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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pr 26. 2023

아시아 각국의 무슬림 대응

글로벌 다양성 이해 (이해와 어울림, 제5화)

무슬림이 전혀 없었던 일본의 경계심 - '지하드'의 일부인 결혼?

중국 내에 있는 무슬림의 교화 - ‘중국식 이슬람교’ 

기타 국가의 사례



무슬림이 전혀 없었던 일본의 경계심 - '지하드'의 일부인 결혼?

서구의 이슬람 난민정책과 비교하여, 일본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는 어땠을까? 이웃 일본은 우리와 사뭇 다른 관점을 가진 듯하다. 일본은 경제대국이나, 고령화 문제나 저출산, 환율 등으로 지난 30여 년간 깊은 경기 침체를 겪어 왔다. 저들이라고 노동력이 있는 젊고 유능한 이민을 받아들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왜 몰랐겠는가? 그런데, 일본은 전 세계 정치적, 인도적 난민들이 매우 선호하는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답게 일정 비율만큼 이들을 받아야 하지만, 의외로 일본의 무슬림 난민 비율이 매우 낮다. 


최근, 많은 무슬림이 경제적 목적으로 국경을 왕래하는데, 이 중 많은 근로자는 기혼자이다. 하지만, 이슬람이 일부다처체를 허용하므로 남성우위에 살아온 기혼자는 마음이 끌리는 현지 여인과 결혼하는 전술을 당연시한다. 이주 등 현지적응을 위해 체류하는 나라의 혼인제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칫 '지하드'와 관련될 수 있다. '지하드'의 일종인 결혼은, 자신들이 강할 때는 포로로 잡은 여인을 성노예 등으로, 자신들이 약할 때는 무슬림 남성이 현지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와 부인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는 방식이었다.


돈 목적의 파파라치가 쫓은 '다이애나'비의 생전 모습(출처: 스포츠 서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36세의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새 애인인 이집트 억만장자 ‘도디 알 파에드’(무슬림)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뒤쫓아오던 파파라치를 따돌리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사망 며칠 전, 영국 신문은 '다이애나'비의 '키스 신'으로 도배를 하였다. 당시, 영국 왕실의 비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였는데...


아무튼, 무슬림은 현지 여인과 결혼에 매우 적극적이지만, 역설적으로 무슬림은 자기네 여성을 거의 해외로 내보내지 않는다.


1990년대 일본에 취업비자로 와서, 불법체류하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근로자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여성과 결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현지인과의 결혼은 체류 연장 수단이었다. 그러면서, 이들 중 일부가 이슬람 극단주의를 전파하고 각종 범죄를 저질렀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의도를 간파한 일본은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이민 억제정책을 펼쳤다. 그들의 종교적, 문화적 ‘비화합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일본화’가 안 된 무슬림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이다. 


일본은 '선교사의 무덤'이라는 자조적인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타 종교 수용에 보수적이다. 선교에 주력하는 기독교가 지난 200여 년 동안 선교에 노력하였어도 여전히 지지부진하듯이, 현재, 1억 3천여만 명에 달하는 일본의 인구에 비해 일본 내 무슬림 인구는 고작 10만 정도로 전체 인구의 약 0.1%에도 미치지 못한다. 5천여만 명 인구에 무슬림 인구가 20만에 육박하는 우리에게 일본의 대무슬림 정책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중국 내에 있는 무슬림의 교화 - ‘중국식 이슬람교’ 

일본과 달리, 신장 등 일부 지역에 많은 무슬림이 기거하고 있는 중국의 대책은, 무슬림이 전혀 없던 일본의 대책과 달랐다. 게다가, 무신론자인 공산주의 중국은 무슬림에 대해 경계는 물론, 강경, 온건 병용 정책을 구사하였다. 강경정책은 온건정책을 취하는 동안 표면화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온건정책은 당국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을만한 상황에서 경제 발전 도모용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시진핑 정부는 이슬람교에 대해 기존의 온건노선을 버리고 강경노선으로 전환하여, 아랍과는 차별화된 ‘중국식 이슬람교’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내고, 이슬람교 '중국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사실, 중국 정부는 1949년 이래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정권과 한족 문화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티베트 등 경제적으로 낙후된 북서부 지역에 한족들을 집단 이주시켜 경제적 부흥과 문화적 통합을 추구하여 왔다. 이처럼, 중국 정부가 이들 지역에 한족 이주정책을 취하는 것은 위구르족 등 주변 소수민족들을 중국 한족문화로 동화시키고 통합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정책이라고 믿었기 때문인데... 이제, 이 정책이 가속화되는 것이다.


중국 이슬람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신장-위구르 지역은 비록, 청조말기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이 지역의 이슬람 역사는 '원' 왕조이래 오랫동안 중앙아시아와 교류에서 시작하였다. (P138 韓國中東學會論叢 第 號 30-1) 하지만, 신장과 베이칭 간의 거리에서 보듯 문화적, 종교적, 지리적 간격이 너무 크고 달라 중국의 한족문화와 신장 이슬람문화는 끊임없는 갈등관계 속에 있었으며, 두 문화의 갈등은 1949년 공산당혁명 이후 본격화된 한족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당시, 중국 정부의 신장-위구르 지역에 대한 이슬람정책은 중국 사회주의 정권 유지와, 하나의 중국 정책 유지 그리고, 한족문화 중심주의 하에서만 용인되었다. 


그런데, 무슬림의 중국 정부의 정책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저항은 이슬람원리주의가 신장과 중국 전역의 무슬림에게 유입된 1979년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신장 무슬림의 중국 종교정책을 불인정하면 할수록 중국인의 무슬림에 대한 모욕과 경멸은 더 크게 이어졌다. 예컨대, 중국인이 무슬림을 모욕하는 말에는 단연코 무슬림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라는 용어가 들어갔다. 어쨌든, 중국의 이슬람에 대한 입장은 일관되고 단일한 입장이라기보다 양면적, 다면적이었다. 이런 양면적 입장은 신장의 이슬람 역사와 중국의 대 이슬람 정책에 대해 무슬림의 면전에서 중립적 입장을, 무슬림이 없는 상황에서 공개적, 비판적, 경멸적 입장이었다.  


이처럼, 중국인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은 철저하게 한족문화로 동화된 무슬림에게만 긍정적일 뿐, 아무리 중국어를 구사하고 한족문화에 긍정적인 무슬림조차도 이슬람 관습과 관행을 유지하는 한, 중국인의 시각에서는 여전히 무슬림이었으며, 중국의 관습과 관행에서 이들은 결코 중국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장-위구르 무슬림은 중국의 철학과 전통이 이슬람의 사회적, 종교적 규범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중국 신장-위구르 무슬림 강제수용소(출처:뉴시스)

이에,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식 이슬람교'를 시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신장-위구르' 등지의 기존 무슬림 인사들에 대해 '강제 수용소' 를 운영하며, 세뇌화를 시키는 등 무자비한 억압 정책을 펼치는 한편, '이슬람교 중국화' 작업과 '한족의 이주' 등을 법제화하여 국제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미국 등 서구는 특정 종교에 대한 억압을 떠나 이 과정에서 수없이 자행되는 반인권적 처사에 대해,  국제공조로 항의하고 있으며, 중국 내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면 등 각종 물자에 대해 수입 금지조치까지 불사하고, 인권문제를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기타 국가의 사례

개방형 국가인 싱가포르도 독립 당시 국가 전체 인구의 20% 정도가 무슬림으로 중국처럼 소수 무슬림 국가였지만, 정부는 외국인 근로자와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주변 사람을 무슬림으로 개종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강구하였다. 이른바, 선교마저 제도적으로 억제한 셈인데... 더 이상 무슬림이 늘어나지 않도록 무슬림 국가인 이웃 말레이시아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신중하게 접근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무슬림이 전혀 없었던 지역이라도 자생적, 타생적 무슬림이 생기기 시작하는 일부 아시아권 국가는 무슬림의 확산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싱가포르 같은 제도적 조치가 전혀 먹히지 않는 필리핀의 몇, 몇 섬이나 태국 남부 국경지역에서는 소수의 극단적인 무슬림이 벌이는 테러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여, 국가적으로 큰 걱정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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