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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n 21. 2023

6.25 전쟁 간 미-중의 전쟁 리더십

** 6.25 전쟁을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중공의 전쟁 리더십        

미국의 전쟁 리더십 


중공의 전쟁 리더십  

사상 처음으로 미‧중이 정면으로 맞붙은 한국 전쟁의 흐름을 바라보면, ‘전장의 주도권’은 기동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에게 있었던 게 아니라, ‘항미원조’를 내세우며 대규모의 병력을 출병시킨 ‘마오쩌둥’에게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러 관점에서마오쩌둥의 전략적 유연성과 용병술이 한국전의 흐름을 좌우하였다는 평가다. 그래서일까?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으로 엄청난 중공군이 희생되었지만,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부정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진 계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한국전에 참전하자, ‘마오쩌둥’은 북경 근교의 전쟁사령부 지하벙커에서 수시로 ‘펑더화이’에게 직접 전쟁지휘를 하였고,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도 몇 달간 평안북도 지하동굴에서 기거하며 목욕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전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결국 ‘펑더화이’는, 이런 게으름(?) 탓으로 피부병에 걸려 임무 도중에 본국으로 소환되기도 하였지만… 이념이나 피‧아를 막론하고, 전쟁지휘의 열정(?)만큼은 대단한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마오'가, ‘펑더화이’를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전, ‘덩화’를 제1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6‧25 전쟁 개전 초부터 만주에서 미군을 연구하게 하여, 기동전의 개념을 발전시키게 한 것은 놀라운 예지력이었다. 중공군이 참전 이후 5차례 대공세를 펼쳐 유엔군을 38도선 이남으로 몰아내었으니, ‘덩화’와 ‘워커’의 싸움은 ‘덩화’의 승리였던 셈이다.          

좌로부터 천껑, 펑더화이, 덩화

하지만, 기동전에서 중공군에게 밀렸던 유엔군이 '화력전'으로 적의 기세를 꺾고 가까스로 전선을 수습하며 군수전과 화력전 등 강력한 반격으로 대응하자, 38도선 어간에서 힘의 균형이 맞추어지며 51년 7월부터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고, 정전협정이 시작되었다. 이에, ‘마오’는 지금껏 공세적인 기동전의 주역이었던 제1 부사령관 ‘덩화’를 정전회담 대표로 임명하여 정전협상을 전담하도록 하고, 대신, 51년 7월부터 ‘갱도전’의 대가라는 ‘천껑’을 제2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구전에 대비하였다.


‘천껑’은 부임하자마자, 그때까지의 ‘기동전’ 위주 전술개념에서 탈피하여, 38도선 전역에 엄청난 ‘지하갱도’를 건설하여 ‘지구전’이라는 변화된 전쟁 양상에 대비했다. 특히. 그가 주창한 ‘지하갱도’는 미군의 화력 우세를 상쇄하고, 고지 쟁탈전에서 생존성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구축된 갱도 진지는 휴전 이후, 군사적으로 북한 정권 유지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런데, 중공군은 기동전을 성공적으로 펼치며 전과를 올렸지만 열악한 병참지원 능력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마오는 ‘펑더화이’의 건의로 개입 초기 제2 부사령관이던 ‘홍쉐즈’를 후방근무(군수지원업무) 전담토록 승인하였고, ‘마오’의 승인으로 중공군은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만주로부터 우선적으로 엄청난 군수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병참으로 대표되는 군수전에서 미국과 중국 간의 엄청난 국력 격차는 물론, 중국의 미약한 물자 생산능력 이외에 공급 및 수송과정에서도 제공권을 가진 유엔 공군에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중공은 미국에게 혼쭐이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중공군은 후방근무 부사령관 ‘홍쉐즈’가 전구급 군수전을 치르며 중공군의 전투지속 능력을 확충하면서 처음으로 현대전을 경험하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런 용병술은, ‘마오쩌둥’이 전황을 잘 예측하였다기보다, 결과적으로 ‘마오’의 결심이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한국전 개입을 놓고, 실리파와 강경파의 논쟁 끝에 전쟁을 택할 때 ‘마오’의 전쟁 준비는 주도면밀했다. 그는 양군이 처한 전장환경이나 미군 지휘관 경력이나 성격은 물론, 한반도 지형까지 꿰뚫고 있었다. 


특히, 작전적인 면에서 '장진호'에서 미 해병 1사단을 전멸시킬 작정을 한 것이나, 2차 공세 이후 지속적으로 38선 돌파를 독촉하였던 여러 지시를 보면, 군사에 대한 그의 동물적인 감각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군수물자 부족 사태에 대한 전방 지휘관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미그-15 기와 자동소총 및 기타 전투 장비에 대한 '스탈린'의 약속 이행을 독촉하여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작전 외적인 환경까지 조성해 주는 섬세함 덕분에, ‘마오’가 임명한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1950년 10월 참전이래 1954년 9월까지 4년간 부사령관들과 함께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에 맞추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지휘하였다는 평가다.


미국의 전쟁 리더십 

그런데, 이런 중국 지도부의 열정에 비해, 미국 전쟁 지도자들의 자세와 리더십은 많이 달랐다. 6‧25 전쟁을 돌아보면, 미국 지도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지못해 참전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는, 애초부터 소련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 대통령이, 서구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내세우며, 유럽방위에 우선하기 위해한국에서 국력과 군사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한 탓이다. 그는 한반도 ‘분쟁 당사자’로서 적극 개입보다, 그저 유엔의 일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전략을 막고 현상 유지’라는 명분에 집착한 정치적 계산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결국, 미군에게 한국전쟁은 미국의 전쟁이 아니고 유엔의 일부로 싸우는 전쟁이었다. 이 때문에 ‘주인 정신’과 ‘소통 원활’이라는 문제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계산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미국과 중국을 한국전쟁에 묶어 놓으려, 미국이 북한군 남침을 규탄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유엔군 파병안을 제안했을 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 파병안 통과를 수수방관하였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남침에 ‘허겁지겁’ 유엔의 깃발 아래 끼어든 미국은, 전쟁 내내 '38선 회복'이라는 ‘현상 유지’에 매달리며 ‘전쟁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수동적 자세로 일관하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막강한 육‧해‧공군력의 초강대국이었지만, 정치, 외교, 군사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대통령의 국가전략이처음부터 비기는 것이 전쟁목표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대통령의 국가전략에 따라, 합참 등 한국전 관련 미군 수뇌부의 군사전략도 ‘38도선 회복’이었다. 애당초, 한국민의 염원인 “군사적 승리와 한국통일”의 목표 따위는 없었다. 맥아더는, 적극적인 입장을 주장하였지만…. 전쟁 초기부터, 한국 전쟁에 소극적인 통수권자 ‘트루먼’ 대통령과, 한국전쟁의 군사적 승리가 바로 유럽방위라며, 군사작전에 적극적인 야전사령관 ‘맥아더’ 장군과의 ‘소통’ 부재와 감정적인 대립으로, '원자폭탄 사용', 만주 폭격, 중국 해안봉쇄, 중국 국민당군 투입 등의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이 방향성을 잃고 군 지휘체계도 혼선을 빚었다.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에, “유엔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였고, 미국도 ‘침략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유지한다’고 발표하였으니, 이에 맞추어 ‘만주 폭격’ 등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트루먼’과 합참은 중국 본토 공격을 포함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기보다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에, 맥아더는 대통령이 비기는 전쟁을 위하여 미군 병사들을 희생시키는(Die for Tie)’ 이상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물론, 전쟁을 지휘하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도 일본은 본부한국은 야전이라는 개념이다 보니, 한국 전선에서 1,000km 떨어진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 일상업무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총사령관이라면 당연히 지형을 알고, 그곳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 지휘관과 그 부대의 움직임을 알아야 했지만, 너무 정보가 부족했고 멀리 있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무색했다. 그 결과, 전쟁의 복잡다단성에 비추어 볼 때, 총사령관의 지리적 분리로 인한 현장 감각부족으로 오판을 하거나 현장과 동떨어진 지휘 결심을 내리기도 하였다. 


'트루만' 대통령은 전쟁에 일일이 간섭하는 '마오쩌둥'과 많이 달랐다. 민간인 정치가 출신인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제공하던 한국전쟁이었지만, 이는 수많은 일상 업무 중의 하나에 불과하여, 미 합참을 통한 전황 보고만 간간히 보고 받을 뿐이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연합국 지도자들 간의 소통도 중요한 일인데, 트루먼은 한국의 이승만과는 별다른 소통수단도 강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김일성이나 중공의 ‘저우언라이’는 전쟁의 주요 국면마다 수시로 ‘스탈린’을 찾아 후원자인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물론, ‘북진통일’을 추구하던 이승만과, 공산군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추구하였던 ‘맥아더’는 이상적(?)인 파트너였지만,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관계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마오쩌둥’의 당부에 성질 급한 ‘펑더화이’가 많이 인내하는 정도로 보인다. 아무튼, ‘맥아더’나 ‘펑더화이’ 모두 각국 군의 최고 계급인 ‘원수’급이었던 걸 고려하면, 민간 정치인 이승만이나 소련군 소좌(소령) 출신의 김일성에게 미, 중 후원국들은 나름대로 예우(?)를 해 준 셈이다.


전반적으로, ‘전략적 유연성’이 결여된 '맥아더' 등 미군 고위층의 대응은 오히려 공산 측에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뻔한 논리뻔한 전법으로 상대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까?” 승리에 길든 자만은 사고의 경직을 가져온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맥아더’의 해임은 너무 늦은 측면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평생 1차, 2차 세계대전 등에 참가하여 엄청난 전쟁경험과 경륜을 갖추었고, 한국전쟁 초기에 ‘인천상륙작전’ 성공 등으로 기세를 올렸지만, '덩화' 등 중공군 지휘부는 이미 그를 너무 많이 연구하였다. 중공군 참전 이후,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은 전혀 낯선 중공군을 대할 때, 잦은 오판을 반복하며, 중공군을 상대하기에 벅찬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미국 조야는 여전히 그의 전쟁경험과 과거의 찬란한 전적에 매달리다, 결국 실기를 하고 낭패를 당했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미 국방부는 이를 높게 보지 않았지만, 미 국무부는 동서 이념대결에서 한국전쟁의 ‘정치적 가치’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이 소련이 아니라 2~3류 정도인 중공과 북한에게 밀린다는 사실이 곤혹스러웠다. '트루만'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서 연승을 올리자, 한국전에서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갖는 것도 어렵고그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대신’을 모색하던 ‘트루먼’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였다. 이는, 전쟁은 조건 없는 승리로 끝나야 한다는 전통적 견해에 반하여, 전쟁은 조건 있는 휴전으로 끝날 수 있다는 새로운 ‘전쟁과 승리에 대한 견해’를 갖게 해 준 사건이었다.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는, 세계 제1, 2차 대전 등에서 보인 총력전의 개념과 달리,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한전이란 개념에 익숙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했다. 그는 완전한 승리나 무조건 항복을 추구하는 무제한전쟁은 다수 국가가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가진 상황에서 상호 공멸할 수 있다며, 국익과 군사력을 고려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제한하는 '제한전'의 개념을 내세웠다. 결국, 트루먼 행정부는 ‘결정적인 승리가 아닌, ‘명예로운 휴전’ 정도로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맥아더’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맥아더'보다, '리지웨이'의 결단력과 혜안은 날카로웠다. 중공군이 서울을 목표로 제3차 공세를 감행하자, 그는 과감하게 서울을 포기하고 병력을 보존하여, 단계별 '위력수색'으로 역전을 도모하였다. 또한, '지평리' 전투를 치르며, 적의 약점을 간파한 리지웨이는, 영토회복보다 적의 역량파괴에 주력하라”라고 지시하였다. 굳이 38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가 북한 영토를 회복하는 것보다, 오히려 38도선까지 신장된 적의 병참선을 끊임없이 공중폭격하여 물자 부족을 유도하고, 수시로, ‘강습 위력작전(위력수색)’으로 전장을 초토화시키고, 파상공세를 펼치는 중공군을 강력한 화력으로 타격하여 인원, 장비 피해를 강요하려 하였다. 


그의 전술은, 적 수뇌부로 하여금 미국과 전쟁을 마냥 지속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려 하였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리지웨이’는 유엔군의 사기 회복과 전술적 승리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인 ‘38도선 이남 수복지침’을 지키면서 중공군에게 휴전을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북진통일을 염원하던 국군의 ‘38선 이북 전진’을 제한하며, ‘트루먼’의 의도대로 현 전선에서 휴전으로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리지웨이'에 이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임자 ‘리지웨이’와 달리, 한국인의 정서를 존중하여 수도 서울의 방위에 치중하였다. 그리고, '밴 플리트'는 적의 '인해전술'에 대해서,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을 가동하여 중공군이 다시는 기동전을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군 재교육과 재무장을 주도하였다. 화력전 수행에 비록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적의 피해로 그 효과를 입증하였고, 한국군 10개 보병사단을 장비하는 지원책도 엄청난 물동량과 예산이 요구되지만, 군 내부의 이견을 누르고,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장비시켜 전장의 주역으로 활용한다는 대명제로 모두의 동의를 구하였다. 


‘펑더화이’가 한국전쟁 3년 내내 전략적 책임을 지고 전쟁 양상에 따라 부사령관들을 유연하게 운용한데 비해, 유엔군/극동군 사령부는 지휘부가 자주 교체되었다. 그렇지만, ‘맥아더’가 해임된 이후 ‘리지웨이’나 ‘클라크’ 등 현장 지휘관들은 주요 전장사태 대응 시 미 합참과 협조하며, 중공군의 거친 공세에도 ‘군수전’이나 ‘화력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확전보다 ‘명예로운 휴전’을 위한 ‘트루먼’의 지시에 충실하였고, 전쟁의 흐름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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