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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n 22. 2023

한국군 재교육과 재무장 ESG

** 6.25 전쟁을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밴 플리트'의 한국군 재교육과 재무장

미군의 지속적인 한국군 증강 정책



'밴 플리트'의 한국군 재교육과 재무장

미군은 중공군의 1~5차 공세 때마다 연전연패하는 국군의 전투력 부실에 고민했다. 1951년 4월, ‘리지웨이’에 이어 미 8군 사령관이 된 ‘밴 플리트’는 부임하자마자, 맞이한 중공군의 4월과 5월의 제5차 공세를 엄청난 ‘화력전’으로 저지하였지만, 유독 중동부 전선 국군 3군단이 무참하게 와해되는 등 중공군에게 ‘형편없이’ 당하는 국군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 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방어를 하다가도 중공군만 만나면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지는 한국군을 보며, ‘밴 플리트’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훈련을 시켜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졌다. 미군이 강한 이유는, 장비의 우수성도 있지만, 훈련과 전투경험이 많은 군대로서 문제점이 있으면,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5차 공세 종료 이후, 38선 일대를 중심으로 전선이 안정되고, 휴전 논의가 이어지자,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의 승인과, 한국 정부의 동의로, 전투 중인 국군 10개 사단 재교육 계획을 발표하였다. 한국군 전 부대가 전투 중이지만 1개 사단씩 빼내어 사단 전원을 재교육시키고, 교육을 마친 사단은 전차와 포병으로 무장시켜 다시 전선으로 내보낸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재교육 해법은 당시로서는 다소 독특하였다. 그는 먼저, 국군의 전투능력, 즉 어떻게(How) 싸우는지?’로 전투 환경별 대응에 고민하였고, 다음으로는, (Why) 싸워야 하는지?’ 명예와 책임이라는 국가, 사회적 요소에 대한 일깨움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으로(What) 싸우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마치, 2020년도 회사 경영의 최고 화두로 떠오른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얼핏 보면 유사하다.


먼저, 다양한 전투 환경에 어떻게(How) 싸우는지?”를 훈련하기 위해, 미 8군은 예하 미 9군단에 야전훈련센터(FTC)를 설립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부사관 150여 명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군단의 예비로 전환되는 국군 1개 보병사단씩을 교대로 9주간 입소시켜 사단장 이하 이등병까지 미군 장비 조작 교육, 개인훈련부터 대대 훈련까지 미군 전술훈련기법을 가르치고, 국군을 미국식으로 교육시켰다.          

사단장부터 이등병까지 집체교육 중 국군사단

이를 통해, 국군 장병들은 비로소 미군 장비로 미군식으로 싸우는 법을 훈련받았고, 위관급 장교는 미군의 지휘자 양성체계를 모방하여 전쟁 초기 ‘작전상 후퇴’로 와해된 보병, 포병, 전차 등 각 병과학교를 정비하여 병과의 기능, 역할, 기술교육, 상하좌우 관계를 이해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리고 당장, 전투 수행에 필수적인 인원들을 단기 코스로 교육을 이수시켜 전선으로 내보내는 한편, 전쟁 기간 중임에도 미국 보병학교와 포병학교 등 미국군 교육기관에 약 2,200여 명의 국군 장교를 위탁교육으로 교대로 파견하였다.


그다음, ‘밴 플리트’는 각 병과학교에 개설한 군사학 과정에서 간부들이 (Why) 싸워야 하는지?” 등 국가와 민족, 명예심 배양 등 국가관과 군인정신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중공군의 공세 때마다 ‘꽁지를 내빼던’ 국군 간부들의 전투의지를 고양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기적인 정규군 간부양성을 건의하여 국가, 임무, 명예 등에 중점을 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본뜬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정신과 군사지식을 함양한 인재를 양성하도록 지원하였다(1951년 10월 4년제 육사 개교).


마지막으로, 그는 지휘관과 참모들이 무엇으로(What) 싸우는지?”를 알게 하려 하였다. 전장에서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혼자만 살려고 도망치는 지휘관들에게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있을까국민의 지지가 없는 국가나 군이 어떻게 지속가능할까?”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철저한 자기희생과 헌신이 바탕이다. 전장에서  혼자만 살겠다며 도망치는 모습은 개인적인 불명예는 물론, 국민과 국가 모두를 공멸케 한다. 장군이든, 병사든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한 명예가 더 크게 와닿는 이유다.


또한, “무엇으로 싸우는지?”의 문제는, 구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잔재로서, 지휘관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는 의사결정 과정을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하여 미국식의 ‘지휘 및 참모활동’ 절차에 따르게 하고, 능력이 제각각인 영관급 참모들의 역량 강화로 하급 제대와 각 기능 간 유기적인 전투력 운용능력을 배양하려 했다. 사실, 지휘관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이처럼, 사단 전원이 야전훈련센터(FTC)에 입소하여, 일정 기간 전투훈련을 실시한 후, 일정 수준에 합격하면, 미군은 국군이 갖고 싶어 하던 전차와 105밀리 곡사포 등 화력 장비는 물론, 많은 전투차량에 더하여 막대한 양의 탄약까지 지원하여 전방으로 다시 배치하였다. (다만, 155밀리 포와 같은 중화기를 작은 체구의 한국군이 다룰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고, 적에게 빼앗길까 봐 염려하여 보급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미군이라지만 단시간에 한국군 10개 보병사단을 장비하는 지원책은 그야말로 엄청난 물동량과 예산이 요구되어, 미군 내부적으로도 이견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장비시켜 전장의 주역으로 활용한다는 대명제에 모두 동의하자, ‘밴 플리트’는 한국 정부로부터 국군 사단의 병력증강을 지원 받았고, 일본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로부터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총포류, 공병장비, 통신장비, 피복류 및 차량과 탄약, 유류 등은 군사 물자의 일환으로 한국군에게 직접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런 교육과 재무장은 곧 바로 결실을 맺었다. 국군은 양측이 휴전협정 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할 때, ‘용문산’, ‘백마고지’ 등의 여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결사항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는 등 국군의 용전분투는 곳곳에서 그 빛을 발하였다. 중공군 공포증을 넘어선 것이다. 


미군의 지속적인 한국군 증강 정책

그런데, ‘밴 플리트’는 그 이후에도 10개 사단 외에 국군의 병력과 화력 증강을 계속 진행하여, 1952년 말에 국군은 46만 3천여 명으로 증강되었는데, 1953년 1월, 때마침 새로 출범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전 조기 종결’, ‘주한 미군 감축’과 ‘국군 강화’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워, ‘밴 플리트’의 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덕분에 국군의 기동력과 화력, 훈련수준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이런 노력으로, 국군은 휴전을 전후하여, 정규 18개 사단으로 증강되어 오늘날과 같은 군구조로 자리 잡았다. 국가 수립 불과 5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갓난아이’ 같은 국군을 세계 최강의 군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밴 플리트’ 장군을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극찬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처럼 한국을 위해 공헌하여 칭송을 받았지만,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던, 그의 외아들이 1952년 4월 북측 지역에서 격추되어 실종되는 아픔도 겪었다. 휴전 이후, 한국 정부는 미군이 군사원조로 지어준 육사 도사관 앞에 동상을 건립하여 그를 기렸지만, 세월이 지나 모두의 기억에서 흐려지자 그의 동상은 육사 내 가장 한적한 곳으로 밀려났다. 


1992년, 뒤늦게나마 ‘코리아 소사이어티’라는 한‧미 친선 단체가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밴 플리트’상을 제정하여, 한‧미 양국관계 증진에 기여한 인사들을 찾아 수상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헨리 키신저’와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얼마 전에는 BTS 등이 수상하였다. 


그런데, 국군은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북진통일’이 전쟁목표였다. 때문에,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훈련과 장비를 보강받으면서도 계속 북진을 주장하고 북한 탈환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38도선 회복에 만족하고 확전을 원하지 않는 미국은 이를 철저히 말렸다. 결국, 1953년 휴전협정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국 측이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휴전’ 자체를 거부하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서 당사자에서 제외되었다. 거기에 따른, 한국에 대한 불신으로 미국의 군사원조는 한동안 방어용 무기체계 제공에 국한되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한 남, 북한의 군사력 발전과정은 매우 달랐다. 1951년 7월, 휴전 회담이 진행된 이후, 공산군은 ‘갱도 진지’로 생존성 향상에 치중하였지만, 강력한 화력을 가진 미군의 지원을 받는 국군은 교육 훈련 향상에 중점을 두었다. 종전 이후에도 이 기조대로, 양측의 군사적 지향 방향은 달랐다, 북한은 독자적인 전쟁을 기획하며 땅굴, 재래식 무기부터 핵 개발까지 나아갔지만, 한국군은 작전권보다 연합전력에 의존하며, 미국식 최 첨단 전투기법을 이용한 각종 전쟁연습 등 교육훈련으로 병력들의 전술전기 연마에 치중하였다.           

미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교육받는 한국군 장병들

후일담이지만, 신생 독립국이 강한 전투력을 지닌 강군을 육성하려면 많은 비용과 오랜 시간에 걸친 엄청난 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뜻밖의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당시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국인 미군으로부터 미국식 군 편제와 무기, 물자 그리고 군사 전술 교리 등을 직접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새롭게 무장하였다. 그리고 연일 계속되는, 전투에서 ‘전투 프로’ 중공군과 교전하는 가운데 중공군 전술교리도 덩달아 익혔다. 미‧중이 싸우는 통에 ‘졸지’에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군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유엔 평화유지 임무나 국방무관 등으로 여러 나라 군을 접하였지만, 우리 군대만큼 단련된 군대는 없었다. 


국군의 전투력은 베트남 전쟁에서 확인된 바 있다. 덕분에, 국군의 증강 사례는, 미국의 글로벌 군사전략에서 ‘자국군 능력강화’로 미국의 부담을 덜려는 구상의 모범적인 모델로 자주 소개된다. 과거 중국 국민당 군대나 자유 베트남, 그리고 이라크, 아프간 붕괴 사례에서 보듯, 부정부패한 군이나 무능한 정권에게 아무리 수십 년간 수백조 원을 투자하더라도 결코 강군이 될 수 없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군대는 미국의 대규모 군사원조로 순식간에 수백만의 대군으로 성장하였지만, 부정부패로 국공내전에서 패전을 거듭하다 대만으로 쫓겨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군사 강국 중의 하나로 급속한 군사적 발전을 이룬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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