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의 미 군정과 트루만의 한국 냉대
일본이 항복하자,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 23만여 명의 무장해제를 위해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장 ‘하지’ 중장과 7만여 명의 미군은 한반도에 상륙하였고, 진입과 동시에 ‘맥아더 포고문 제1호’로 ‘북위 38도선 이남을 오늘부터 점령한다’며 미군이 일본 땅(한반도)을 점령하러 온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순수 전투원인 미군은 점령지의 민사 업무에 무지하여, 정부조직을 유지한다며, 친일파 공무원 등 구 일본 잔재를 여전히 활용하여, 독립에 환호하던 남한 사람에게 혼란과 갈등을 안겼다. 이 점은, 친일잔재 청산에 나섰던 소련군과 달랐다.
소련군은 이미 8월 11일 만주 대부분을 석권하였고, 북한 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소련군이 본국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패전국 일본 민간인에 대한 재산 약탈, 부녀자 겁탈, 살인 등 온갖 만행을 잇달아 저질렀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아녀자도 피해를 입게 되자, 북한 학생들이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적어도, 약탈이나 겁탈 등의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당황한 소련군 지도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려고 ‘조선이 독립과 자유를 되찾은 것을 축하’하며, ‘조선해방 만세’라는 포고문을 붙였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서 ‘해방군’이 될까?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의 침입으로 산업시설을 철저히 파괴당하였기에, ‘승전 보상 전리품’으로 자신들이 점령군으로 진주하였던 독일이나 동유럽, 만주, 등지에서 산업시설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북한에서도 압록강 수풍발전소 등 산업시설을 뜯어 소련으로 실어 보냈다. 양민약탈이나 부녀자 겁탈에 이어 이런 도적행위는 현지인에게 매우 부정적이었으니, 소련군이 “해방군 운운…”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어쨌든, 소련은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이라고 외치며,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북한 정세에 익숙한 친소 북한계 인사들을 입국시켜, 북한 내 선무공작과 함께, 토지개혁 등 각종 개혁으로 친일세력과 지주세력을 몰락시키고, 주민을 회유하였다. 이는, 소련이 동구권 점령국에서 하였던 것처럼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소련화 작업(Sovietization)’의 일환이었다.
이에 비해, ‘루스벨트’ 이래 미국 점령지 정책은, 독일 분할과 수도 ‘베를린’, 그리고 '비엔나' 등 주요 도시의 분할에서 보듯, 4개 연합국이 ‘점령지를 분할하여 통치’하고자 하였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정을 실시 중에도 ‘주인이 없어진 한반도’를 ‘점령’하기보다, 5년간 미‧영‧중‧소 등에 의한 4개국 신탁통치 실시 후, ‘유엔에 의한 국제화’로 넘기려 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이 주장하던 국제화 신탁통치는, 좌우를 망라한 한민족의 격렬한 신탁반대 운동으로 무산되었다. 소련은 만주를, 미국은 일본 열도를 가지고, 남은 한반도도 일본 땅으로 간주하여 반반씩 나누어 갖는다는 발상은 강대국의 무지와 오만한 횡포였다.
1947년, ‘트루먼’은 유럽에서 경제부흥 지원책인 ‘마셜 플랜’을 시작하였고, 한반도에서는 '루스벨트'가 남긴 신탁통치 대신, ‘1948년 3월 31일 이전 유엔 감시하 총선거 실시, 통일정부 수립 시 모든 외국군 철수’와 ‘현지인의 의지대로 자유민주주의 선거에 의한 정부를 수립’ 등 ‘트루먼 독트린’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미국이 제안한 타협안에 대해, 소련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남한 내 혼란과 정국 불안을 부추겼다. 미국과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과 전략을 비교하면, 미국은 ‘신탁통치’에, 소련은 ‘위성국가’에 주안을 두었다. 이들의 정책은, 남북한 군정시대(1945~1948년) 내내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체제만큼이나 다른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자연스러운 감군과 예산 감축이 진행되자 지상병력이 부족해진 미 합참은 1947년 5월부터, ‘한반도가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다’며 철군을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미 군정도 정부 수립 전까지 병력을 5만 명으로 증원하는 ‘조선경비대 증강계획(Bamboo Plan)’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에, 남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미소 양국군은 1948년 말까지 철수를 결정하였다.
그런데, 철수를 준비하던 미국은 향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은 매우 낮게 보았지만, 한국의 북진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았다. 한국 정부가 희망적인 구호로 사용하였던 ‘북진통일’이 미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한 탓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미군정 기간은 물론, 한국정부 수립 이후에도 일관되게 한국을 하나의 ‘부담’으로 간주하고, 한국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대한 단독 책임은 물론, 어떠한 개입도 회피하려 하였으며, 심지어 한국 정부가 요청한 소형무기 구매조차 불허하였다.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8월에 미국에 군사원조를 애걸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트루먼’은, ‘군사력 유지보다 경제발전이 더 중요하다’며 군사원조를 거부하고, “나중에 북한의 전면 침공이 있을 경우, 한국 정부는 미국 대신 유엔 총회나 안보리에 도움을 청하라”라고 회신하였다. 더구나, 주한 미 대사가 요청한 군사원조조차, 반으로 삭감하며, “한국에 군사원조를 더해 줄 예산과 명분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는, 깐깐한 보수주의자인 ‘트루먼’ 대통령의 ‘대 아시아 불신’도 한몫했다. 중국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당시로서는 엄청난 30억 달러 이상의 군사원조를 제공받은 500여만 명의 국민당군이 동북(만주)에서부터 베이징, 난징 등까지 불과, 30여만 명의 중공군에게 연전연패하여 중국 본토가 허무하게 공산화되는 것을 보고, ‘한국에 대한 원조도 무모하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 그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그 주변 인물을 모두 ‘도둑놈’으로 보았다. 그러니, 신생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를 대하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1950년 1월 12일, 미 극동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키는 ‘에치슨 라인’이 선포되었다. 한반도에 단독개입을 회피하려는 미국의 정책은 미 신문기자 협회에서 행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에서 드러났다. 에치슨은, “미국은 일본방어에 전적으로 개입하고 있어, 미국의 극동방위선은 필리핀에서 류쿠열도, 일본을 지나 알류샨 열도로 이어진다”라고 밝히고, “이 방위선 밖의 지역에 대한 침공은 1차적으로 지역 주민들이 저지하고, 그다음은 유엔헌장에 의한 모든 문명세계의 개입에 의존하여 저지되어한다”라고 말했다.
미 극동 방어선 (에치슨 라인, 1950.1)
이처럼, 한국이 제외되었어도 미정부 내 인사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에치슨 라인’의 의미는 당시, 미국 안보의 우선순위에 따른 것이었다. 최우선순위는, 서유럽과 일본 등 미국 이익에 사활이 걸린 국가였고, 차순위는 그 지역을 지키는 데 중요한 지역들이며, 다음은 미국이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자력’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외세의 힘’으로 독립되다 보니, 미국은 ‘전리품’으로 얻은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가 없다”며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하는 등 한반도에 대한 당사자 역할을 적극 회피하였다. 이는, 미국이 점령한 십수 개의 타 점령지에 비해 전략적 우선순위가 낮은 한반도에 대한 경제원조나 군사원조 등을 최소화하려는 비용과 노력 절감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한다”며 한국에 있던 미군 6만여 명마저, 모두 일본으로 보냈다.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어,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지역’으로 분류된 한국의 위상은 분명해졌고, 이는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멍석을 깔아 주었다.
이에, 한반도 문제에 대해 ‘신중하지만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던, 소련의 ‘스탈린’조차, ‘애치슨 선언’으로 한반도에 대한 미국 불개입의 확신을 크게 가졌다. ‘스탈린’은, 1949년 8월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과, 1949년 10월 중공 정권의 중국 대륙 장악에 고무되어 김일성의 끈질긴 북한군 증강 요청을 '마오쩌둥'과 협의하는 등 이를 신속하게 지원하였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비를 증강한 북한이 남한의 대비태세 확인차 38도선 상에 지속적으로 소규모 분쟁을 벌였지만 국군은 이를 분쇄하는데 만족하였지, 대비태세 확인 의도를 알지 못했다. 더구나, 조용히 남침을 준비하던 북한과 달리, 미국의 외면으로 군비증강이 전혀 없었음에도, 국군은 말로만 ‘북진통일’을 한다며 무절제한 발언을 쏟아 내었다. 국군의 이런 ‘허풍’ 발언은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6‧25가 북한의 기습남침이었지만, 좌파 인사들은, 국군의 ‘북진통일’ 등 각종 도발적 발언들과 6‧25 이전 38 선상 소규모 충돌 시 국군이 보인 우세를 근거로 들면서 한국의 ‘북침론’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