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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n 20. 2023

휴전을 앞둔 '고지 쟁탈전' (진지전)

** 6.25 전쟁을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엄청난 인명피해조차 마다하지 않은 '고지 쟁탈전'

화력 대 갱도의 전투’ -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진지전' 



엄청난 인명피해조차 마다하지 않은 '고지 쟁탈전'

1914년 10월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발발되어, 1918년 11월에 독일 등 추축국이 항복함으로써 종전이 된 제1차 세계대전은, 약 4년여의 전쟁 기간 동안 무려 1,700여만 명이 희생되었다. 특히, 이들 희생자 중에서도 독일과 프랑스가 격전을 벌인 ‘서부전선’(독일 측 입장에서는 서부전선)에서만 무려 300여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서부 전선' 중에서도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격전을 벌인 ‘베르당 전투’는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에만 무려 7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진지전’이었다. 


1차 대전 시 프랑스군의 참호

사실, 그 몇 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 양측은 참호를 파고 ‘진지전’을 벌였다. 그리고, 고작 수 백 미터를 전진하려고 엄청난 인명피해조차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여러 개의 버전으로 공개된 “서부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라는 독일 영화가 이런 내용을 일부나마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 내용을 보면 정확한 영화제목의 번역은 “서부전선에서는 새로운 게 아무것도 없다”라는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4년여 동안 전투가 벌어졌지만 죽이고 죽는 것 이외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 이는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에서도 ‘고지 쟁탈전’이라는 모습으로 이들과 비슷한 '진지전'이 벌어졌다. 1951년 중반, 중공군의 제5차 공세(기동전)가 유엔군의 화력전으로 종말을 맞이하자, 힘의 균형에 따라 38도 선에서 전선이 교착되었고, 전쟁의 양상이 변하였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미국과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중공은 쌍방 간 합의로 휴전 회담을 시작하였다. 


더불어, 그때부터, 양측 군 지휘부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고자, 전선의 모든 고지에서 방어진지를 확보하고, 탈취당한 고지를 탈환한다며 “이 고지를 확보하고저 고지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남발(?)하였다. 이에 따라, 동서 해안 230여 km의 접촉선 어디에서나 양측은 밤낮없이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일상처럼 전개하였다. 전투 방식은 주간에 국군과 유엔군이, 막강한 화력지원하에 정면공격으로, 목표 탈취 후에 재편성과 방어진지를 구축하면, 야간에는 중공군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회기동과 역습으로 다시 뺏는 양상으로서 1953년 7월 27일 정전 시까지 수많은 고지에서 이런 전투를 무려 2년 동안 반복하였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포격과 유혈이 낭자한 진지전에서 죽을 때까지 공격!”을 외치며 명령에 따라 반사적으로 몸을 던진 자유와 공산 진영 군인의 모습은, 수많은 청년들이 그저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명령에 따라 죽어간 제1차 세계대전 시의 비참했던 ‘참호전’의 ‘데자뷔’였다.


아래의 시에서, 조국을 위해 비장한 각오를 새겼던 당시의 우리 청년들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모윤숙)

...(중략)...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숨지었노라


내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과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하략)...


이처럼, 우리 젊은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의 전선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장기판에서 '장군', '멍군'일까? 중공군은 소리 없이 자신들을 그토록 괴롭히는 '화력전'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골몰하였다.

 

화력 대 갱도의 전투’ -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진지전' 

중공군의 제1~3차 공세 내내 연전연패하던 미군은,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위력수색’으로 국면전환을 도모하고, 제4차 공세에서는 화력전으로 '지평리' 전투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중공군의 약점을 인지한 미군이 대규모 ‘군수전’으로 적을 압박하고, 후임 ‘밴 플리트’도 항공과 포병 화력의 장점을 극대화한 ‘화력전’으로, '인해 전술'로 나선 중공군의 제4, 5차 공세를 물리치며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제, 중공군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강력한 화력전(항공+포병)으로부터, 마치, 장기판의 ‘차(車)’ 나 ‘마(馬)’가 체스판의 막강한 ‘킹’과 ‘퀸’을 상대하는 것처럼, 엄청난 화력 열세를 극복하고 생존성을 도모해야 했다. ‘기동전’만으로 전세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그동안 5차례 기동전을 주도하였던 중공군 제1 부사령관 ‘덩화’를 '군사 정전위' 대표로 임명하고,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에 응하였다. 그리고, 7월 11일 ‘덩화’에 이어 중공군 제2 부사령관으로 ‘천껑’을 임명하였다. 변화한 작전 환경에 따른 인사이동이었다.  


교착된 전선에서, 중공군의 작전을 지휘하는 제2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천껑’은, 전 전선을 돌아본 후, “정전회담이 시작되었으니 공격보다 방어에 주력하자”며, 미군의 화력에 견디려면 모든 지원군이 갱도에서 생활하는 것 외는 방법이 없다며 갱도 진지를 파자고 제의했다. 미군의 가공할 ‘화력전’에 대응하기 위해, ‘갱도전’ 전문가답게 진지보강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갱도구축’을 생존성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천껑’은 중국‧공산당 지하공작의 대가로, 국‧공내전 기간 ‘원난’성 군구 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군사위 부주석 ‘저우언라이’, 제4야전군 사령관 ‘린바오’, 장진호 전투의 제9병단 사령관 ‘쑹쓰룬’처럼 중공군 내 몇 안 되는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은 전술가였다. 특히, 그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싸우는 ‘호치민’의 고문으로 활약하며, 화력과 장비가 열세한 북베트남군에게 ‘땅굴을 파고 지하 병영화’를 권했던 인물이었다. 그 영향으로 '호치민' 군은 갱도작전으로 승리하였고...  


'천껑'은, 제3병단(12군, 15군, 60군) 사령관이었을 때, 그의 예하 부대였던 제15군(군장 ‘친지웨이(군단장급)’)이, 국‧공내전 말기 이미 갱도전으로 국민당군을 괴롭혔던 사례를 들었다. 사실, ‘친지웨이’의 부대는 1951년 여름에도 U자형 모양의 능선상 갱도를 파서 방어작전에서 큰 성과를 보았다. 그리고, '천껑'의 지시로 '친지웨이'는 전선 지역 갱도 진지 건설 중 가장 잘 구축되었다는 ‘오성산’ (상감령) 진지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갱도 진지의 약점은, 물은 물론식량 등 보급지원이 큰 문제라며 자체적인 반대 의견도 많았다. 그렇지만, ‘천껑’의 강한 건의로 ‘펑더화이’도 갱도를 택했고, ‘마오쩌둥’도 “‘고지를 지킬 수 있나없나?’ 하는 문제는 해결되었다답은 갱도를 파는 것이다우리가 이 층으로 굴을 파면상대가 공격하면갱도로 들어가고상대가 위층을 점령하면 우린 아래층으로 간다상대가 진지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반격한다우리는 이처럼 흙을 이용하여 대포에 대항하는 것이다상대는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며 갱도 공사를 승인했다.


중공군이 선전용으로 전시한 갱도 진지 내부 사진

마오의 승인을 받은 ‘천껑’은 즉각 갱도 건설을 전 중공군에게 지시하여, 정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 1952년 8월까지 1년여 동안 전방 각 고지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갱도용 진지 공사를 벌였다. 유엔군의 포격과 폭격 속에도 진지공사에 집중하던 중공군과 북한군은 어느덧 개미집 같은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중공군은 갱도 길이 198.7km, 각종 화기 엄체호 1만 2,000여 개, 유개호, 무개호 참호 650km의 지하갱도를 완성했다. (동서 해안과 각 방어선도 중요한 지역에는 콘크리트 진지를 구축하여 11월까지 기본 골격을 완성). 같은 기간, 북한군도 담당 지역 내 88.3km의 갱도에 엄체호 3만여 개, 참호길이 260km를 건설하였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km 길이의 모든 전선에 종으로 20~30km의 두꺼운 방어선에 땅굴을 거점으로 '거점식' 진지방어체계, 즉 '지하 갱도'를 완성하였다.


그러자, ‘고지 쟁탈전’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중공군 지휘부는 스스로를 만리장성을 구축한 민족으로 중공군 병사들에게 강한 자부심을 안기면서, 전 전선에 걸쳐 은밀한 대규모 진지 공사로 어느덧, 진지가 갱도로 진화하였다. '갱도 진지'는 보통 진지의 참호선 공사와는 달랐다. 이는 마치, 체류진지의 참호 속에 또 다른 갱도를 은밀히 구축하여 새로운 갱도 공간 속에 병력을 잔류시키다가 역습 시 협공에 참여하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이제, 이 변화는 교묘한 ‘진지전’으로서 화력 대 갱도의 전투로 진지전의 또 다른 모습으로 작동하였다. 


그리고, 1952년 10월 '오성산'의 하단 능선인 '상감령' 일대에서 6‧25 전쟁 3년간 전투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다는 저격능선’ 전투가 시작되었다.  ('상감령 전투' 이야기는 작가의 다른 글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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