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웅 Jun 23. 2023

전승의 '요체' 민심 잡기, 민군관계

** 6.25 전쟁을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민심(民心) 잡기     

중국의 전쟁지원 방법: 열렬한 전쟁 물자지원 운동

미국의 전쟁지원 방법“: 국민의 ‘알 권리’와 전장 보안

민군관계의 기본은 국민 존중의 자세



민심(民心) 잡기

1921년 창설된 중국‧공산당은 ‘중국 인민’의 이익을 표방하였다. 비록, 1918년의 러시아의 ‘노동자농민’ 계급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전제 군주제였던 청조(淸朝)의 멸망으로부터 불과 10년도 안 된 시점에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무기력한 무산 계층(프롤레타리아)인 ‘인민’을 위해, ‘잘 사는 삶(샤오깡)’과 ‘평등’을 내세웠던 것은 과히, 혁명적인 ‘사고의 변화’였다. 그리고 이런 이념적 변화는 집권층의 무기력과 악습에 의해 더욱더 빠르게 민중들에게 확산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숱한 왕조시대는 안정기를 지나 혼돈기에 이르면 ‘무력에 의한 군림’이라는 통치 방식이 이어졌다. 혹,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토벌군은 점령지를 수탈하였고, 거주민에 대한 억압과 횡포가 이어졌다.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은 가장 거대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뿔뿔이 흩어져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관의 무자비한 폭력에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국민당을 내세운 ‘장제스(將介石)’ 군대도 그런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번 공산당이 점령하였으면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따랐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통치수단이 야비했고, 잔인했다. 결국, 민심을 잃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인민은 물이고군대는 물고기라고 강조했다. (그를 칭찬한다기보다 저들의 주장을 그대로 기술하였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현지민의 지지 없이 어떤 군대든 승리할 수 없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도(道)의 근본은 민심이었다. 그는 승리의 요체를 알고 있었다.


'3대 기율 8항 주의'를 외치는 중공군 

‘마오’는 한때 군세가 약하여  ‘장제스’군에게 쫓기며,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정(長征, 1934~1935)’으로 1만 여리를 도주하였다. 그는 한없이 쫓기는 동안에도 당권을 장악하고, 지나치는 지역의 민심을 얻는 데 치중했다. 기본적으로 농민 출신인 ‘마오쩌둥’의 ‘홍군’은 자체적으로 사상적 무장을 강화하며, 민중에 대한 일체의 약탈을 금지하였다. 어쩔 수 없이 주민 신세를 지는 경우, 반드시 중공군이 발행한 ‘전표’를 주고, 혁명이 완성되면 몇 곱절 되갚겠다며 다짐하였다. 약탈은 아니라는 거다. 이는, 이른바, ‘3대 기율, 8항 주의(主意)’라는 인민해방군의 행동요령에 따른 것으로,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관료나 지주로부터 천대받던 일반 중국 인민들로서는 그 당연함을 열열이 지지하고 칭송하였으며, 이런 신뢰는 곧 ‘마오’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민군 관계에서는, ‘상대 읽기’가 중요하다. 한 가지 덧붙이면, 1950년 10월 25일 불법 입경하여 북진하던 미군과 유엔군을 기습했던, “항미원조”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 조선의 일초일목(一草一木), 일산일수(一山一水)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라며, 설령, 미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더라도 조선의 엄격한 미풍양속을 존중하라”라고 지시하는 전문을 받았다. ‘마오’가 조선 민족의 정서를 고려했다기보다, 민중의 지원을 얻기 위한 오랜 전쟁경험에서 우러나온 전략적 지시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중공군 지도부는 ‘항미원조’ 입대자들이 조선에 입경하기 전, 애국주의, 혁명 영웅주의 교육으로 그들의 열정과 사명감을 북돋우는 한편, 조선 민중에 대한 정치공작을 강조하고, ‘마오’가 1928년 이래 강조하여 온 ‘3대 기율, 8항 주의(主意)’를 교육시켰다. 예컨대, 1951년 1월 25일, ‘펑더화이’는 중‧조 양군 간부회의에서 이를 다시 강조하였고, 중공군 제2 부사령관 ‘훙쉐즈’는 간부들에게 전쟁 이후 조선 민중이 우리를 혐오하지 않도록우리 병사들에게 정치교육에 힘쓸 것을 당부한다병사들에게 아랫도리’ 조심하고대소변 아무 데나 갈기지 말고침 함부로 뱉지 말라는 것부터 가르쳐라”라고 강조했다. 이는 일종의 작전수칙으로, 현지 인민 존중, 학교, 문화 명승지 보호, 민가출입 금지, 교회나 사찰에 간섭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면에서 중공군은 우리 군이 참고할 부분이 많은 군대였다. 중공군은 전투 외에, 대민관계에서도 단련된 규율과 기강에 엄격하여, 우리 군 고위인사도 비록, 적이었지만 이처럼 엄정한 중공군의 군기를 인정하였다.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에게, 중공군은 철천지원수였지만 한편으론 놀라운 상대였다. 무모하게 ‘인해(人海) 전술’만 구사한다는 이미지는 잘못이라고 백선엽은 술회한다. 중공군은 교활하고 영리하면서 침착하기까지 한 강군(强軍)이었다. 백선엽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엄격한 군기(軍紀)였다. "중공군은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가능한 한 민가에서 숙영(宿營)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머물더라도 깨끗이 정리하고 반드시 화장실까지 청소한 뒤 떠났다."  (백선엽의 '6.25 징비록' 중)   


중공군은 비록, 적이지만 지휘부부터 여성 문제에 엄격하고, 주민들과의 행사 등으로 현지인에게 다가갔다. 미군들도 이들 못지않게 열성으로 현지인 친화 작전을 수행했지만 방법적으로는 조금 미진했던 것 같다. 

21세기 이후 미국이 참전한 전쟁은 모두 해외 원정이었다. 6‧25 전쟁 당시, 갑작스레 징집된 미군 병사들이, ‘트루먼’ 대통령이 바라는 만큼, 높은 전술전기와, ‘자유와 반공’의 사상 무장도 갖추었을까?

 

한국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미군들

대부분 미군 징집병들은 전투 임무에 충실하였지만, 일부는 민군 관계에서 무례, 무지, 다양성 이해 부족으로 현지인과 잦은 문화 충돌을 빚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렀던 유럽이야 문화, 종교가 유사하여 별로 어려움이 없겠지만, 전쟁이 아시아 등 유럽외 지역으로 확대되자 가치관이 다른 현지인에 대한 무지는 이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특히,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일부는 물질을 탐하거나 여성 희롱, 폭행 등 ‘성’ 범죄나, 매춘조차 ‘사생활’이라며 성적으로 문란한 모습을 보였다. 


휴전 이후, 북한에서는 전쟁 동안 조선의 풍습과 법규를 해친 중공군 군인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곡식이나 가축을 함부로 해치거나 부녀자를 겁탈한 경우였다는데.. 중공은 이런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국 군인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북한 정권에게 넘겨 이들을 처벌하도록 하였다. 이 부분은 우리가 한‧미동맹을 더욱 가치 있는 동맹으로 성장시키려면 반드시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지만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미국의 자세는 완고하기만 하다.


참고로,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진주하자, 1950년 7월 12일 대전에서, ‘주한 미군범죄에 대한 형사재판권에 관한 협정(약칭 ‘대전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전시’라는 점을 고려, 정부는 미군의 일방적 형사재판 관할권을 인정하였다. 전쟁 중 체결된 협정이 휴전 이후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시 그대로 적용되어, 주한 미군과 그 가족의 법적 지위가 너무 높았다. 하지만, 주한 미군의 강력 범죄행위에도, ‘대전협정’상의 불평등 조항 개정 협의는 수십 년간 지지부진하다가, 1991년 2월 1일 독소조항이던 ‘형사재판권 자동포기’ 조항을 폐지하였다.


한편, 현지 문화에 대한 존중도 문제였다. 혹독한 무더위와 추위로 기후마저 악명이 높았던 열악한 자연환경 외에 한국의 재래식 농사방식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문화 충격이었다. 한국의 농촌에서 거름으로 사용되던 ‘인분 냄새’는 미군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그들이 그 냄새를 얼마나 역겨워하였는지,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조차 공개 석상에서 불평했을 정도였으니…. 미군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중공군 참전이래 연전연패로 승리에 목마른 미군은 목전의 승리를 위해 엄청난 항공, 포병 화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국의 각종 문화유산도 잿더미가 되었다. 중국이나 유럽에 비해 문화재가 왜소하게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문화재조차 전쟁으로 파괴된 모든 것은 승리 뒤에 복구한다는 확신이 있었을까? 미군이 시행한 ‘청야전술’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다’며 한국의 산야와 문화재는 엉망이 되었다. 

                                                                                  

반쪽이 날아가 버린 수원성(장안문)                                                  누각이 없어진 광화문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점령한 세계적 문화유산이 가득한 프랑스 수도 ‘파리’를 철수하며 불태우려는 시도를 모면한 스토리를 소재로 제작한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Is Paris burnning?)’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미군 등 많은 서구인은 현지의 유명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지만…, 한국전에서 그들은 우리 문화재에는 무심했고, 목록조차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지역 폭격의 희생물이 되었다.


어쨌든, 상식을 초월한 이념과 물자 전쟁에서 비이성적, 비인간적 전투를 치르며, ‘공산군 격멸’을 외치던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에게 갑작스레 해임당하면서, '철저한 군인'이었던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부임한 지 불과 100여 일만에 직을 떠나,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후임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떠났다. 미 8군 사령관은 육군 지휘관이지만, 유엔군 사령관은 육, 해, 공군 및 외국군 참여부대 모두를 지휘하는 자리다.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미 8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약 100여 일 동안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경험하며, 중공군의 약점이 길게 신장된 병참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중공군 병참선 차단에 집중적으로 나섰다. 

‘리지웨이’ 사령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미 해‧공군기 500여 대로 ‘합동 특수기동군’을 편성하여, 북한 내 정치, 군사 목표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1951년 말부터 ‘후방차단작전’과, ‘집중폭격’으로 적의 전력을 파쇄하고 전의를 분쇄하려, 나진항 폭파, 수풍, 부전, 장진, 허천 발전소 등을 공폭에 이어, 52년 7월, 평양 대폭격에는 무려 822대의 항공기를 3파로 나누어, 11시간 동안 1,400여 톤의 폭탄과 2만 3천여 톤의 네이팜탄으로 평양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북한 지도부를 압박했다. 당연히, 북한의 민심은 흉흉하여졌다.


중국의 전쟁지원 방법: 허리띠 졸라매며 열렬한 전쟁 물자지원 운동

한국전 개입 이래 ‘기동전’을 전개하며 전술적으로 승승장구하던 중공군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열악한 보급지원 체계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공군 후방지원 부사령관에 임명된 ‘홍쉐즈’는, 중국과 만주의 지도부에게, 전쟁과 군수의 어려움을 알리며 호소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즉각 중국 전역에 ‘항미원조 총위원회’를 결성하고, 인민들에게 중공군을 위해 "각종 위문품과 화포 및 비행기를 보내 주자"며 봉급 자진반납 등을 독려하였고, 대부분 노동자, 농민들은 생활비를 절약한 돈으로 군용기 등 무기 구입에 써 달라며 현금을 헌납하였다. 


가난한 중공으로서는 조선 전쟁을 지원한다며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전개하였던 전국민적인 전쟁물자 수탈행위와도 다를 바 없는 애국(?) 운동의 미명으로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강요한 셈이었다. 그 결과, 적어도 항공기 약 3천여 대를 구입할 금액을 모금했을 정도로 거국적인 지지열풍을 몰고 왔었다. 이러한 인민들의 참여는 강압적으로 윽박질렀다기보다 오랜 시간 공산당이 인민에 대한 신뢰를 다져 온 결과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3대 기율, 8항 주의’ 등으로 ‘마오’는 ‘민심을 얻는 법’을 알고 있었다. 


국공내전 이전부터 중공군들은 전투준비를 위해 필요한 인민들의 물자를 징발할 때도 반드시, 나중에 돌려드린다는 전표 등을 발급하여, 그저빼앗긴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였으니까…. 어쨌든, 이러한 중공 정부와 인민들의 지원으로 전방 지역 군수지원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었다.        


미국의 전쟁지원 방법“: 국민의 ‘알 권리’와 전장 보안

그런데, 경제력이 월등한 미국에게는 보급지원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다른 측면의 ‘애정’ 표시인 국민의 날카로운 비판과 ‘알 권리’가 문제였다. 특히, ‘전장 보안’에 대한 미국 측과 중국 측의 관점은 매우 달랐다. 미국은 민주주의국가였고,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라며 정책적인 부분도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하지만, 전체주의 중공은 철저한 비밀주의였으니 이점은 어떤 면에서 전쟁 수행에 강점일 수도 있다.


맥아더 사령관과 트루먼 대통령

1951년 4월, ‘트루먼’에 의해 전격 해임된 맥아더는 그 특유의 파이프와 검은 선글라스 차림으로 수많은 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귀국하였다. 미 의회는 맥아더 해임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상하원 합동청문회’를 시작하였다. 청문회가 이어지자, 미국의 한국전쟁 목표가 맥아더가 주장하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협상을 통한 평화에 두었다는 ‘트루먼’의 의도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문제는 그때부터 이어졌다.


그렇게 미국 언론이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트루먼 대통령의 패를 까놓고 있을 때, 미‧중 간에는 한국전쟁 정전협상이 시작되었고…, 미국 언론들이 미국의 ‘속내 알리기’에 열중하였지만, 미국의 패를 다 읽은 공산군과의 정전회담 결과는 참혹했다. 이에 대한, ‘핸리 키신저’의 평가는 날카롭다. 휴전협상이 막 시작되었을 때… 군사작전을 중지함으로써… 미국은 중국인들이 타협을 원하게 만들 수 있는 카드를 스스로 없앴다. 2년 동안 지루한 협상으로 좌절감을 맛본 것은 미국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중국의 철저한 비밀주의에 대하여미국의 ‘알 권리’가 참패한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상하원청문회는 ‘트루먼’의 손을 들어줬지만, 청문회에서 대통령이 기껏 일개 장군 출신 정적에게 승리하는 대가로 미군 수만 명이 더 희생되었고 수천만 한국민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한반도 전역이 초토화되었지만, 전선은 ‘상처만 입은 채’ 도로 38선이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전쟁 결정은 대통령이 하지만 전쟁은 국민이 치르는 것이니 만큼, 언론의 힘과 영향력이 대단하다. 특히, 전쟁 종군 기자들은 전투 중의 ‘전장의 실상을 국민에게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전장에 동반하는데, 이들이 보내는 기의 문장 한 줄 한 줄, 사진 한 장 한 장에 따라 국민 여론이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예컨대, 1952년 '상감령' 전투에서, 삼각고지를 공격하던 미 제7사단의 엄청난 피해가 보도되자, 무의미한 병사들의 희생을 중단하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미 8군은 7사단의 작전을 중지하고 국군에게 넘긴 후, 철수하여 버렸다. 덕분에, 중공은 이런 일을 기화로 승전이라며 더욱 기세등등하였고….


민군관계의 기본은 국민 존중의 자세

전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미 육군은 항상 여론의 추이에 매우 민감하다. 이는 국민의 군대가 갖는 소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급 군사학교에서는 재학 중인 학생장교들에게 기자들에 대한 자료제공으로부터 인터뷰나 대담 내용, 제스처 등 ‘미디어에 접근하는 방법’을 체험적으로 교육시킨다. 말실수를 줄이고, 국민과 공감하며, 진정성을 보이는데 주안을 둔다. 여기에는 엄격한 규칙과 세세한 기법이 뒤따른다.


이처럼, 국민의 군대를 자임하는 우리 군인들에게도 ‘언론과의 소통을 국민과의 소통’으로 알고 대민소통 역할을 적극 교육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 군인들이 브리핑하는 걸 보면, 사전 철저한 교육이 없어서일까? 딱딱하고 어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군인뿐 아니라 고위 공직자들도 미디어 앞에서는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신문 기자들 앞에서 말실수를 의식해서인지, 사전에 작성된 문서를 낭독하거나, 정확성을 기한다며 기자의 질의 내용도 미리 제출하게 하여 답변을 만들어 보고 읽는 식의 대국민 보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는 대국민 진정성이나, 전문성 그리고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어설픈(?) 모습들은 독재국가나, 후진국으로 갈수록 그 경직성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그런 후진국에 비하면, 우린 자칭 선진국인데…. 아무튼, 민군관계에서는 국민 존중의 자세가 최우선이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군 재교육과 재무장 ESG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