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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0. 2024

한국전은 미‧중 전쟁 (제7화) - 중공의 핵심 이익

외세배격, 영토보호, 체제수호는 중공의 3대 핵심이익

외세 배격, 영토 보호, 체제 수호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운다


중국이 6‧25전쟁을 ‘항미원조’라고 공식적으로 내세우는데는, 이처럼 분명한 참전 목적과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항미원조’는 중국 인민이 치를 떠는 외세 ‘트라우마’의 극복의지로 대변되는 치밀한 군사전략이었다. 


1950년 10월, 미군 등 맥아더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쫓아 계속 중국으로 다가오자, 중국 정부는 사회와 가정에서 젊은이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겠다며 ‘인민지원군’에 자원하도록, 남다른 사명감과 애국충정 결단을 추켜세웠다. 예컨대, 결혼식 날에 피와 땀을 겁내지 말자며 자원입대한 신랑의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자, 전국적으로 4만여 명의 청년들이 혼인서약 이후 군입대에 나섰고, 여자들도 전쟁 이후로 결혼을 늦추었다. 지도자 ‘마오쩌둥’도 예외는 아니었다. 갓 결혼한 28세의 마오 아들 ‘마오안잉’도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마오도 단지 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군에 가지 않는다면 누구도 갈 사람이 없다며 그의 참전을 격려하였다. 참고로, 러시아어에 능통한 ‘마오안잉’은 지원군 사령부 작전실 통역요원으로 근무 중, 중공군 2차 공세 직전 각종 통신문이 급증하자 이를 탐지한 미 공군의 집중 폭격으로 사망했다. 바로 중공군 2차 공세 개시일이었다. 부언하면, ‘마오쩌둥’은 다섯 가족 모두를 혁명 과정에서 잃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포스터

신생 중국의 군사력은,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하여, 자원입대한 중공군 병사들이 많이 희생되었지만, ‘마오쩌둥’은 일부 전투 승리를 적극 선전하며 인민통합에 이용했다. ‘외세 트라우마’를 지닌 중국인에게 ‘항미원조’는 애국주의를 넘어 ‘중화 민족주의의 자부심’에 가깝다.

이는 시 주석의 2020년 10월 연설에 나온다. 항미원조는 미국 침략에 맞선 전쟁이며정의로운 군대의 정의의 행보라며 제국주의 침략자(미국)의 전쟁 불꽃이 문 앞까지 다가와 국가안보가 심각한 위협을 받자 북한의 요청에 따라 참전하여조 군대가 침략자를 때려눕혀 신중국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과시했다고 정의하며, 고난을 뚫고 거둔 위대한 승리를 기억해 앞으로 나아가자며 결사항전의 전통 계승을 외쳤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다’


순망치한은 역설적으로 '남의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더라도 내 영토는 보존한다'는 자기 보호적 전략이었다. 6.25사변 발발 10여일 후인 1950년 7월 초, 북한군과 미군의 첫 전투였던 ‘오산 전투’가 벌어지자 중공은 미군의 한국전 개입을 확신하고 대비에 들어갔다. ‘오산 전투’ 이후 2주가 지난, 7월 19일, '마오쩌둥'은 당시 광둥성 ‘광저우(廣州)’에서 대만 공략을 준비하던 제13병단(38, 39, 40, 42, 50, 66 등 6개 군 총 25만 명) 사령관 ‘덩화’를 ‘인민지원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만주로 이동하여 대기할 것을 지시하였다. ‘마오’는 ‘덩화’에게, 트루먼은 조선을 포기할 것 같지 않다동북 변방을 지키며 필요시미국과 싸울 준비를 하라미국을 종이호랑이’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미국은 감당하기 어려운 강국이다며 은밀히 전쟁 준비를 지시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1일에, 북진통일을 외치며 38선을 돌파했다. 유엔군과 미군도 뒤따랐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10월 1일, 스탈린에게 급전을 치고, 중국대사 ‘니즈량(倪志亮)’에게도, 현재 38선 이북 지역에 병력이 없다중국 지도자에게 상황을 전해 달라며 마오쩌둥에게도 급전을 쳤다.


존경하는 모택동(마오쩌둥) 동지 앞, … 적군이 38도선 이북을 침공하게 될 때는 약속한 바와갓치(원문 그대로) 그대로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김일성이 편지 속에서 언급한 ‘마오’와의 약속은, 1950년 5월 13~16일간 베이징을 찾은 김일성에게 '마오'가 만일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돕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북한의 남침을 묵인하고 지원을 약속했던, ‘마오쩌둥’이었지만, 3년여에 걸친 국공 내전 종결하고, 정부를 수립한지 1년도 채 안 되어 국내, 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커다란 전쟁을 치를 여력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외세의 침략’에 당했던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은 중국 지도부로서는, 무엇보다도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국경을 지키고외세를 물리친다는 강한 의지를 인민에게 보여야만 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자국의 안전을 우려하며 한반도에 개입한 사례는 몇 차례 더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평양과 두만강까지 신속히 진출하자 ‘명’은 일본이 조선 장악 후, 요동으로 진입할 것을 우려했다. 일본은 수년 전부터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데다, 실전 경험도 풍부하고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만일, 요동지역으로 진입한다면 한판 승부에 따라 자칫, 북경까지 위험해질 터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명군을 조선으로 보내 조선에서 싸우는 게 훨씬 나았다. 이처럼, ‘항미원조’든, ‘항왜원조’든 ‘조선’을 도운다고 하지만 기실, 한반도는 오로지 중국이 중국 본토 밖에서 미국, 일본과 대결하는 장소일 뿐이라는 ‘중국 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청일 전쟁의 빌미가 된 동학농민운동의 제압에 조선 정부가 출병을 요청하자 득달같이 달려온 청국군의 모습을 보면, 조선의 안위보다 호시탐탐 대륙 진출을 노리는 일본으로부터 자신들의 권역을 지키려는 완충지대로서 ‘순망치한’이 차용되었던 것이다.          



‘보가위국(保家衛國)’: ‘공산체제와 국경을 보위한다’


‘가문을 보호하고 국가를 방위한다’는 보가위국은 체제수호의 전략이었다.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한만국경에 접근하자, 호파당위(戶破堂危: 문이 망가지면 안채가 위험하다)라며 공산체제와 국경에 위기를 느낀 ‘마오’도 북한 붕괴로 자국 내 북한 망명정부가 들어서거나 자본주의자와 대치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라며, 중국과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한반도의 북부에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보존시켜 자신의 권역으로 묶어, 중국 본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자본주의 서구 외세와의 접촉은 중국에게 무엇보다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항미원조’는 ‘항왜원조(抗倭援朝)’의 ‘데자뷔’였다.


중국은, 소련의 북한 지원이 확고함을 인지하고 나서, 한국전 개입을 확정했다. 이는,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지위를 손상시켜, 일본과 대만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설사국가 수립 1년도 안 된 중국이 세계 최강 미군에 패배한다 해도 그다지 체면 깎이는 일은 아니었으니… 도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은 소위 ‘항미원조’라 하면서도, 중국이 청일 전쟁 이후에 잃어버린 한반도 종주권 회복에 대한 염원을 여전히 내보였다는 점이다. 중공군의 제 3차 공세로 밀린 국군이 1‧4후퇴로 버린 서울을 함락하자, ‘마오쩌둥’은 비원을 풀었다고 했다. 물론, 1951년 3월 15일 백선엽의 1사단이 서울을 다시 탈환하긴 했지만… 이처럼 전쟁 간 간간히 들어난 중국의 한반도 집착은 섬뜩함 그 자체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났는데, 제2의 마오쩌뚱을 꿈꾸는 ‘시진핑’은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여전히 ‘중국몽’으로 그 염원을 이어 간다. 중국이 외세침략을 핑계로 한반도에 집착하는 모습과 동북공정이니, 문화공정이니 하면서 한반도와 역사적 관련성을 과시하며,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역사 인식은, 우리 민족에게는 무거운 짐이고 무서움이다.          



피어린 ‘항미원조’, 그 이면의 참전 대가는?


‘마오쩌둥’은 ‘외세침략에 대한 중국인의 트라우마’, 국경 지역 완충지대 확보, 체제수호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장악 등 겉으로는 ‘항미원조’, ‘순망치한(脣亡齒寒)’, 보가위국 등을 내세우며 한국전에 개입했지만, 진정한 ‘마오쩌둥’의 참전 이면에는 소련 스탈린의 6‧25전쟁 물자지원 약속과 막대한 경제 원조를 기대한 측면도 있었다. 남침을 지원한 ‘스탈린’이 미국은 절대 참전하지 않는다는 김일성을 반신반의하면서, 만일을 위해 ‘마오쩌둥’의 등을 떠민 것을 마오가 역으로 이를 십분 이용한 것이다.


전쟁 발발전, 김일성은 ‘스탈린’과 대남적화 군비확충 전략을 협의하였지만, 마오와는 사전 협의조차 하지 않았다. 북한조차 신생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보았던 셈이다. 당시, 건국 1년 차인 신생 중국은 국가 기반을 다지기 위해, 대만으로 도주한 국민당과 대륙 내 잔존세력 제거, 티베트 해방, 토지개혁, 경제건설 등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이런저런 여러가지 핑계로, 한반도 참전을 피할 수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소련이 제시한 경제원조는 물론, 미그(MIG) 제트기 등 군사원조를 원하였고, ‘스탈린’은 이런 마오의 욕심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중국은 경제, 군사원조를 받는 대가로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25만여 명의 병력을 만주 접경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미국과 한바탕 큰 전쟁을 치를 능력은 애시당초 없었다. ‘펑더화이’가 3~5차 공세 때마다 군수물자 조달 부족을 이유로 38도선 근처에서 공세를 멈춘 데서 보듯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부산까지 내려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질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최초 ‘평양성’ 전투 승리 이후 남쪽으로 치고 내려가다가, ‘벽제’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자 태도를 바꾸어, 이후 수년 동안 강화협상을 한다며 싸우려 하지 않던 모습과 유사하다. 


중국은 소련의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최대한 얻어 내되한반도에 북한이라는 자신에 우호적인 국가를 완충지대로 활용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그렇지만, 신생 중국은 한국전 개입 결정으로 들어날 많은 문제를 고려해야 했다. 만약, 유엔군에게 선전포고할 경우, 중국은 자동적으로 유엔 회원국들과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무엇보다, 낙후한 중국 공군과 해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 공군과 해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미 공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중국의 대도시와 공업단지를 공습하고 해군의 함포가 연해 지역에 포격하면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게다가미국은 원자폭탄 보유국이 아닌가이 모든 위협을 신생 중국이 감당할 수 있을까더구나소련의 무기와 공중지원에 대한 확신 없이 공격에 나설 수 있을까?” 등의 수많은 문제 제기에, ‘마오’는 1950년 2월 14일 맺은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른 소련의 의무를 언급하며 우려를 잠재웠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중국군이 한국에서 미군과 효과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가? 문제에, 정규군인 ‘중국 인민해방군’보다 ‘중국 인민지원군’ 이름으로 출병하도록 인도 등 중립국과 일부 유엔국에게 외교활동을 병행하며, 중국 내 일부 계층의 대미 공포증 해소와, 전 인민의 지지로 전쟁 참여를  선도할 지원군 기관지 발행도 서둘렀다.


이처럼, 치밀한 준비를 하면서도, 이들이 간과한 정말 큰 문제는 작전지속 지원능력, 즉 군수지원이었다. 신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의 수백 분의 일로,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었으나, 중공은 미국을 상대로도 국공내전 때처럼 무기, 탄약, 물자를 현지에서 얻으려 하였다. 중공군은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병참 등을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보았고, 오히려, 정치적 행위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전투가 거듭될수록 최빈국 군대가 갖는 열악한 병참 문제로 인해 엄청난 병력이 희생되었고, 공격적인 군사적 활동은 점차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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