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6‧25전쟁 직전까지, 시종일관 한반도에 부정적이던 ‘트루먼’ 대통령이,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직접 개입’은 여전히 보류하였으나, ‘유엔을 통하여 수습하자’라며,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유엔은 미국의 제의대로 6월 27일 안보리 제474차 회의에서 “북한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한국에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안보리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당시, 소련은, 1949년 대만으로 쫓겨간 ‘중화민국’이 여전히 안보리 상임이사국인데 대한 불만으로 안보리 회의장을 떠나 있었다. 하지만, 외교전략적 측면에서 유럽에 주안을 둔 스탈린이 “미국을 한반도 전쟁에 묶어 두기 위한 유인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유엔은 안보리 거부권을 가진 소련의 불참으로 북한군 남침에 신속하게 단호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면, 한반도를 '에치슨 라인'에서 제외시키는 등 그토록 무관심하던 ‘트루먼’이 왜? 갑자기 북한 남침에, ‘유엔 수습’으로 태도를 바꾸었을까? ‘트루먼’의 갑작스러운 인식 전환은 아래 3가지 판단으로 보인다.
먼저, 공산주의 침략에 유화책으로 대하면 나치의 팽창처럼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는 것, 북한 배후에 ‘스탈린’이 있어, '소련이 북한을 이용하여 공산권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 또한, '침략행위를 방치했을 경우, 막 태동된 유엔의 기반과 원칙이 무너진다'라며 ‘침략의 사슬고리를 어디선가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트루먼’은 6‧25를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의 이념대립’으로 규정하고, “미국 단독이 아닌, 전 세계 자유진영 동맹국과 함께 싸워야 한다”며, ‘유엔을 통한 공산군의 38도선 이북 축출’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이유로, 그의 ‘안보 딜레마’를 거론한다. 1949년,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과, 중국 대륙 공산화로, ‘세계 모든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팽창하지 못하도록 봉쇄'를 고심하던 트루먼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일본 주둔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가, “한국은 미국의 사활이 걸린 ‘일본을 지키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라는 명분으로 한국에 지상군 파견을 건의한 것이었다. 1950년 6월 29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내린 후, 한강 방어선을 둘러보았다. 북한군의 남침이 ‘일본 방위에 미치는 영향’을 보러 왔지만, 전략적 식견이 뛰어난 그는, “한반도가 미국의 핵심 이익과 직결되는 일본 방위에 중요한 전방기지 GOP(General Out Post: 적의 접근을 조기경고, 저지, 와해, 격멸토록 최전방에 위치한 부대)로서, ‘시간적, 종심적 완충지대(Buffer Zone)’가 될 수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또한, 국군 전선부대 시찰을 통해, 비록 지치고 패퇴하였지만, “철수 명령이 내릴 때까지, 아니라면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참호에 남아 있겠다”는 국군 병사들의 결연한 의지도 확인하였다. 그는 국군 병사의 의기는 가상하나 경무장한 국군은 이미 방어 능력이 소진되어, 미군 투입만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아, 지상군 중심의 3군 합동작전을 육군성에 건의하였다. 다음 날 6월 30일, ‘트루먼’은 육군성의 건의대로 ‘맥아더’에게 ‘일본 방위에 지장에 없는 범위 내에서’ 주일 미군 사용을 허가했다. 한국에 지상군 파견을 신속히 승인한 것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소련의 한반도 장악을 거부한다며,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단독 책임(Unilateral Responsibility)’은 회피하려던 ‘트루먼’이, 미 육군 파견을 승인한 것은 얼핏 모순 같지만, ‘한국을 일본 방위 전초기지로 활용한다’는 ‘맥아더’ 의도를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미 8군은 일본 방위의 관점에서 한국 주둔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맥아더의 지상군 파견을 건의받고 전쟁 발발 5일 만에 주일미군을 한국에 파견했던 트루먼은, 후일, 기자들로부터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해 포기한 나라의 전쟁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개입하였느냐?”는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그저, 미국과 일본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트루먼의 ‘폭 좁고 모순적인 결정’에 대한 언론의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트루먼’의 승인으로 ‘맥아더’는 7월 1일, 미 24사단의 1개대대(‘스미스 특임부대’)를 한국에 배치하여, 전쟁발발 불과 10여 일 만인 7월 5일, ‘오산 전투’에 투입하였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미군은 이 첫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하였다. 이 패배는 미군의 참전으로 전선 회복을 기대하던 국군과 정부 인사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또한, 트루먼의 소극적인 한국전 참전의도를 간파하고, 무모한 야욕을 불태우며 “미군 참전은 없다”고 장담했던 김일성과, 미군개입을 반신반의하며 완전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던 ‘스탈린’조차, 뜻밖에도 미군이 신속히 참전하자, 그 대응에 고민하였다. 그리고 중국을 그 대안으로 삼았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마오쩌둥’은 ‘광저우’ 일대에서 ‘대만침공’을 준비하던 ‘덩화’의 제13병단 (군사령부급)을 만주 ‘단둥’으로 급하게 전진배치 시켰다.
1950년 7월 7일, 미국의 요청에 의해 유엔은 한국에서의 작전을 지휘하는 유엔군 지휘체계를 규정하는 새로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한국전쟁을 수행할 체계와 조직은 갖추어졌고, 이어서, 1950년 7월 14일, 유엔군 사령부가 창설 및 편성되었다. 유엔으로부터 한국 내 유엔군 작전 통제권을 위임받은 미국은 미군의 지휘체계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즉,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서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통수권을 행사하고, 미 합참의장은 작전수행기관으로 임명되고, 합참은 다시 동경의 미 극동군 사령부를 유엔군 사령부로 지정하여 당시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참고로, 이 체제는 사령부가 1957년 동경에서 서울로 옮겨진 후, 1978년 연합사령부가 창설될 때까지 지속된다. 한편, 유엔의 참전 결의로 한국전 전담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자, 같은 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주도 작전 수행의 효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전쟁을 신속하게 종결하기 위하여 ‘한국군 전시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하였다.
작전통제권이 무엇인가? 한 국가의 군권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이처럼 신속, 과감하게 결정할 수 없을 만큼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그가 국군 총참모장 정일권 장군에게, 그의 결정이 미국과 유엔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설명하자, 정 총장은 군의 통수권 및 인사, 조직과 연계된 문제점, 작전 수행상 자율성 훼손 등의 어려움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유엔군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서 다소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미군과 군사작전을 보다 원할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정 총장을 설득하고, "전작권은 언제든 회수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진 작전통제권은, 40년이 지난 1994년에서야 대간첩작전을 위한 평시작전권이 회수되었지만, 전시작전권의 경우 한, 미 간에 수 차례 논의와 연기 끝에 70여 년이 지난 2020년 이후에 다시 재논의하기로 하였다. 덕분에, 여지껏 전시작전은 연합사가 통제하고, 한국군 육, 해, 공군 본부는 인사, 군수 지원이나, 교육훈련에 그친다. 전작권 회수는 어렵지 않을 수도 있으나, 회수할 만한 여건 조성은 여전히 불충분한 상황인 것이다.
참고로, 중공도 제3차 공세를 앞둔 1950년 12월 상순, ‘펑더화이’가, “차후 작전의 성공 보장을 위해, 통일된 지휘체계를 확립하여, 중공군이 지휘권을 갖도록 해 달라”고 북한군을 통합 지휘할 수 있도록 김일성에게 ‘중조연합사령부’ 설립을 요청하였다. 이는, 한국전 초기 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우여곡절 끝에, 유엔사령부는 구성되었지만,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전선에 얼마나 신속히 투입하는가?' 의 문제와, 이들이 투입되기 전 '한국군이 북한군의 남침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저지하는가?' 가 한국전 수행의 관건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전쟁초기 한강선 방어의 지탱여부가 전체 국면을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였는데, 다행히 국군은 악전고투 속에서 약 1주간 한강 방어선을 지탱하였다. 이는 미군의 전선 투입을 보장하기 위한 선결조치로, 유엔군 지원을 위해 필요한 시간 확보 차원에서 더없이 소중한 작전이었다.
이처럼, 전쟁 초기부터 1950년 8월 초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며 허둥대었지만, 은밀히 남침을 준비하다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에게는 장비의 우세는 물론, 병력도 전투경험이 있는 인원이 많았다.
예컨대, 북한공군은 구 일본군 공군 출신들이 ‘야크’ 전투기 등 공군력으로 이끌었고, 육군에는 소련과 중공이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조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하였던 소련내 조선인 5,000여 명과 중국 국‧공 내전에 참전했던 중공군 조선 의용군 30,000여 명 등 조선인 전투 병력을 대거 북한으로 송환하여 북한군 105전차여(사)단, 6, 7사단 등으로 각각 편성되었다. 이 같은 소련과 중공의 인적, 물적 지원에 김일성도, “이들 20여만의 병력과 242대의 T-34 땅크, 200여 대의 야크 전투기로 50일 (6.25에서 8.15까지)이면 남한 해방에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을 만큼, 북한의 초기 전투력은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의 전방부대 전투원 중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인으로서 일본‧중국, 독일‧소련 전쟁에 참전한 숙련된 고참병이 많았다. 그렇지만, 승승장구하던 북한군도,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는 동안, 미군 등 유엔군의 공중 폭격과 각종 전투 등으로 부대원 열 명 중 아홉 명이 사상당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북한의 각종 기념행사 중계 화면에 보면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을 입은 노병이 그 때의 생존자들이다.
그런데, 다소 엉뚱하게도 소련 ‘스탈린’은 너무 신중하게 접근하다 실수(?)를 범한 듯하다. ‘스탈린’은 6‧25전쟁 발발 이전 북한 지원을 위한 ‘조소 비밀군사협정(1949년 3월 17일 체결)에서, 최초 T-34 땅크(탱크) 2개 사단분 500여 대를 지원하려다, “북한군을 지나치게 키우면, 자칫 일본까지 위협하여 미‧소 관계를 악화시킬까” 봐, 지원 규모를 땅크 1개 사단 분으로 축소하였다. 만약, 땅크 2개 사단 분이 지원되었다면 대한민국은 6‧25 전쟁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