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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n 14. 2023

'우리'라는 관계주의와 '팬덤' 정치

'우리'라는 관계 주의와 '눈치 문화'

우리들의 '편 가르기'(갈라 치기)

작은 '우리'만을 위한 '팬덤' 정치



'우리'라는 관계 주의와 '눈치 문화'

합리적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서구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양식이나 상식에 어긋나면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유교에 바탕을 둔 ‘유교적 공동체’는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간주하였고, 개인의 권리보다 사회적 권리를 우선시하였다. 오랜 시간 유교적 의례와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하에서 개인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가 강조되는 사이, 개인의 존재감은 ‘우리’라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재구성되어, 상호의존적으로, 다른 구성원과 조화를 이루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느덧, 이들은 맹목적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이익은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이 당연시되었다. 


굳이, 조선 말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나, 최근 일류 대학 출신들의 요직 독점 등에 대한 병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같은 학교나 학벌 등 학연과, 가족이나 친척  관계 등 혈연, 그리고, 동향이나 성장한 지역이 같은 지연 등에 의한 '관계(연고) 주의'는, 오랜 시간 "우리가 남이가?"라는 공식, 비공식적 연대감으로 이어졌다. 이 말은 조폭 영화에서 등장하는 말이지만, 그 훨씬 이전에 검찰 고급 간부가 사용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우리끼리'에 속하지 못하는 집단에게는 불공평한 처우와 차별로 대하였다. 그리고, 이런 관계주의는 오늘날까지 하나의 '풍토병'처럼 남아, 우리 대한민국의 '선진화' 발목을 잡고, 조롱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우리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우리’라는 개념은 자세히 살펴보면 개별적인 ‘나’와 ‘너’의 합(合) 집합이다. 합집합은 ‘나’와 ‘너’ 사이를 묶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 연결고리를 ‘끈’이나 ‘줄’로 표현하였다. 그러고 보니, "줄을 잘 잡아야 끈 끊어진 갓 신세가 안 된다"는 표현이 새삼 와닿는다. ‘끈’이나 ‘줄’은 묶거나 매는 역할이다. 그래서 인연이나 우정을 맺고, 계약을 맺고, 지연, 혈연, 학연 등 ‘연(緣) 줄’로 엮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다. 하지만, 끈으로 매면, 두 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속박한다. 상대방에게 그냥 ‘나’를 맡기고 ‘나’도 ’ 너’도 아닌 ‘우리’가 되니 ‘너와 내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 그야말로, ‘우리끼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못 끼이면 ‘왕따’가 되는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늘 주변을 의식하였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로 인해 '우리'에 어떤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단 ‘간’을 본 다음, 주변 여건에 따라 적당히 대처하려는 마음이 강하였다. 그만큼, ‘우리’ 속의 남의 이목이나 눈초리가 무서워 나의 행위가 개인으로서의 가치보다 소속한 ‘집단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이처럼 주변을 의식하는 독특한 문화가 ‘눈치문화’로, 이들은, 주변을 의식하는 것을 겸손으로, 예의로 생각했다. 이런 관점에서, ‘눈치’는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의 산물이었다. 왕조시대와 식민지배, 군부독재까지 겪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없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모두가 ‘우리’의 일원이 되려 하였다. 


우리들의 '편 가르기'(갈라 치기)

'우리'가 되려면 여기에는 분명하게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과정이 요구된다. 우라 사회는 마치 개들이 서로 ‘킁킁’ 거리며 냄새로 상대를 확인하듯이… 통성명이 끝나면 나이, 고향, 출신학교로 서열을 정하고, 상하좌우 ‘서로의 관계’를 확인한다. 이제, 평소에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이라도, ‘우리’라는 틀 안에서 서로 만나, ‘우리’ 사이의 관계가 설정되고 같은 편으로 ‘얽히면’, 서열이 정해진 구조에 ‘정'과 '의리’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이쯤되면, 구성원 상호 간의 관계는 더욱 탄탄해지고, 그 다음부터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가 남이가..?’를 내세운 검찰 간부로 부터 조폭들에 이르기까지 그런 관계문화를 익히 보아왔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인성과 의식 수준은 ‘얼마나 주변의 눈치를 잘 보느냐?’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집중하기보다 상하관계에 따르고, 이웃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남의 집 젓가락이 몇 개인지?’를 알기 원했다. 이쯤 되면, ‘나’로서의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계의 틀’ 속에 ‘나’를 속박하고 갇히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용지도 (中庸之道)’랄까? 원만하고 적당한 수준이 요구되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생겼다. 오죽하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게 우리의 보신주의 사고방식이 되었을까? 


그러니, 너무 줏대 없이 남의 비위나 맞추는 ‘아첨꾼’은 애써 외면당하였고, 반대로 ‘미련한 곰탱이’나 남의 입장 따윈 모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독불장군’ 같은 ‘눈치가 없는 인간’도 ‘우리’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출세하기 힘들었다. 또, 누군가가 출세 지향적으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노력하여 높은 지위를 갖거나, 의지나 주관 없이 주변의 시류에 휩쓸려 ‘눈치껏’ 일희일비하는 인격도, ‘우리' 속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처럼, ‘눈치’에 익숙한 개인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라기보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우리’라는 사회의 구성원의 한 부분으로서 각각 그 존재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속에 있을 때 더 편안한 심리적 안정감마저 갖는다. 이런 사회는 ‘내가 어떻게 하고 싶다’라는 생각과 ‘내가 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나,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 남들이 ‘우리’의 구성원들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니까.


반면에, 이런 ‘관계’도 없이 ‘우리’라는 틀 밖의 ‘남’이나, 평소에 모르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태도는,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냉랭하다. 문제는, 이 냉랭함에 사상이나 이념이 개입하면 ‘남’은 손쉽게 바로 ‘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적인지, 아군인지?’로 관계가 식별되면, 그때부터는 ‘적’에게 죽기 살기로 적대하는 말과, 폭력으로 공격을 가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과거, 같은 민족이고 피를 나눈 동포였고, 서너 명만 거치면 아는 사이가 되지만, 이념이나 ‘생각이 다르다’고 ‘적’이라며, 총을 겨누며, 서슴지 않고 서로를 죽였던 '동족상잔'의 아픔을 가졌다. 6.25 전쟁 때 공산군이나, ‘여순반란’ 반군이 우익 인사나 그 가족에게 행한 악행은, '종교' 차이로 '인종청소'를 했던 사례와는 비교조차 안 된다. 


이처럼, '이념적 차이‘에 의한 증오의 휘발성은 예측을 불허한다. 그런데, 잊혀 가는 '이념대결'의 망령을 되살리는 게 누군가에게 정치적 이득이 되었을까? 온갖 번지르르한 논리로 상대에 대한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일은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되었다. 불평, 불만이 팽배했던 이들도 정치인들이 부추기는 논리에 마음껏(?) 춤을 추었다. 과거, 어떤 정권의 반정부 데모대는 죽창을 만들어 시위를 제지하는 경찰의 눈을 노렸고, 데모대의 폭력은 시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하였다.


작은 '우리'만을 위한 '팬덤' 정치

국가적 사안의 논의나 비전도 유사하였다. '관계주의'에 집착하는 우리 정치권이나 일부 지식인들은 국가적 사안을 서로 논의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보다, 집단별 정치적 이해관계를 계산하며 명분논리에 집착한다. 그 와중에 내편, 네 편은 상대에 대한 포용이나 설득은 없다. 그저,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이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미래보다 ‘우리’ 패거리의 생존을 위해 선거의 승리가 중요하다. 그러니, 선심성 복지 정책은 봇물을 이룬다. 20세기 이후, '포퓰리즘'으로 망한 나라가 수없이 많지만, 표를 얻는 데는 그만한 방법이 없으니 '손 안 대고 코푸는' 그 달콤한 유혹을 이기기 힘들다. 대통령조차 국가 지도자의 이미지를 떠나 추종자들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기에 ‘모두의 관심’에 따라 '표 계산'에 몰두하며 '편 가르기'에 앞장서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한 ‘찬성이 유리한지? 반대가 유리한지?’는 논리적 근거나 원칙보다는 세몰이 여론에 좌우된다.


그런데, 이들의 계산 과정에서 황당한 것은 그런 표 계산에 따라 결정된 사안조차 어느 순간 정파적 이익에 불리하다 싶으면, 새로운 딴지걸기 수법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리하다 싶으면, 느닷없이 사소한 반말에 시비를 걸고, 말꼬리에 목숨을 걸며, 거품을 물고 감정 대립에 몰두한다. 대인배임을 자처하는 정치인들의 이런 모습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조폭들의 모습과 뭐가 다를까? 적어도, 제삼자인 국민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 그들은 이런 걸 ‘정치’라고 강변하는데, 우리 국민들이 ‘우매’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이런 오만한 '패거리' 정치인들의 행태를 외면하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침묵하는 다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썩어 문드러진 병폐는 가만히 둔다고 저절로 아무는 게 아니다. ‘행동하는 소수’에 의해서라도 보이는 족족 도려내어야 사회가 건강하고 나라도 건전해진다. 


그런데, '행동하는 소수'를 표방한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게 '이념적'으로 동조하는 '우리 편'세력을 비호하기 위해 폭력적 언어와 행동으로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공격대상인 상대방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인격을 모욕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게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걸까... 이처럼, 악성 팬덤이 '표현의 자유'라는 탈을 쓰고 기승을 부리지만, 기성 정치권은 속수무책이다. '우리'라는 '동지적' 표를 의식해서란다. 하지만, 맹목적인 이들이 더욱 확장되고 흉폭화 되어간다면, 우리 사회의 자정력은 힘을 잃을 것이다. 


역사에서 보듯, 소수의 '무솔리니'의 이태리 파시스트들이 반대파에게 공포스러운 테러를 가하면서 성장하였고,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이념화된 홍위병 집단이 사회전체를 폭력으로 뒤집어 엎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특별히, 이미 엄청난 전쟁을 경험한 우리에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싫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를 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팬덤 정치'의 폭력적이고 편파적인 언행은 또 다른 '우리'라는 '패거리' 관계주의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팬덤 정치'는 과거 누구의 말대로 무슨 '선거판의 양념'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구의 말대로 '세계의 주목'을 받을만한 일도 아니다. 이들은 그저, 일부 정치인의 편향된 이념에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정치 세력일 뿐이다. 


택시기사 분신자살 (출처 경향신문)

 언젠가, 한 택시기사가 국회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를 우파인사로 여긴 좌파 국회의원 보좌관은 분신으로 죽은 자를 ‘통구이’라며 버젓이 조롱하였다. '편 가르기'를 장기로 삼는 일부 정치인이나 그 정당을 지지하는 특정세력이 반대파의 언행이, 자신과 입장이나 관점과 다르다며 적개심에 가득 찬 '문자 폭탄'을 날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최근, 진영 간, 계층 간, 빈부 간, 세대 간, 남녀 간 갈등과 '갈라 치기'는, 위험 수위에 달했다. 이처럼, 정권을 누가 잡든 서로에 대한 적의는 현재진행형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지...? 우리 사회에서 갈등과 증오에 대한 치유는 정말 불가능한 걸까..?


그럼에도, 이들의 지지에 의지하여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고, 범죄를 속이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어른 그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말로 만의 정의'를 앞세우며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들이 행세하거나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라는 '동지적' 이념에 경도되어 '하나의 생각'을 떠받들기보다, 더 큰 '우리' 공동체인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이성적, 합리적 그리고, 건전한 개개인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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