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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n 18. 2023

전투 '프로' 중공군과 맞붙은 한국군

** 6.25 전쟁을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전투 ‘프로’ 중공군

국군을 ‘위군’으로 조롱한 '마오쩌둥'

알아서 살길을 찾아 나서는 각자도생(各自圖生)

단 시간만에 이루어진 국군의 환골탈태


전투 ‘프로’ 중공군

중국 홍군의 모태는 지배 계층의 핍박에 시달리다 뛰쳐나온 농민 저항군이었다. 1927년 ‘남창(南昌) 봉기’를 계기로 창설된 중국 ‘공농혁명군’은 ‘홍군(인민해방군)’의 모태로서 말이 군인이지 대부분 평민으로 이루어진 잡병들로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감내하며 혁명투쟁을 전개해 온 군대였다.

그런데, 과거의 전통 시장바닥에서 벌어지던 싸움에서 보았듯이, 싸움판에서 싸움 잘하는 사람은 태권도 등 무술 단련자보다 오히려, 시정잡배들과 싸우면서 ‘오기와 깡’을 배우고 잔뼈가 굵어진 ‘장돌뱅이’이다. 입술이 터지고 눈이 퉁퉁부어도, 얻어터지면서도 계속 달려들면 누가 당하랴! 이처럼, 싸움은 이론이나 훈련보다 온갖 상황하에서 그저 ‘절실한’ 마음으로 싸우고, 그 과정에서 습득한 실전경험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중공군은 계급이 없고, 직책만 있었다. 당시, 무리 중에서 나이보다 전투경험이 많은 이가 자연스레 여러 직책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대부분 무식하였지만, 민중을 위한 군대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여기에는, ‘마오쩌둥’의 부대운영 지침인 ‘3대 기율(紀律), 8항 주의(主意)’도 한몫했다. 1930년대 중반, 홍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쫓겨 다니던 ‘대장정’ 시절, ‘에피소드’가 있다. 6개월 이상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굶주리던 홍군 몇 명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어느 빈집 헛간에서 감자 몇 개를 찾았다. 보고를 받은 분대장이 이거라도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먹자”라고 제의하자, 분대원들의 반응은 달랐다. 당신은 우리의 지휘자니 당신이 먹어라모두가 나누어 먹으면 모두가 죽지만당신이라도 살아남으면 살아남은 동료들을 이끌 수 있지 않느냐?”


홍군의 이런 모습은 향후 전쟁에서도 계속 언급된다. 일찍이, 미국의 중국학자 ‘오웬 라티모어(중일 전쟁 간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정치고문)’는 ‘국‧공합작’으로 ‘중일전쟁(1937~1945)’간 구 일본군과 유격전, 정규전을 벌이는 홍군을 보며, “홍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통하여 단련되었다. 만약공내전이 벌어지면일본군과 싸우기 꺼렸던 국민당 주력은 일본군과 작전에 적극적이던 홍군 주력군을 당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실제, 홍군은 일본 패망 후 ‘국‧공내전(1945~1948)’에서 부패한 ‘장제스’의 800만 군대와 500만 국민당 당원을 단시간 내 대륙에서 대만으로 축출한 전투경험 많고 잘 훈련된 군대였다. 불과 30여만 명에서 1949년 10월, 무려 550여만 대군으로 성장하였고, ‘신 중국’ 건국의 원동력이 되었다. 변화의 중심에 있던 ‘홍군’은, 신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었고, 그 일부인 중공군은 이미홍군팔로군 시절을 겪어 온 전쟁 프로였다.


한국전 출정 선서식을 하는 '덩화'의 동북변방군(제 13병단) 

한국전 참전 중공군 지휘관 대부분은 빈한한 농민 출신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이럴 적부터 10여 년 이상 온갖 전쟁터를 누빈 노련한 인물들이 많았다. 예컨대, ‘덩화’ 중공군 제1 부사령관을 도와 중공군의 1~5차 공세를 계획하였던 중공군 사령부 작전참모 ‘청푸(成普)’도 갓 30대 초반이었고, 1950년 10월 25일 최초로 국군 6사단을 기습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가한 중공군 제40군 118사의 사(단)장 ‘덩웨(鄧岳)’도 당시 32세의 약관이었는데, 이미 12세 때부터 대장정에 참가한 소년군 출신이었다. 또, 중공군의 3차 공세에서 중앙청과 경무대를 점거하였던 제39군 116사의 사(단)장 ‘왕양(汪洋)’도 30세였다. 당시, 우리 국군도 백선엽 장군 등 30세 초반의 사단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이는 비슷해도 실제 군사경력은 이들에 비해 많이 짧았다.


그런데, 이처럼 비이성적 비합리적인 상황을 이겨 온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지휘관 못지않게,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싸우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병들이다. 미군이 북한군을 쫓으며 한-만 국경으로 다가오자, 악랄한 ‘외세 트라우마’에 짓눌렸던 중국 인민들 가운데, ‘항미원조’와 ‘순망치한’을 내세우는 공산당 정부의 애국 홍보에, ‘조국을 지킨다’며 중공군에 자원입대한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성취한 ‘통일과 건국’으로 ‘가진 자’들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조국’이라는 열정을 가졌다. 


자원입대한 중공군 병사들은 미군 등 유엔군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희생은 많았지만, 비교적 엄정한 군기를 유지했고, 미군에게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어 만세군 칭호를 받은 부대도 있고, 개인적인 전투영웅(?)도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중공은 이들의 열정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총기와 탄약은 물론, 제대로 된 보급지원조차 모자라 지원병 상당수가 굶주렸고, 혹한으로 동상을 입거나 부상당해도 의약품 부족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중공군의 인적 피해는 심각하였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레닌의 ‘공산주의 신조’ 탓일까? 능력도 안 되는 국가가 지도자의 욕심과 헛된 판단으로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교묘하게 내세운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애꿎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헌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국군을 ‘위군’으로 조롱한 '마오쩌둥'

중공군에 비해 한국군은 전투경험이나 훈련면에서 많이 부족하였다. 조선 말기, 일제가 국제적으로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떨치고, 멸망의 늪에 빠져들던 조선 왕조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강탈당하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제 침략행위에 저항하였다. 선비들의 기개와 애국심은 가상하였으나, 이런 봉기는 대부분 실패하였다. 여전히 신분상 반상 제도에 집착하였던 의식 수준으로는 변화하는 환경을 따르지 못한 탓이다. 의병들은 애국심을 내세웠지만, 양반이라고 가마 위에 가만히 앉아서 상놈들에게 지시나 해 댄다면 승산이 있을 턱이 없다. 더구나, 훈련이나 무기체계 마저 일본군에 비해 열등하기 짝이 없었으니….


해방 이후, 우리 국군 창설은 일본군 무장 해제를 담당한 미군정이 주도하였다. 미군정은 광복군 출신과 일본군 출신을 동등하게 대하였다. 이에, 다수의 광복군 출신은 일본군 출신과 함께할 수 없다며 군 창설에 참여를 거부하였고, 일본군 대좌이상의 조선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자 거나 반민족 행위자로서 귀국을 꺼렸다. 그 결과, 일본군 중좌(중령) 출신이 육군참모총장이 될 정도로 군 전문가가 드물어서, 위관급이하 구 일본군 출신들이 군의 주축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군은 구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잔재를 안고 출발한 셈이었다.


그런데, 군부 등 극우세력이 주도한 구 일본 제국주의는, ‘지시와 복종’의 계급주의였고, ‘강압과 욕설, 구타’는 이들의 군대 문화였다. 정부는 정부 수립 이후 광복군 출신을 특별 임관하고 육사 입교생 숫자를 늘려 일본군 출신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려 노력했지만, 우리 국군에서 6‧25 전쟁을 치른 주역은 거의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공산주의 타도와 애국의 일념으로 헌신하신 그들의 충정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군을 지휘한 그들의 리더십에 의해 국군 내부에는 “계급이 깡패”였던 구 일본군의 부정적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전쟁 초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국가 존망의 위기에 몰리자, 국군은 궁여지책으로 미군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겼다. 비록, 국군이 애국충정과 사명감으로 전투 의지가 강했다고는 하나, 화력과 기동력은 물론, 교육훈련과 전술전기도 미숙하고 장비, 물자 등의 열세로 공산군을 감당하기에 벅찼다. 그러나, 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되찾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용맹을 발휘였다. 이에 비해, 압도적 기세를 보이며 낙동강까지 진출하였던 북한군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숙련된 고참병의 열에 아홉을 상실하였고, 급기야 인천 상륙으로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이 진공상태인 북한에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가자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한국군의 사격훈련을 지도하는 미군 교관(출처: 오마이뉴스)

그런데, 북진으로 승승장구하던 국군은 기습 참전한 중공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중공군은 당시 세계 최강으로, 국군은 중공군의 1차 공세 때부터 매 공세 때마다 중공군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국군이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취약하였던 것은 전쟁경험이 일천하였고, 훈련부족으로 중공군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국군 상급 지휘관들은 광복군이나 일본군 초급 장교, 하사관 경험으로 전쟁 직전에, 기껏 대대, 중대급 지휘관이었지만, 전쟁 발발로 갑작스레 국군의 고급제대 요직을 맡았다. 자연히, 중공군에 비해 군사 경험이 짧아, 다양한 전법을 구사하는 중공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유린당하기 일쑤였다.


또한, 일반 병사들도 ‘신 중국’ 건설이라는 열정에 들떠 자원입대한 중공군과 달리,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학생, 직장인, 혹은 농부 등으로 일하다, 갑작스러운 전시동원령으로 졸지에 징집되어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급하게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이었다. 이처럼, 국군의 훈련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부대 장비도 구 일본군이 사용하던 38식, 99식 소총과 일부 미군의 경장비가 전부였다. 구한 말의 의병들과 뭐가 달랐을까?


이 때문에, ‘항미원조 지원군’ 출병 후, 베이징 근교에 지휘부를 차리고 중공군을 원격지휘하던, ‘마오쩌둥’은 이런 국군을 얕잡아 보았다. 그는 ‘미군을 목표로 한다’ 하면서도, 항상 국군을 먼저 노렸다. 화력과 기동력이 우수한 미군보다 국군이 약한 고리였으니까. 그 바람에 국군의 희생이 막대하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 스탈린이 마오에게 따끔한 한 수를 충고했다. 1951년 2월 말, 중공군에게 신형 MIG-15 전투기를 제공할 때 ‘스탈린’은 ‘마오’에게, 미군이나 영국군에게도 대규모 공세를 가하라!”라고 주문하였다. 아마, ‘마오쩌둥’이 강한 미군은 회피하고약한 한국군을 두들겨라라고 지시한 것을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오쩌둥’은 국군을 군복만 입었지 군인답게 싸울 줄 모르는 가짜 군대라며, ‘위군(僞軍)’이라 불렀다.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고, 작전권마저 타국군에게 넘긴 ‘꼭두각시’ 군대로 얕본 것이다. 중공군도, ‘마오’ 따라 각종 전쟁기록물은 물론, 군사정전위원회 등 공식회의에서도 국군을 지칭할 때 항상 ‘위군(Puppet Army)’이라 하였다. 일부, 중공군 기록물은 한발 더 나아가 국군을 ‘부동(浮動)’으로 ‘둥둥 떠돌아다니는 부유물’로 표현했다. 물이 스며들어 그 물이 지닌 부력으로 이리저리 떠다니는 상황인데…. 중공군이 국군을 얼마나 형편없이 얕잡아 보았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참고로, 과거 대영제국 군인도 ‘비겁한 군인’을 경멸하는 의미로 ‘깃털(Feather)’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아마, 깃털처럼 가벼운 인간이라는 뜻일 거다.    


군인은, ‘싸울 의지를 갖고 싸울 줄 아는’ 집단이다. 설령, 군복을 입지 않은 어린아이라도 적개심을 가지고 상대를 쏘면 군인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 반면, 군복만 입었지 싸울 줄 모르는 군인도 많다. 임진왜란 전, 일본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하자, 군사력이 허약한 조선은 군세를 과시하려고 젊은 농군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창을 쥐게 하여 그들을 맞았다. 그런데, 사절단 중 하나가 창을 쥔 농민의 손바닥에 박힌 군살을 만지면서, 이건 창을 다룬 손이 아니다이러다가 다 죽는다”라고, 조선 측에 말해 주었다. 임진왜란 초, 조선군 ‘신립’ 도원수는, 적은 병력으로도 적을 물리치기 용이한 ‘조령’에서 왜군을 격퇴하지 않고, 굳이 남한강을 등진 드넓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마주 싸우다 전멸했다. 그는 비록 졌지만, 왜군만 보면 도망치는 훈련이 부족한’ 군대를 데리고 죽기 살기로’ 악착같이 싸우려던 지휘관의 고뇌에 찬 결단으로 보인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거의가 ‘전투군인’이다. 하지만 걔 중에는 일부, ‘정치군인’도 있고 ‘가짜군인’도 있다. ‘정치군인’의 폐해는 군부 집권 시절을 겪으며 익히 경험하였다. 하지만, 정작 더 무서운 군인은 군인답지 못한 군인으로서 이른바, ‘가짜군인’이다. 가짜군인은 훈련을 하지 않고도 했다고 허위로 보고하는 간 큰 행위를 하며, 별다른 군 경험도 없이 눈치껏 어영부영하는 부류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급여나 승진만 바라보고 입대한 군인들이었지, 진정한 투사는 아닐 거다. 이른바, ‘위군’의 대표적인 실례라고나 할까…?


강한 장수 밑에 약졸 없고약한 장수 밑에 강졸 없다는 말이 있듯이 군인은 전술 전기’ 면에서 전문가여야 한다. 그런데, 국군의 팽창 탓에 몇 계급씩 순식간에 뛰어오른 당시 지휘관, 참모는 군단이든, 사단이든 자신들이 지휘하는 제대급에 걸맞은 임무수행 능력이 부족하였다. 언어조차 다른 미 8군 사령관으로부터 작전지시나 전투명령이 하달되면, 부여받은 작전지대에 대한 방어계획이나 기동계획은 물론, 화력지원 통합, 전투근무지원, 장애물, 경계, 방호, 통신, 우발사항조치 등 각종 계획 수립과 공세이전에 대한 계획, 포위 시 대책, 인접부대와의 협조사항 등등을 수립하고, 관련 지휘관 참모들의 협조 및 숙지와 예하 부대원들에 대한 사전 훈련도 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런 입체적, 다각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끌 능력 있는 인원이 부족하였다.


그 결과, 아래 사례처럼 ‘적전에서 도주하였던 자’에게 ‘처벌보다는 관용’이 주어져 곧바로 다시 기용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무슨 높은 사람들과의 연줄 때문이라기보다, 그나마 그들만큼 군사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군인이 없어서가 이유였다. 전쟁은 이어지고, 부대는 팽창하고, 일손이 달리는 판이어서…. 이들은 대부분 일본 육사 출신들로 당시로는 몇 안 되는 군 엘리트였다(몇몇은 전쟁 이후에 국방장관이 되었다).    


알아서 살길을 찾아 나서는 각자도생(各自圖生)

2015년, ‘MERS(중동 호흡기질환 증후군)’라는 질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이때, ‘질병관리 본부’ 등 보건 당국이 허둥거리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SNS상에 소위 ‘각자도생(各者圖生)’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이는, 어느 영남 출신 전직 대통령 말처럼, 우짜든지 살아남아야지!”라는 뜻으로, 정부나 지휘관, 윗사람이 무능하여, 아랫사람들이나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건데…. 상급자 무능에 대한 불신이 나은 산물일 것이다.


세월을 거슬러, 6‧25 전쟁 초기에 한국군은 유독, 중공군에게 호되게 당했다. 한창 북진 중이던 1950년 11월, 국군 2군단의 6, 7, 8사단, 그리고 1951년 4, 5월의 공세에서 6사단, 3군단이나 예하 3, 9사단은 중공군의 공세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특히, ‘사창리 전투’나 ‘현리 전투’에서는 전장을 지휘하던 사단장, 군단장 등 주요 지휘관이 먼저 도주하였다. 당연히, 전투 결과는 참담하였고…. 지휘관이 도망치면 남은 병사는 누구 통제하에 어떻게 살길을 찾겠는가?” 그런데, 이들 전투의 공통점은 비교적 상황을 빨리 판단할 수 있었던 지휘관이 ‘하나같이’ 먼저 살자고 꽁지를 내뺐다는 것이다. 당시, 국군 장군의 군인정신이 약했을까?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제일 먼저 탈출하는 세월호 선장

‘세월호’ 침몰 사건 시, 상황을 가장 먼저 아는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이 언론에 나왔다. 세월호 선장의 비겁한 모습과, 전투에서 도망치는 지휘관의 모습이 그것과 서로 다를 바가 없지 않나…?


1951년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적성’ 일대에서 벌인 전투는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중공군의 공세에 포위되어 끝까지 저항하다가 마지막 순간, 대대장은, 나는 부상병과 여기에 남을 터이니 각 중대는 살길을 찾아 떠나라!”라고 지시한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장면 같지 않은가?' 영국군의 모습은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할 때,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선장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국은 그런 나라일까(?) 물론, 그들도 흩어져 도주하다가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지만, 그 과정이나 지휘관이 책임지는 모습이 우리 국군과 조금 달랐다.


1951년 2월, ‘횡성 전투’에서,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초저녁 짧은 전투에서 보병사단의 주축인 보병 3개 연대가 사라지고 사단 본부와 본부대만 남았다. 누구든 이런 황당한 상황을 보았다면, 전투병보다 그나마 지휘관 가까이 있는 행정병이 되길 원할는지 모른다. 그 결과, 국군에 사병으로 입대하는 이들 가운데 한동안 ‘야전 기피, 행정 선호’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죽도록 행군하는 것보다 밤을 새우면서 행정 일을 보는 게 더 편하거나(?), 쉽다(?)기보다, “여차하면 꽁지를 내빼는 지휘관 옆에 있어야 우짜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지휘관에 대한 신뢰 아닌 불신 때문이었을까…?


6‧25 전쟁 이후, 군에 가면 적당히 요령을 피워라는 말이 금과옥조였다. 자식이 군에 입대할 때, 부모님이 꼭 해 주시는 말이었다. 대충대충 눈치껏 잘 처신해라는 뜻인데…. 어쩌다가, 구 일본군에서 ‘해야 할 일을 잘 정리해 놓은’ ‘요령(要領)’이라는 말이, 우리 군에서는 적당히 알아서 잘 헤쳐 나가라는 뜻으로 변질된 건지? “훈련을 잘해서 적을 물리치겠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군에서 열심히 해 봐야, 용감해 봐야, 적극적 이어 봐야…” 결과는 ‘손해 보거나 고통스럽다’로 느껴진다면? 그리고 불신이 낳은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런 군대는 ‘있으나 마나 한 군대’ 일 것이다.


단 시간만에 이루어진 국군의 환골탈태

사실, 1951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때, 중공군에게 유독 취약한 모습을 보여 중공군의 조롱을 받았고, 미군의 불신까지 샀던 국군이었다. 하지만, 싸우며 배운다고 했던가? 국군도 중공군과 전투를 거듭하는 동안 점차 실력이 늘어 중공군의 우회, 침투, 포위 등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 전술에 점차 적응하였고, 어느덧, 많은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국군이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 교리와 중공군 교리를 습득하고 성장해 가는 동안, 중공군의 고참병이 소진된 탓도 있지만, 더 큰 요인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무기, 장비에 대한 강력한 지원이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미 8군은 국군 10개 사단에 대한 재교육과 미국식 장비로 국군을 ‘잘 싸우는’ 정예 군대로 거듭나게 지원하였다. 


그 결과, 국군은 양측이 휴전협정 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할 때, ‘용문산’, ‘백마고지’ 등의 여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결사항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고, 국군의 용전분투는 곳곳에서 그 빛을 발하였다. 중공군 공포증을 넘어선 것이다. 특히, 여러 전투 중에서도, 백마고지’ 전투는 중공군이 기술한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경험 총결에서도 국군에게 받은 크나큰 패배로 인정하였다.


우리는 최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직면하자, 고위직 모두가 도망치고 아무도 남지 않는 황당한 상황을, 최근 아프간 정부군에서, 이라크 민병대에서, 그리고 월남(베트남) 민병대에서 '역사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상대가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위기적 상황에 맞서는 모습도 보았다. 중공군은 영웅적 혁명이념을 부추겼으며, 미군과 영군은 명예심에 호소하며 해결하였다…. 지금의, 우리 국군 장병은 눈치껏 요령 피우며 우짜든지 살 방도를 찾았던' 과거에서 탈피하여더 나은 가치를 찾아가는 성숙한 자세로 넘어선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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