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웅 Jun 19. 2023

중공군의 기동전과, 전쟁의 양상을 뒤바꾼 미군 화력전

** 6.25 전쟁을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중공군의 5차례 대공세(기동전)를 드디어 종료시킨 미군의 '화력전'

* 화력전은 각종 화포의 포격과 공군의 항공 폭격 등으로 수행하는 전투를 의미한다. 

무제한 ‘화력전’으로 중공군을 제압한 '밴 플리트' 장군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과 '후방차단' 작전

공지합동 ‘근접항공지원' 작전



중공군의 5차례 대공세(기동전)를 드디어 종료시킨 미군의 '화력전'

‘밴 플리트’의 취임 직후인,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은 2개 병단을 추가로 투입해서 총 4개 병단으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른바,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공세이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한국전 개입이래, 거의 월 1회 주기로 이미 4차례 공세로 청천강에서 서울까지 유엔군을 몰아내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펑더화이’는 이번 공세로 서울을 다시 탈취하여 ‘마오쩌둥’에게 ‘5월 1일 노동절 선물’로 바치려 하였다.


이 공세에, 중동부 전선 국군 6사단은 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 국군 6사단은 1950년 10월 중공군 1차 공세 시 '온정리' 일대에서 포위되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번 ‘사창리 전투’에서 또다시 중공군의 공격에 밀리자 사단 전체가 야포 등 장비를 유기하고 지리멸렬한 상태로 패하며, 참담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지난번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바람에 6사단을 화력지원하던 미 포병부대도 측면이 노출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며칠 후, 혼자만 도망쳤다가 돌아온 사단장(장도영 준장, 구 일본군 소위, 훗날 국가 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군 군단장으로부터 당신군인 맞아?”라는 굴욕스러운 핀잔을 들었다. 며칠 후에야, 사단 병력의 절반 정도인 6,300여 명을 겨우 수습했지만, 사단은 이미 재기불능 상태였다. 이 사단은 예하부대 지휘관들의 지휘능력 부족, 간부들의 사기저하, 병사들의 전의 상실 등 국군의 작전지휘 취약점이 여실히 노출된 패배로 사단장 문책 사유는 차고 넘쳤지만, 그나마 그 정도 능력을 갖춘 사람도 드물다며 사단장 문책은 미뤄졌다.


이에 비해, 국군 1사단, 3사단 등 다른 사단은 악전고투 속에서도 책임 지역을 잘 지켰다. 중공군 입장에서는 유엔군의 배치가 밀집되어 전역분할이나 전술분할이 어려웠고, 유엔군은 철수하더라도 각 단계별로 화력으로 때렸다. 중공군으로서는 화력전으로 진격이 저지되고 전과는 적은데, 기동할수록 화력에 의한 피해는 커졌다.


이는, 제4차 공세 이후부터 미 8군이 적의 보급제한 약점을 파악한 탓이다. 중공군 개입이래 연전연패하던 미군은 적의 4차 공세를 지평리 전투에서 막아내며 처음으로 승리하였다. 효율적인 화력전의 결과였다. 이후, 미 8군은 적의 공세로 돌파구가 형성되면, 가능한 한 최소의 접촉을 유지하다가, 적의 공세가 약해지는 5 차 이후에 항공과 포병으로 구성된 화력전으로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작전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이 동원되었다. 기동전 대응에는 화력전이 답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공세는 피해만 입은 채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어진 5월 중순 동부전선 중공군 제5차 2단계 공세에서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공격준비 명령을 접수한 중공군 제9병단은, 동부전선에서 국군 4개 사단을 섬멸할 목적으로 다중 양익포위망을 형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는, 서울로 지향할 것이라는 미 8군의 판단과 달리, 한국군을 대량 섬멸하여 미군을 고립시킴으로써 이를 격멸시킬 수 있는 전기(轉機)를 잡겠다는 의도로 국군이 방어 중인 동부전선으로 주공을 지향시켰다. 그리고, 미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한강 도하 등 양동작전과 소양강 도하 등 기만작전을 병행 실시하였다.


그런데, '국군 4개 사단을 섬멸한다'는 중공군의 전술적 목표는 뜻밖으로 너무 쉽게 달성되었다. 중공군 1개 중대가 산악침투로 실시한 퇴로 차단 작전으로 국군 제3군단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퇴로를 차단당했다고 생각한 군단장 (유재흥 소장, 구 일본군 대위, 후에 국방부 장관)이 경비행기로 탈출하자, 6만여 명의 군단병력이 화포, 전차 등 주요 전투 장비를 유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길도 없는 강원도 산악지역으로 숨어든 것이다. 이른바, '현리 전투'다. 얼마 후, 3군단은 해체되고 육군 본부도 작전권을 빼았겼다.

  

이처럼, 국군 군단 병력이 적 1개 중대의 침투로 녹아내리자, 동경에서 날아와 ‘현리 전투’가 벌어졌던 중동부 전선을 시찰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전선에 형성된 적의 돌파구가 너무 과도하여 약점으로 보인다이를 이용하여 중공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자며, 오히려 예비대를 투입하고 전 전선에 걸쳐 적극적인 공세를 지시하였다. 이제, 불룩한 주머니처럼 형성된 ‘돌파구 내에 갇힌 적을 신속히 공격하려는’ 유엔군이, ‘돌파구 밖으로 벗어나려고 애쓰는’ 공산군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을까?’로 승전을 다투게 되었다. 그리고, 돌파구 저지 사격이나 돌파구 내 적 살상을 위해 유엔군은 다시 한번,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을 가동하였다. 


무제한 ‘화력전’으로 중공군을 제압한 '밴 플리트' 장군 

중공군은 5차 공세 1단계 작전까지, 변변치 못한 무기체계와 탄약 부족으로 늘 화력지원이 충분치 않았는데, 5차 공세 2단계 작전에서는 작전을 바꾸어, 돌파할 지점을 미리 선정하고 모든 가용화력으로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1시간 정도 퍼부은 뒤, 엄청난 병력으로 신속한 야간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른바, 전형적인 보병+포병 합동 ‘인해전술’로 중공군이 먼저 화력전을 가해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런 뜻밖의 전술에 허를 찔렸다. 


포병 사격후 산처럼 남겨진 폐장약통들 

그렇지만, 중공군 대공세를 맞이한, 미 8군은 강력한 화력공격과 엄청난 수적 우세로 돌파를 시도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섬멸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화력(포병+공군)을 운용하였다. ‘밴 플리트’ 장군은 병사 개개인의 전투능력보다 화력지원이 중요하다나는 병사들이 한 포탄 자국에서 다른 포탄 자국으로 한 걸음에 갈 수 있을 만큼 많은 포탄 자국이 만들어지길 바란다며 엄청난 물량 중심 화력운용을 지시했다. 그는 미군은 물론, 국군 포병에게 미 육군 규정을 5배나 초과하는 탄약 사용을 승인하여, 평소, 하루 1~4만 발 수준이었던 방어선 전방지역 미군 포병화력의 치열도를 거의 ‘무제한’이랄 수 있는 하루 5만여 발로 올렸다. 이 정도면 화포 1문당 쏠 수 있는 1분당 발사속도를 고려할 때 포신이 달구어질(?) 정도의 양이었다. 또한, 포병 화력과 시너지를 내기 위한 항공지원도 1일 200여 회 이상으로 늘여,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엄청난 화력전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무력화 시키고 연합군이 전쟁의 승기를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 화력운용은 막대한 전비 부담으로 이어져 미군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으나,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전투를 수행하여 적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예컨대, 제5차 공세에서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하자, 중공군 제63군은, 2만 9천여 명의 병력과 1개 포병단(연대급)과 1개 방사포영(대대급)으로 철원지역을 15일 이상 방어하도록 지시받았다. 하지만, 화포 1,300여 문과 전차 180대, 그리고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미 1기병사와 25사, 영 28여단과 29여단 등 5만여 명이 공격하자 단 3일 만에 제63군은 7천여 명이 줄어든(?) 2만 2천여 명만 남았다. 이쯤되면, 재정비가 불가피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부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유엔사는 제5차 전역에서 유엔군 2,600여 명 전사에 중공군 6만여 명 전사로 공식 발표하였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공군 지휘부는, “4월과 5월 공세를 연속하여 실시하는 바람에 병력이 지치고보급품도 바닥났으며, 미군의 견제부대를 격멸하지 못하였기에 미 측의 반격위험이 있다며 공세를 마무리하고 휴식과 정비를 명하였다. 이처럼, 유엔군은 강력한 화력전은 중공군 지휘부에게 대규모 기동전으로 유엔군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깨우치며, 중공군을 휴전회담장으로 내모는 데 일조하였다. 더불어, 기동전을 주도한 '덩화' 제1부사령관은 휴전협정 대표로 교체되고, '땅굴전'의 대가인 '천껑'이 부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그 결과, 중공군이 다시는 기동전이라는 대규모 공세를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38선상에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고, 전쟁의 양상은 대규모 '기동전'에서 '화력전'과 '고지전'으로 새롭게 전개되었다.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과 '후방차단' 작전

6‧25 전쟁 간 미 공군의 공격 능력은 엄청났다. 당시, 미국의 경제력은 중공의 1,000배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엄청난 전비 조달이 가능했다. 그때문에 중-조 공산군은 지금껏 미 공군의 공폭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까지도 북한이 핵실험 등 도발을 감행하면, 동해상에 미 항공모함이 진입하고 괌에서 ‘죽음의 백조’라는 B2 폭격기가 날아가는데 그럴 때마다, 북한은 전시 상태를 선포하며 고사총을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거나, 항공유 제한으로 항공기가 뜰 형편조차 안 되는 데도 수백여 기의 전투기를 띄우기도 한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 내내 작전지원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결정적으로 적에게 타격을 준 것은,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미 8군 사령관으로 재임 약 100여 일 간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분석하며, 중공군의 약점이 길게 신장된 병참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중공군 병참선 차단에 집중적으로 나서게 한 군수전이었다

이후, 미 8군 사령관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옮긴 ‘리지웨이’는, 미 해‧공군기 500여 대로 ‘합동 특수기동군’을 편성하여, 북한 내 정치, 군사 목표에 대한 폭격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후방차단작전(스트랭글 작전)’, ‘집중폭격(새츄레이터 작전)’은 적의 전력을 파쇄하고 전의를 분쇄하는 압박 작전으로, 나진항과, 수풍, 부전, 장진, 허천 발전소 등을 공폭하였다. 그리고, 52년 7월의 '평양 대폭격'에는 무려 822대의 항공기로, 11시간 동안 1,400여 톤의 폭탄과 2만 3천여 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평양 지도부를 압박했다. 


이런 식으로, 한국전에서 경험한 미군의 엄청난 포격과 폭격은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는 국‧공내전 간 포격에는 음악보다 포성을 더 즐겨한다”라고 말하였지만, 미군의 폭격은 너무나 무서워서 혼이 다 나갔다”라고 술회하였다. 유사한 사례를 언급하면, 냉전시대, 영국 정보원으로 소련의 이중간첩이 되어 400여 명의 서방 첩자를 희생케 했던 ‘조지 블레이크’라는 스파이가 있었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도, “625 당시 주한 영국 대사관 근무하다 북한군에 체포되어 끌려갈 때미 공군기들이 조그마한 산간 마을조차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하여 자진 전향하였다는 것이다. 병참 능력이 부족한 공산군들이 민간인 집이나 학교, 사찰 등지를 숙영지로 사용한다고 판단한, 미 공군기가 이른바 청야전술(淸野戰術)로 사용가능한 모든 시설을 파괴한다며, 얼마나 치열하게 공습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중공군의 제2차 공세를 앞두고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도 미 공군의 공습으로 폭사하였다.

                                                                                           

열차수송을 공격하는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동전을 전개한 중공군은 청천강 선에 머물렀던 제1차 공세와 달리, 제2차 공세로 유엔군을 청천강 선에서 38도선 상으로 200여 km나 밀어내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남진을 계속할수록 보급로가 늘어나, 미 공군의 끊임없는 공습에 재보급이 어려웠다. 만주 일대에서 지원되는 보급품들은 한반도 남쪽으로 갈수록 미 공군의 공폭으로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계속 전진한 전선부대들의 의식주와 탄약, 의약품 부족은 점점 심각해졌다.


다음은 미 8군이 파악한 당시 중공군 전방 부대의 실태이다. 

유엔군 전투기들은 낮 동안에 수시로 날아들어 밥 하는 연기만 보여도 맹폭을 가했다. 해뜨기 전 밥 한술 뜨고 나면 어둡기 전까지 굶거나, 얼음물로 강냉이 미숫가루를 먹다가 배앓이를 했다. 숙영지도 문제였다. 중공군은 미 공군기의 공폭 때문에 고정 건물에 기거하지 못했다. 이처럼, 장기간 낮에는 활동을 못 하고 습기 찬 동굴이나 ‘유개호’ 속에서 은폐하다 보니, 온몸에 이가 들끓고 피부병에 걸린 이들이 많았다. 어느 부대건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의약품 부족으로 부상자 치료도 어려웠다. 병력 보충이나 물자 재보급 없이는 공세 유지가 불가하니, ‘펑더화이’로서는 1차 공세나 2차 공세도 한창 기세를 올리다가 어느 순간 서둘러 중지하고, 보급을 기다리며, 전열을 재정비하고, 공세 간 도출된 문제점 보완에 주력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1951년 초, 제3차 공세(신정 공세) 상황도 유사했다. 38도선 이남과 서울 재확보는 물론, 한강선 이남까지 순식간에 진출한 중공군이 1월 8일 갑자기 공세를 멈추었다.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은 공세를 멈춘 ‘펑더화이’에게 화를 내며 계속 공세 지속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초조해하는 김일성에게, 보급지원의 어려움과 전선 지역의 엄청난 피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상기시켰다.

지원군의 손실이 심각하다세 번 모두 이겼다고 우쭐하지만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다전쟁은 보급이 중요하다용맹이나 정신력은 몇 시간 지나면 쓸모가 없다지금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적은 아직도 20여만 명이 멀쩡하다부산에 내몰렸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평택-삼척-이남에서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은 중요한 시점이다준비 없이 싸울 수 없다. 이제, 미군을 한반도에서 퇴출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공지합동 ‘근접항공지원' 작전

미 공군의 후방차단 작전과 함께, 유엔사는 미 해‧공군의 공중 폭격과 더불어, 웬만한 지상 작전에는 반드시 해‧공군의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을 받아 지상‧공중 입체작전을 펼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의 주간 작전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엄청난 부가적인 노력을 강요하였으며, 항공정찰을 통한 상황판단은 전반적인 작전에 기여하였다. 


‘근접항공지원’의 몇, 몇 사례를 보면, 1950년 11월, 제2차 공세 시,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애로 지역’ 포위망에 걸려 고전하는 미 2사단을 쉴 새 없이 근접지원하였고, ‘장진호’에서도 포위위기에 직면한 미 해병 제1사단을 위해 동해상 항모에서 발진한 미 해군 함재기 F4U가 계속하여 상공을 맴돌며 미 해병의 철수대열을 근접 엄호하였다. 또한, 중공군의 5차 공세 시 38선 일대 작전 간 지연전으로 중공군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미 1군단에게 미 제5공군과 해군 함재기가 하루에만 340여 회 출격하여 지상군 포병화력과 합동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미 공군기의 위협 때문에 중공군 포병은 적시에 기동 할 수 없었고, 후방차단 병력도 부족하여, 엄청난 포병공중 화력전을 구사하는 ‘밴 플리트’의 작전에 말려 중공군 8만여 명 이상이 살상되었다. 이처럼, 미 공군의 육군 전방부대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은 전쟁 내내 이어졌다. 특히, 1951~1953년까지 2년간의 각종 치열한 고지 쟁탈전에도 매달 2,000~4,000여 회 이상 출격하였다. 보병 사단급에는 공군 연락장교가 상주하였고, 보병 중대 전투부대까지 공중지원을 받을 만큼 다양한 지상 작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적극적인 근접항공지원은 유엔군의 지상작전 목표달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작가의 이전글 전투 '프로' 중공군과 맞붙은 한국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