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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1. 2023

한국전쟁 간 “미-중 양국 지도부는 비기길 바랐을까?”

*분단을 고착화하여 민족의 한이 맺힌 7.27 휴전협정 서명이 벌써 70주년을 맞았다. 이를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승리’와 ‘명예’의 가치를 저울질하였던 미국

중국의 자신 없는 전쟁 지속능력



‘승리’와 ‘명예’의 가치를 저울질하였던 미국

전쟁은 국가 주도로 수행하는 것이며, 목적은 ‘승리’하는 것이다. 이런 틀에 비추어 보면, 국가 지도자가 ‘국가 전략’으로 ‘전쟁 목표’를 설정하면, 군부는 지도자의 ‘전쟁 목표’에 맞게 ‘국방(군사) 전략’을 수립하고, 예하 부대들은 ‘군사 전략’에 따라 싸우는 방법(How to fight?)”을 결정하고 그대로 정교하게 시행하면 된다.


그런데, 6‧25 전쟁을 돌아보면, 미국 지도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지못해 참전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는, 애초부터 소련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 대통령이, 서구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내세우며, 유럽방위에 우선하기 위해한국에서 국력과 군사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견지한 탓이다. 그는 한반도 ‘분쟁 당사자’로서 적극 개입하기보다, 그저 유엔의 일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전략을 막고 현상 유지’라는 명분에 집착한 정치적 계산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계산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미국과 중국을 한국전쟁에 묶어 놓으려, 미국이 북한군 남침을 규탄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유엔군 파병안을 제안했을 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 파병안 통과를 수수방관하였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남침에 ‘허겁지겁’ 유엔의 깃발 아래 끼어든 미국은, 전쟁 내내 '38선 회복'이라는 ‘현상 유지’에 매달리며 ‘전쟁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수동적 자세로 일관하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막강한 육‧해‧공군력의 초강대국이었지만, 정치, 외교, 군사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대통령의 국가전략이, 처음부터 비기는 것이 전쟁 목표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국가 전략에 따라, 합참 등 한국전 관련 미군 수뇌부의 군사전략도 ‘38도선 회복’이었다. 애당초, 한국민의 염원인 “군사적 승리와 한국통일”의 목표 따위는 없었다. 물론, 현장 지휘관인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승리가 바로 유럽 방위라며, 적극적인 입장을 주장하였지만…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에, “유엔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였고, 미국도 ‘침략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유지한다’고 발표하였으니, 이에 맞추어 ‘만주 폭격’ 등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트루먼’과 합참은 중국 본토 공격을 포함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기보다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에, 맥아더는 대통령이 비기는 전쟁을 위하여 미군 병사들을 희생시키는(Die for Tie)’ 이상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한국전쟁에 관한 한, 미국의 국무, 국방 정책입안자들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보다, 이념적 대결 등 ‘정치적 가치’의 평가에 더 주안을 두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엄청난 전력을 가진 중공이 개입하자,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던 미국은 수차례 기동전이 끝날 때까지 승리는커녕, 전투력 보존에만 급급했다. 결과적으로 ‘맥아더’는 소련이 아닌 중공과 북한과의 싸움에서 쩔쩔매었고... 그 바람에 ‘트루먼’ 행정부는, ‘정치적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해임은, “한국전쟁의 성격과 이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현지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의도를 따르는 미 합참과 전략적인 견해 차이에, 트루먼 행정부가 군사적 승리보다, “명예로운 휴전”으로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한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이는 ‘전쟁과 승리에 대한 견해’를 새롭게 갖게 해 준 것으로, 북경의 ‘마오쩌둥’이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한반도 적화를 노린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1951년 4월, ‘트루먼’에 의해 전격 해임된 맥아더는 그 특유의 파이프와 검은 선글라스 차림으로 수많은 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미 의회는 맥아더 해임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상하원 합동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가 이어지자, 미국의 한국전쟁 목표가 맥아더가 주장하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협상을 통한 평화에 두었다는 ‘트루먼’의 의도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문제는 그때부터 이어졌다.


맥아더 상하원 합동 청문회

중공군의 5차 공세가 끝날 즈음,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한국전쟁 정전 담판”을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미국의 적은 소련인데참전도 안 한 소련이 뒤에서 조종하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미군은 육군 18개 사단 중 8개 사단을 한국전에 투입했다. 미국에게는 유럽이 우선인데, 만약 유럽에서 소련이 도발하면 감당하기 어려웠고, 다른 유엔 참전국들도 한국전에 병력 증원이 어려웠던 점도 고려했다. ‘트루먼’의 승인하에, 애치슨 국무장관이 소련과 중립국에게 중국과 정전 의사를 흘렸다.


그렇게 미국 언론이 ‘국민들의 알권리’를 위해 트루먼 대통령의 패를 까놓고 있을 때, 하필이면, 미중 간에 한국전쟁 정전협상이 시작되었고…, 미국 언론들이 미국의 ‘속내 알리기’에 열중할 때, 미국의 패를 다 읽은 공산군과의 정전회담 결과는 참혹했다. 이에 대한, ‘핸리 키신저’의 평가는 날카롭다. 휴전협상이 막 시작되었을 때 (군사작전을 중지함으로써 (미국은 중국인들이 타협을 원하게 만들 수 있는 카드를 스스로 없앴다. 2년 동안 지루한 협상으로 좌절감을 맛본 것은 미국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중국의 철저한 비밀주의에 대하여미국의 알권리 참패한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상하원청문회는 ‘트루먼’의 손을 들어 줬지만, 청문회에서 대통령이 기껏 일개 장군 출신 정적에게 승리하는 대가로 미군 수만 명이 더 희생되었고 수천만 한국민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한반도 전역이 초토화되었지만, 전선은 ‘상처만 입은 채’ 도로 38선이었다.

         


중국의 자신 없는 전쟁 지속능력

한편,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기습 참전한 중공군은, 자신들의 참전을 알리고 전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950년 10월부터 1951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대규모 기동전으로 공세를 감행하여 연합군을 한-만 국경에서 몰아내고, 북한군을 재건하는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하지만, 한국전 개입이래, ‘기동전’을 전개하며, 전술적으로 승승장구하던 중공군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열악한 보급지원 체계였다. 당시의 중공과 미국은 거의 1,000배에 가까운 경제력 차이가 있었다.  


중공군 후방지원 부사령관에 임명된 ‘홍쉐즈’는, 중국과 만주의 지도부에게, 전쟁과 군수의 어려움을 알리며 호소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즉각 중국 전역에 ‘항미원조 총위원회’를 결성하고, 인민들에게 중공군을 위한 각종 위문품과 화포 및 비행기를 보내 주자며 봉급 자진반납 등을 독려하였고, 비록 1회용이지만, 대부분 노동자, 농민들은 생활비를 절약한 돈으로 군용기 등 무기 구입에 써 달라며 현금을 헌납하였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전개하였던 전국민적인 전쟁물자 수탈행위와도 다를 바 없는 애국(?)운동의 미명으로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항공기 약 3,000여 대를 구입할 금액을 모금했을 정도로 거국적인 지지열풍을 몰고 왔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 정부와 인민의 지원으로 전방 지역 군수지원 상황도 조금씩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민의 고혈 짜내기가 어느 정도까지 지속 가능할까?


중공 인민의 참여는 강압적으로 윽박질렀다기보다 '외세 트라우마'와 오랜 시간 공산당이 인민에 대한 신뢰를 다져온 결과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3대 기율, 8항 주의’ 등으로 ‘마오’는 ‘민심을 얻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공군은 전투준비를 위해 필요한 인민의 물자를 징발할 때도 나중에 돌려드린다는 전표 등을 발급하여, 그저빼앗긴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였으니까…  하지만, 인민의 헌납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가하면 가할 수록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도 뒤따랐다. 이제, 중공군에게도 전략, 전술적 변화가 불가피했다. 


1951년 6월, 중국 지도부에서도, 이제는 유엔군이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으니중앙군사위원회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만큼 전쟁을 끝내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마오’는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의 의견을 구했다. ‘펑더화이’는, 지난 8개월간 5차례 공세에서 엄청난 인원물자 손실이 있었다전쟁이 길어지면 작전보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라고 우려하였다. 미군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겠지만 모든 면에서 지원 역량이 우수하니 우리보다 어려움이 덜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미국은 국제 정치적인 체면’ 때문에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므로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면 평균 2개월에 한 번꼴로 반격해서 적을 격퇴해야 되는데그러려면 매월 3 명 정도의 보충병과 연 7~8 달러 전쟁비용이 필요하다”라고 보고했다.


실제, '펑더화이'는 제 3~5차 공세에서 38선 이남으로 남진하다가 군수물자 보급을 이유로 갑자기 공세를 멈춘데서 보듯이, 미국과 한바탕 큰 전쟁을 치를 능력은 애세당초 없었고, 한반도 통일을 위해 부산까지 내려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질 않은 듯하다.


한편, ‘마오’에게는 3만 정도의 인력 보충이야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마오’는 지구전을 수행하면서담판을 통해 전쟁을 끝낸다며 싸우며 대화한다(邊打邊談)”는 방침을 정했고, 김일성도 이에 동의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스탈린에게 보내 중국이 필요한 비행기, 야포, 탄약 등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이를 수락하며,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만 싸움을 멈추고대화가 멈추면 적극적으로 싸우라라고 주문하였다.


특히, ‘스탈린’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 30일밖에 걸리지 않았는데미국이 한국에서 2년 동안 싸우면서도 조그마한 한국조차 확보하지 못하여벌써 반전여론이 들끓고 있다”라고 지적하고미국은 큰 전쟁(大戰)’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중국이 전쟁을 계속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전쟁 지속을 계속 독려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1953년 초 스탈린의 죽음은 휴전 회담의 주요 변곡점이 되었다.


미국의 ‘종전 바램’에 대하여 소련의 지원을 확보한 중국이 ‘대화와 전쟁’ 방침으로 답했다. 이에, 양측은 남과 북, 그리고. 미-중 4자 간에 정전회담이라는 설전(舌戰)을 이어 갔고, 상호 입장의 차이로 대화가 막히면, 전투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다시 대화를 재촉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른바, 기약없는 지구전으로 병력을 소모시키며 대화는 피의 대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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