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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0.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6화) - 중공의 참전 배경

중공군 참전배경


‘오랑캐 (중공군)’는 왜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싸웠을까?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참전 배경


2019년 ‘트럼프’ 전 대통령이 관세폭탄 등 무역전쟁으로 중국을 압박했을 때, 미국의 오만에 대한 중국의 도전은 교묘했다. ‘시진핑’의 중국은 미국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한편, 대미 무역 의존도를 줄여가며, 장기적인 ‘지구전(持久戰)’에 접어들었다. 지구전은 인민들의 인내심 싸움이다. 중국은 미국 극복에 인민적 관심과 노력을 호소했다. 이런 류의 호소는 한국전쟁 당시처럼, 공산당의 전형적인 선전선동 수법이다. 중국 정부가 인민의 단합과 지지를 얻기 위해 엄청난 홍보로 인민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한국전쟁의 ‘상감령 전투’에 대한 망령을 갑자기 소환하기도 했다. ‘상감령 전투’는 중공이 자랑하는 ‘갱도전(坑道戰)’으로 미군에 승리한 ‘지구전(持久戰)’의 대명사였다. 2020년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식’은 매우 강렬했다. 중국 지도자가 6‧25전쟁 참전 기념식에서 직접 연설을 한 것은 2000년 ‘장쩌민’ 총서기 이후 역대 두 번째다. 


그의 발언 요지는 대략 5가지로, 6‧25전쟁의 발발 과정, 미국의 한국 내전 무력간섭,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참전, 중조(북한) 공동 생사와 우의 그리고 항미원조 전쟁의 위대한 승리 등이다. 하지만, 장황한 연설에서 시 주석은 세계 각국의 사료에서 이미 밝혀졌음에도 한국전쟁 개전의 주체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2021년 4월,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 산하 중국인권연구회가 조선 전쟁은 미국이 발동한 침략전쟁’이라는 보고서 전문을 게재했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가 중국 인권문제를 비판한 직후의 일이다. 이런 인식은 중국 내의 일반적인 기류다. 중국 8학년(중 2학년) 국정 교과서 ‘중국 역사’에도,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미국 정부는 조선 내전에 무장간섭을 결정하고7함대를 대만해협에 진입시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시각은 ‘북한의 남침’을 의도적으로 가린다. 전쟁 준비에 연루된 ‘마오쩌둥’의 책임을 가리고 중국의 불법참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과정이다. 소련도 해방군으로서 위성국가를 설치하고 전쟁 준비를 지원하였지만,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합작 공격’이라는 서방의 시각에는, ‘남북 내전’의 대립 구도로 엮어 댄다. 그러면서, 중국은 미국을 한국 ‘내전’에 무력간섭한 것으로 간주한다.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한반도를 차지하지 못하도록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허울을 내세우며 주변 강대국들과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는 게 중국의 시각이다.


상기하면, 한국전쟁 초기에는 북한의 “남한 적화통일”과 남한의 “북진통일론”이 맞붙은 모습이었다. 북한이 ‘남조선 해방전쟁’이라며 치밀한 준비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일방적으로 우세하자, 말로만 ‘북진통일’을 외쳐대던 국군은 개전과 동시 지리멸렬하여 후퇴에 급급하였다. 이런 전황을 보면 ‘북한이 남침한 것’은 명백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전쟁 발발 책임소재에는 ‘국군 북침론’으로 책임을 남측에 전가한다. 6‧25전쟁 이전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국군의 대응능력 시험 목적으로 도발할 때마다, 공개적으로 ‘북진통일’을 천명하였던 한국 정부의 주장을 교묘하게 역선전에 이용한 것이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고 한-만경계를 향해 급속도로 북상하자, 다가오는 외세로 두려움에 떠는 중국 인민의 ‘체제 안보’ 위기의식은 마오쩌뚱 지도부가 여쩌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확산되었다. 

이런 가운데, 소련과 북한이 참전을 요청하자, 신생 중국의 한반도 참전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곳곳에 보인다. 중국 지도부는 몇 날 며칠 동안 이제 발등에 떨어진 한국(조선)전쟁 개입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실리적인 비둘기파는 신중론이었다. 청조 멸망 이래 수십 년 동안 전쟁이 대륙을 덮었다이제혁명정권 수립 후 겨우 1년이 지나 평화가 시급하다함부로 남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자그리고 전쟁 경비도 없다소련에 기댄다지만소련은 믿을 만한 나라가 못 된다더구나지금참전하여 미국과 맞붙으면 화해에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반면, 대의명분을 내세운 매파는, 항미원조는 정의로운 반침략전쟁이다조선이 망하면 우리도 영향을 피하기 힘들다미군의 북진을 절대 좌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결국 매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는 이른바, 외세 배격영토 유지체제 수호를 중국의 3대 핵심 이익으로 내세우며, 미국에 대항하고북조선을 원조하자는 항미원조(抗美援朝)’와 “‘남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전쟁으로 여긴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 그리고 공산체제를 수호한다는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에 따라, 중공은 압록강까지 밀린 북한 영토를 회복한다며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며 기습적으로 미국에게 달려들었다. 중공이 한국전쟁에 불법적, 기습적으로 참전한 것이다.     



중국의 '외세 트라우마'와 미국 배척


우리는 여기서 중국인의 '외세 트라우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서구인은 특이한 존재였다. 중세 서구사회는 로마제국 멸망 이후 1,000여 년 이상 문화예술을 포함한 모든 인간 생활의 중심은 ‘하나님의 신성’을 높이는 일이었다. 이른바, “암흑기”라 불린 시기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국교화되자 기독교는 ‘선교의 명분’으로 군인과 더불어 전 세계 ‘정복의 역사’에 나섰다. 14세기, 수 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에서 패퇴하여 동방 진출이 막힌 서구는 부득이 해양 국가를 중심으로 ‘대항해 시대’를 개척하였고, 17세기 중엽에는 군함을 앞세우고 기독교 선교사와 상인이 함께 동양으로 유입되었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 선교는 기독교도의 사명이었으나중국인은 종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수천 년간 종교 분쟁조차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 중국인에게, 서구인이 무력과 종교가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아는 순간 그들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1840년, 영국은 ‘아편전쟁’을 도발했다. 패배한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당하고, 국제사회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1860년대 상하이에서는 공자의 사당이 영국군의 병영으로 전락했을 정도였다. 이후 수십여 년간, 청불 전쟁 등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며 서구 열강의 따끔한 포탄 세례를 맛본 중국인이 폭죽의 재료로만 알았던 화약의 위력에 놀라 허둥대는 동안, 중국에 와 있는 서구인은 치외법권을 누리며,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부녀자 추행과 폭행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선교사조차 지역 농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무력을 앞세운 선교가 섬김과 나눔보다 승리의 십자가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런 횡포에 참다못한 산동성의 무술단련 민간조직 ‘의화단’이, 1899년, 외세배척 운동을 일으키자 수많은 군인, 농민이 순식간에 합세했고, 청 황실도 이를 배후에서 지지했다. 결국, 성당과 교회는 불탔고, 선교사들은 죽거나 도주했다. 하지만,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일본 등 8개국은, ‘의화단과 청 제국에 대항하자’며, 3만여 명의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민족적 정의감으로 궐기했던 의화단이지만 부적이나 칼로는 근대적인 연합군 화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기력한 청조는 또 무릎을 꿇었다.             


의화단 사건을 제압한 8개국 연합군과 ‘북경의 55일’ 영화 포스터

  ‘북경의 55일’이라는 영화로 알려진 ‘의화단 사건’에서 이긴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런데, 점령군은 의화단에 의해 죽은 백인의 보복을 한다며, 3일 밤낮 황궁의 진기한 보물을 수없이 약탈하고, 살인, 방화, 강간을 자행하여 베이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하며 청나라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서구의 만행은 수많은 중국인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강한 외세’ 트라우마를 남겼다이후에도, 황실의 보존에만 급급하던 청조의 약점을 이용한 서구 제국주의의 이권 수탈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식민지 분쟁을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던 미국 월슨 대통령의 제안에 중국은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독일이 가졌던 산동 반도 ‘조차지’를 일본이 갖는데 동의하자, 미국에 대한 중국인의 호감은 미국 믿을 수 없다는 불신으로 바꿔, 미국 배척 열기가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반면에,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러시아의 레닌이 중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폐기하자, 미국 성토를 외치던 일부 지식인은 소련의 결정에 열광하며 ‘좌경화’되어 갔다.


한편,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중국에서 각종 수혜를 누렸던 일본은 1931년 허수아비 '만주국'을 수립한 것으로도 모자라, 일본군 몇 개 사단이면 중국을 장악할 수 있다며 결국,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무고한 평민들을 집단 살해한 ‘난징 대학살’ 사건 등으로 중국대륙을 유린하고 수백만 중국 민중을 희생시켰다. 청조 멸망 이후, 중국공산당 정권 수립까지 수십 년간 서구나 일본의 침략은 큰 재앙이었고, 이는 전란에 시달린 중국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동경에 진주한 ‘맥아더’의 일본 군정은 천황제를 보호와 전범에 관대한 조치 등 패전국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어서 미국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던 중국으로서는 미국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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