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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19. 2024

한국전은 미‧중 전쟁 (제3화)- 독립과 분단

무지와 편견 속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

‘승냥이(미군)’는 점령군이었을까? 해방군이었을까?(1)        



한반도 독립의 계기가 된 일본의 ‘진주만 기습’


우리 역사에 미국이 끼친 공과(功過)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의 대한반도 입장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기울어져가는 ‘은둔의 나라’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교하였지만, 당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오로지 일본만 두둔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한반도의 존재를 잘 알지도 못하였다.


19세기말, '고립주의'를 벗고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였던 미국은, 일본이 ‘청일 전쟁(1894~1895년)’에서 승리하자, 1895년 이후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영국과 ‘영일동맹(1902)’을 맺고, ‘러일 전쟁(1904~1905년)’에서도 승리하자, 아시아에서 ‘승자의 몫(Lion's share)’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을 인정하는 대신, ‘미국스페인 전쟁(1899)’으로 확보한 필리핀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이는 ‘테프트’ 미국 국무장관과 ‘가쓰라’ 일본 외무대신이 체결한 이른바, ‘테프트가쓰라 조약(1905)’인데, 이 조약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일본에겐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오랜 염원을 이룬 조약이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일본을 가장 중요한 우방국으로 대하면서, 제1차 대전 이후, 미국 ‘월슨’ 대통령이 식민지 국가의 독립을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궐기한 3.1 독립운동도 승전국의 식민지는 예외라며 외면하였고, '잔악하고 무도한' 일본의 만주점령과 ‘중일 전쟁(1937)’에 대해서도, ‘단지, 일본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Non-recognition Policy)’는 정도의 애매한 표현으로 일본의 각종 침략행위를 두둔하고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지만,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석유, 고무 등 전략물자 생산이 전무한 일본은 ‘중일 전쟁’ 도발에 이어 ‘대동아 공영권(大東亞 共榮圈)’을 외치며 동남아로 침공하며, 미국이 일본의 침공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선수를 치고자 하와이 ‘진주만’ 미국 함대를 기습한 것인데...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불타는 미 전합 '애리조나'

‘루스벨트 대통령(3선 대통령, 1933~1945년)’은  일본이 자국 영토를 기습하자 큰 충격을 받고 분노하였다. 그는 즉각, ‘테프트가쓰라 조약’으로 ‘청일 전쟁 이후 ‘진주만’ 기습 때까지’ 일본이 누렸던 모든 특권을 부정하였다. 여기에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권리도 포함되었다. 즉, 일본에게 ‘승자의 몫(Lion's share)’으로 주어졌던 한반도를, 이제는 일본이 ‘훔쳐간 땅(Stolen property)’으로 규정하였다. 한반도를 원래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하는 땅으로 그 위상을 바꾸고 국제 관심 지역으로 편입하며, 연합국의 관심을 촉구하였다. 덕분에, 미국이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한반도 독립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루스벨트’의 분노는, 미‧영‧중의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과, 미‧영‧소의 ‘테헤란 회담(1943년 12월)’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일본이 훔쳐 간 영토의 원상복귀’는 ‘한반도 40년 신탁통치 후 독립론’으로 발전되었고, ‘스탈린’도 동의하였다. 이처럼, ‘루스벨트’의 분노가 정치적 신념으로 구현된 ‘신탁통치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논의한 미‧영‧소의 ‘얄타 회담(1945년 2월)’에서, 패전한  일본과 독일의 영토 관리 방침 등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차이점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가 패전국 ‘영토 할양과 배상’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에 대한 전후 처리는 철저히 미‧영‧불‧소 4대 승전국에 의한 점령국의 ‘분할 통치’였다. 다만,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국에게 대만과 만주의 귀속을 인정하고, 한반도를 비롯한 일본의 모든 점령지에는 미국, 소련, 중국 3국에 의한 신탁통치로 제의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독일항복 직전인 1945년 4월에 병사하자, 부통령 ‘트루먼’ 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루스벨트’의 구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틀어지게 된다. 



무지와 오만으로 너무 쉽게 그어진 북위 38도선


1945년 5월 독일항복 이후, ‘포츠담 회담(1945년 7월)’ 중의 3개국 참모총장 군사회담에서, ‘안토노프’ 소련군 참모총장이 ‘마셜’ 미군 참모총장에게, 미군이 우리와 함께 한반도 침공 작전을 수행할 것인가?”라고 묻자, 마셜은, 일본 규슈에 상륙할 공군만으로 한반도가 통제 가능하므로 육군의 한반도 상륙은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한반도 진입을 부정했다. 이에, 양측은 북위 41~42도 사이 동남서북 선을 기준으로 해상, 공중 작전 한계선에만 합의했다. 하지만, 원래 포츠담선언에 합의된 소련의 작전 지역은 만주 지역에 제한되었었다. ‘마셜’의 발언을 보면, 한반도는 미국의 관심밖이었다. 그리고, 그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참고로, 그의 발언은 물론 아래 내용을 보듯, 미국은 한반도 독립에 일등공신이기도 했지만, 한반도 분단의 주역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에, 소련군은 미리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8월 9일에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급히 만주로 진군하였다. 수년 전, 일본과 소련은 각각 태평양 전쟁과 유럽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비밀리에 ‘일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소련의 배신(?)으로 일본으로서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소련이 침공하자, 그동안 ‘대동아 전쟁’ 지원으로 정예군을 차출당하여, 허울만 남은 만주의 일본 관동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8월 11일 소련군은 만주 대부분을 석권하고, 8월 12일에는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였다. 이때,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군은 1,000km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원폭투하 전까지, 천황제 유지와 한반도 등 양보를 거부하며 물밑 협상을 벌이던 일본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였고, 8월 10일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자, 미국은 오히려 급작스러운 일본의 붕괴를 염려하였다. 


특히, 소련군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며, 소련군은 한번 점령한 지역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았다. 이는, 1945년 5월 독일 패망 이후 소련군과 접촉한 미군의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었다. 이에 미국은 소련군과 일본군 항복을 분리 접수하되, 일본의 군정에 소련 참여치 못하도록 소련군의 남진을 일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지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720여만 일본군의 무장 해제 대응책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 속에, 8월 11일 새벽 미육군부 정책기획반장 ‘본스틸’ 육군 대령과 정보반장 ‘러스크’ 육군 중령은, “38도선이 한반도를 대략 반으로 나누면서수도 서울과 인천항 확보를 고려했다며 극동 지역 미소 작전 한계선 및 일본군 무장해제 지역 경계로 북위 38도선을 육군부의 안으로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한반도 문화, 역사, 민족, 언어 등을 고려하기는커녕, 정확한 축척의 한반도 지도조차 손에 없었다.


육군부가 제시한 38도선 의견에 대해, 육군부‧해군부‧국무부의 ‘3부 정책협의회(SWNCC)’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해군부는 ‘요동반도 여순, 대련항을 포함할 수 있는 39도선’을 제시하였고, 국무부도 ‘중국의 대련, 여순항이 한반도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며, ‘소련군의 일본 군정 참여를 저지하기 위하여 되도록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여야 한다며, 한반도만으로도 미‧영‧중‧소 4 대국 신탁통치를 할 때 영국과 중국에 떼어 줄 지역적인 공간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육군부가 ‘한반도 무장해제를 할 미군이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으니 이를 고려해 달라’고 주장하자, 이를 참작하여 각 부 장관의 재가를 거쳐, 트루먼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일반명령 제1호로 이를 확정하였다. 미국이 조심스럽게 제시한 북위 38도선에 소련은 아무런 이의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육군 대령으로 예편 후 후일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었던 ‘러스크(Dean Rusk)’ 중령은, 소련이 38도보다 훨씬 남쪽의 경계선을 요구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의 제의를 너무 쉽게 받아들여 다소 의외였다”라고 술회하였다. 미국의 양보가 지나쳤다. 


당시, 소련군은 미국이 제의한 38도 선보다, 북위 40도선 이북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추정한다. 왜냐하면, 소련군의 진공속도나 움직임을 보면, 포츠담회담에서 양국 참모총장이 합의한 북위 41~42도 사이의 해상과 공중작전선에서만 작전하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일부 미 육군 영관급 실무장교들이 포츠담회담에서 마셜과 안토노프’ 장군이 합의한 북위 41~42도 선의 미소 간 해공군 작전한계선도 모른 채일본군 무장해제선으로 북위 38도선으로 건의하였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더구나, 당시 원폭의 위력을 목도한 소련은 미국의 요구가 무엇이든 거부하기 어려워, 신의주를 지나는 북위 40도 이북도 합의가 가능하였을 텐데, 미국이 지나치게 허술하게 접근했다. 참고로, 그로부터 6년 뒤인 1951년 2차 대전 이후 일본 영토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에 '러스크'는 미국무부 극동지역 차관보로 독도문제에 참석하였는데,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근거가 없다 “고 주장하여 한반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었다. 당시 그의 발언은, 한-일간 독도 영유권 분쟁의 원초를 제공하였기에, 분단과 더불어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많은 유감이 따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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