 않다. 서구인은 조금 친하면 나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이름 (first name)”을 부르거나, '어떻게 불러줄까?'라고 물어 오지만, 한국에서는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나, 친척, 학교 동창들 이외에 이름조차 불러 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부모가 지어준 좋은 이름을, 겨우 공적업무 신원 확인용으로나 쓰지, 아는 사람들끼리도 함부로 이름을 올리길 꺼려한다. 만약, 누군가를 ‘000 씨’라고 부른다면, 000이 자신을 부른 상대보다 높다거나 나이가 많다고 생각할 경우 이를 매우 불쾌해한다. 심지어, '000 씨'를 '하대'의 의미로 생각한다. 때문에, 별로 친하지 않은 상대를 칭할 때 막연히 ‘누구 엄마’, ‘00 부장님’이라 부르든지 애매하게, ‘고객님’, ‘환자분’ 등 역할과 직위로만 부른다. 


아름다운(?) 선, 후배 사이가 될까?(출처:서울시립대신문)

우리 사회도 개방되고 서로를 존중하는 수평적인 사회로 재편되고 있으니, 차제에, 부모가 지어준 좋은 이름을 자주 불러주면 어떨까? 이 경우,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이 고민스럽겠지만, 직급이나 직책 등 자신의 위상을 내세우기보다, 그냥 사회적 약속으로 모두가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이면 어떨지? 노인이 젊은이에게나, 선생님이 어린 학생에게 “000님!”하고… 부르며, 서로가 존중하면 반말로 ‘갑질’식으로 막 대할 일도 없을 거다.


또, 선, 후배사이라면, 후배를 부를 때도, “야! 000” 하고 막 대하기보다, 차라리 “후배님”이라고 정겹게 부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린이로부터 나이 칠십이 넘어서도 전에 졸업한 학교의 기수에 따라 평생 선, 후배 딱지가 따라다니는 제도는 좀 그렇다. 그런 영향일까? 어린 나이에는 모두들 나이에 민감하였고, 한 살이라도 더 많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1살이니... 정부가 2023년 6월 말부터 생일을 기준으로 '만 나이'로 공식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껏 같은 반에서 같은 또래로 지내왔는데, 생일이 며칠 늦다해서 느닷없이 '동생'으로 전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경우는, 연도를 기준한다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이런 게 왜 필요한지?" 부터 고민해야 한다. 가뜩이나 이것, 저것 신경 쓸 일 많은데 서로가 괜한 존칭어나 호칭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으면 한다. 패러다임만 바꾸면, 세대 간, 계층 간 소통이 더 잘 될 것인데… 


훈련을 준비하는 카투사 병사(출처:이데일리)

그리고, 존칭이라고 다를까? 아버지를 칭하는 단어만 해도 열가지가 넘는다. 아빠, 아버지, 아버님, 아범, 아비, 집의 어른, 어르신네, 가친, 엄친, 선친, 존당, 춘부장 등등... 모두 뜻과 상황별로 부르는 단어가 다르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대상을 매번 상대에 따라 구별하여 상황별로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게 '예'의 기준이었으니.., 조선 시대 식자층의 존칭과 호칭은 '동방예의지국'답게 매우 복잡다단했다. 그리고, 그 잔재가 아직도 일부나마 남아있다.


그런데, 아무리 장유유서라고 하지만, 나이가 많다고, 상급자라고,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것이 통할까? 서열의식이 생활화된 군대에서는 아랫사람에 대한 반말 문화가 상존한다. 그렇지만, 요즘 미군부대 카투사 병사들을 보면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병 상호 간에 존대가 일상적이다. 위에서 강조한 것도 아닌데 자기들끼리 그러는 것이다.  수년 전, 집 아이가 카투사로 복무할 때, 휴일 날 집에 와서 밥을 먹다가도 선임병의 전화가 오면 가족들 앞에서도 각을 잡고 ‘다'나'까’를 외쳤다. 선임병과는 동갑내기이었는데… 이게, 좋은 모습일까? 군에서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한 이유 중의 하나로 개인적 모멸감이니, 서로를 존중하지않는 서열의식의 군기잡기에는 ‘사고의 개연성’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 자칫, 친한 친구사이라도 반말을 쓰다 보면 화가 날 경우 욕설로 이어지거나 자칫, 우발 범죄로 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 평소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면, 비록 화가 나더라도 기껏해야 반말 정도로 최악은 피할 수 있지않을까?


이에 비해, 어떤 이들은 존댓말을 쓰면 ‘거리감이 느껴진다’며, 친밀함의 표시로 반말을 쓴다고 그런다. 실제로, 이웃 일본에서는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사이 등 가까운 친척 간에는 존대말이 없다고 한다. 나이의 차이가 있을뿐, 누구보다 가까운 혈족이니 무슨 예의가 필요할까? 하지만, 존칭은 ‘보여주는 예의’이니, 그 가치를 무시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다툼의 주 원인이 초칭과 존칭이라면,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비효율을 지속하기 보다 이제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지나치게 세분화한 호칭과 존칭을 단순화할 때가 되었다. 예컨대, 미국 사회의 존칭은 'Sir!'외 다른 게 없다.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가 있을까? 우리도 호칭과 존칭을 간결하게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국민적 공감대만 형성되면 쉽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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