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일 저녁,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국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 행사를 베풀었다. 여기에, 중국을 대표한다는 28세의 피아니스트 ‘랑랑’이 초청되어 프랑스 곡 하나와 중국 곡 하나를 마치 웅장한 서사시처럼 연주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때 연주된 중국 곡은 ’나의 조국’이라는 곡으로 한국전쟁 중 미국과 싸웠던 중국 인민지원군(이하 ‘중공군’)의 ‘상감령 전투’를 묘사하여, 1956년에 제작된 ‘상감령’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좌로부터 피아니스트 랑랑, 후진타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 2010년
‘상감령 전투’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중공군이 ‘조선(한국) 전쟁에서 미군에게 거둔 최대의 승리’라며 열렬히 선전하는 전투다. 특히, ‘마오쩌둥’은 1956년에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거국적인 영화제작을 지시하였고, 이들은 각종 승전 스토리로 ‘미제 타도’를 염원하는 중국 인민들의 ‘신화’로 끌어올렸다.
이 영화에서 ‘나의 조국’은 미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갱도 속에서 부상을 입고 죽어 가는 지휘관을 위해, 중공군 병사들이 불러 주는 곡으로,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 오면 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다”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이 가사에서 ‘승냥이와 이리’는 당연히 ‘미군과 연합군’을 지칭한 것이다. 이 곡은 중국에서 다양한 공식행사에 쓰이며 중국의 제 2국가로 불릴 정도여서 ‘후진타오’ 주석은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중국인 중 그 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포장하여,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에서 연주하였고, 대통령으로부터 초청받은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지만 뒤늦게 알아차린, 미국 언론들이 앞다투어 백악관의 무지를 비난했다. 외교적 결례 여부나 백악관 의전, 경호요원들의 무지를 따지기 전에, ‘웃는 얼굴로 가슴에 비수를 품은’ 중국인들의 뒤끝과 음험함에 미국인들은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상감령’ 영화 포스터(1956)
중국인들이 이처럼 미국을 ‘승냥이와 이리’로 부른 것은, 승냥이나 이리가 수십 마리씩 떼를 지어 목축 동물에게 사납게 달려들고, 심지어, 호랑이에게도 달려든다고 하니, 그런 모습에서 빗대어, 6‧25전쟁 시, 유엔의 이름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동맹 16개국이 마치 승냥이 떼처럼 자신들을 공격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이들을 승냥이 떼로 바라본 것은… 중국인의 뇌리에는 1900년대 초, ‘의화단’ 사건 때 미국 등 서구 8국 등이 몰려와서 ‘북경의 55일’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허약한 청나라를 유린하고 중국과 중국민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자행한 몸서리치는 만행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탓이다.
6‧25전쟁 초, 망국의 위기에 몰린 한국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겼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무너져 내린 국군은, 전투의지가 약했다기보다 화력과 기동력이 빈약하고, 체계적인 교육훈련 부족으로 전술전기가 미숙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감당하기에 벅찼다. 그렇지만, 국군은 사명감과 충성심으로 용맹을 발휘하며 북한군과 맞붙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되찾고 북한군을 능가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통일의 염원을 갖고 38선 너머로 북진을 계속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중공군이 기습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며, 북진을 계속하던 국군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북한군보다 훨씬 전투력이 강한 중공군은 유독 한국군만 골라서 먼저 때렸다. “항상, 국군을 먼저 쳐라”는 것은, 약한 국군을 쳐서 방어선을 허물고, 그 틈새로 침투하여 미군을 친다는 ‘마오쩌둥’의 특별 지시때문이었다.
중국의 기습개입으로 매번 공세 때마다 정신없이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북진통일’을 눈앞에서 놓치고 한이 맺힌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을 ‘오랑캐’라고 깎아내렸다. ‘오랑캐’라는 뜻은 뭘까?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오랑캐란 ‘예전에, 두만강 일대의 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족을 멸시하여 이르던 말’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옛 조선도 중국처럼 침략자를 업신여겨 ‘오랑캐’라 불렀다. ‘명’ 중심의 ‘사대’에 사로잡힌 조선은 일본, 여진 등 주변국을 ‘오랑캐’로 멸시하였다. 하지만,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이나 17세기의 병자호란 등 남, 북 오랑캐들의 침략으로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오랑캐’들의 의도나 능력을 알지 못하여 ‘하찮다’고 업신여겼지만 ‘오랑캐’들로부터 모진 고통을 당했다.
서글픈 것은, 그렇게 처참한 병자호란을 당하고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미 세계의 중심이던 당시의 ‘청’을 ‘북벌’한다며 거의 100여 년간 몸부림치다가, 18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청’을 자기들 조선이 배워야 할 선진대국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청’을 ‘기댈 언덕’으로 알고 전심으로 섬겼다. 그렇지만, 얼마 후, ‘청’은 ‘아편전쟁’에서 패하며 힘을 잃었다. 그러자, 이번에 철모르는(?) 조선은, ‘청’을 제압한 서구를 ‘양이(서양 오랑캐)’라 배척하고 나섰다. 사대주의와 주종관계에 충실하였던 조선의 선비들은, 상황을 항상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연속해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조선의 근대사는 무지로 인한 아픈 역사의 반복이었다.
이처럼, ‘오랑캐’는 시대별로 대상이 바뀌었지만, 1950년 통일 한국의 부푼 꿈을 무참히 짓밟은 중공군은 당연히, 조선 중기의 ‘청나라’ 못지않게 우리에게 불구대천의 원수 같은 ‘오랑캐’였다. 그렇게, ‘승냥이’와 ‘오랑캐’라는 미‧중 양 강대국이 엉뚱하게 한반도에서 서로 치열하게 맞붙어 3년여에 걸친 ‘소규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피아간에 150여만 명(국군 13만 7899, 중공군 19만 7653명 전사)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전국토가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미‧중 양국은 승부도 내지 못하고 정전협정을 하고서야 비로소, 총성을 멈추었다.
그렇지만, '북진통일'을 주창하던 이승만 정부는 6‧25전쟁 휴전 이후에도 국민에게 중공군을 향한 적대감을 최고조로 고취시켜, 한동안 일반인은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초, 중, 고교 학생조차 모두들, “~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 중공 오랑캐…” 노래를 각종 행사에서 목청껏 불렀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그들과 정식 국교를 맺었다. (6‧25전쟁 이후 공식 호칭이던 ‘중공군’을, 한중 국교수립 이후에는 ‘중국군’으로 개칭하였다) 모든 행사에서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오랑캐!”라는 구호를 마음껏 외치며 전의를 불태웠던 당시 학생들의 기개는 대단하였지만, 중국이, G2의 반열에 오른 현재,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보복을 우려하여 마땅히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모습이다. 우리의 기개는 이제 흘러간 옛노래가 되었다.
그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정의로움에 대해 “정의는 힘이 있는 국가만이 주장할 자격”이 있고, “강대국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고, 약소국은 당할 것을 당한 것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당시의, 한국은 누가 뭐래도 약소국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