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들이닥친 외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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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과 대륙 사이에 위치한 반도 국가의 숙명은 기복이 심하지만, 특히 우리 한민족은 오랜 역사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과 관계에서 ‘힘 있는 자’에게 휘둘렸다.
BC 108년,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한 4군(漢4郡)을 설치한 이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퇴한 1895년까지 2,000여 년간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예컨대,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하겠다”라고 하면 고려는 말과 배를 준비해야 했고, 일본이 “명을 칠 테니 길을 내어라(征明假道)”고 하면 조선은 기를 쓰고 일본을 막아야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전쟁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도전과 응전”일까? 1467년부터 시작된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그 시대적 특성이 하극상이었다. 절대 맹주가 없어지자, 각 지방 영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모두가 '더낫게'를 외쳤다. 이렇듯 각 영주가 힘을 추구하자 이 시기에 오히려 국가 전체 경제력이 급성장하였던 아이러니도 경험하였다. 반면에, 조선은 ‘세종’ 이래 나라를 흔들 만한 큰 변동 없이 정체된 경제력을 유지하였다. 평온과 안정 속에 어떤 위협도 없으니, '이대로'라는 현상유지가 모두의 목표였다.
전국시대가 한창인 1543년 어느 날, 태풍으로 표류하던 포르투갈 난파선이 일본에 상륙하였다. 일본에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소개되던 순간이었다. 일본 규수 남단의 도주 ‘도키다카’는 포르투갈 선원으로부터 ‘머스킷(Muskeet, 화승총)’ 2정을 샀다. 대가는 은 2,000냥. 지금 가치로는 대략 20억 원으로, 당시 가치로 병사 200여 명의 1년 동안의 유지비용이었다. ‘조총’의 가치를 알아본 그의 혜안이 놀랍다. 수십 년간 익힌 무예로 전장을 풍미하던 사무라이가, 그야말로 농민 출신 잡병들의 ‘조총’ 사격 한 방에 칼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그냥 쓰러졌다. ‘조총’의 비대칭성은 전투 패러다임을 바꾸고, 일본은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되었다.
일본이 조총을 받아들인 지로부터 50여 년 뒤 1591년, 조선에 조총(뎃포)이 소개되었지만, 당대 최고 무장 ‘신립’ 장군을 비롯한 조선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거리 50여 미터에 불과한 위력에 비해 장전 시간이 길고, 우천 시 사격이 제한된다는 단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단견에 비해 일본의 발상 전환은 눈부시다.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을 이용하여 승승장구했다. 뒤이어 간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조총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한, 두 정의 위력은 별로지만, 수백 정의 조총을 조별로 정렬시켜 교대로 동시 사격을 해대면 그 위력은 과히 압도적이었다. 관점의 차이가 역사를 바꾸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이 보유한 조총의 총량이 전 유럽 보다도 많았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이 침략했다. 이후 7년간의 전쟁에서, 조선 육군은 속수무책으로 백성 ⅓이 죽고 수많은 문화재와 도자기 등 현대의 IT에 버금가는 당대 최고의 기술이 약탈당했다. 다시 40여 년 뒤,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청나라에게 무기력하게 치욕과 굴종을 당했다. 북벌을 다짐하고 복수를 맹세했으나 공허한 메아리였다. 그리고 다시, 250여 년 뒤인 1894년, 반침략, 반봉건을 주창하던 동학농민운동으로 역사의 물꼬를 돌릴 수 있었던 기회마저, 조선 왕실의 비겁함이 자초한 외세 개입으로 산산조각 무산되었다.
1894년, 죽창을 든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연합과 ‘우금치(공주)’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다. 계속 같은 전법을 반복하다가 7,000여 명(2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자료도 있슴)이 몰살당한 동학군에게는 격전이었으나, 극소수가 전사한 관군과 일본군에게는 무의미한 살육전이었다. 패배의 원인은 벌컨포와 비슷한 최신 ‘게틀링’ 기관총과, 한번 장전에 15발 사격이 가능하고 사거리가 800m인 일본군 ‘무라다’ 신식소총이었다.
무기체계의 차이는 극명하고 참혹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간 조총(사거리 120m에 한 발 장전에 2~3분 소요되는 화승총) 수준이었다. 동학군 대부분은 이마저도 조총 숫자가 부족하여 죽창을 들었다. ‘부적을 태워 먹으면 총알이 비켜 갈 것’이라는 신념과 강인한 정신력조차, 6, 7일 동안 40~50여 회의 격전을 치르는 동안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대로’가 편했던 것일까?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였다. 책만 읽지 아무런 생산력이 없는 선비는 양반이라며 공맹(孔孟)을 논하며 현실안주를 원했다. 변화는 자신들의 위상을 위협하는 일이었기에, 이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하며, 변화와 혁명을 억압하고 적대시하였다.
이에 비해, 똑같은 ‘사농공상’ 신분제도를 가졌지만, 조선의 사(士)가 선비를 지칭하는데 비해, 일본의 사(士)는 무사(사무라이)를 의미한다. 무사는 늘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다. 안주는 죽음이니 투쟁과 발전을 위해, “더 낫게”를 찾아야 했다. 왜란 이후, 이어진 ‘에도 막부’는 산업 발전과 무역으로 찬란한 경제, 문화 발전을 이루었으나, 조선의 실학사상은 그 빛을 잃었다.
어떤 집단이건 위기의식을 갖게되면, 그 대응은 위기를 피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되거나,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스스로 팽창하는 것이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占)으로 서구의 진출은 동북아를 위협했다. ’에도 막부’ 말기, 일본은 미국의 흑선(黑船)에 굴복하였으나, 위기를 정면돌파하려는 일본의 하급무사들은 ‘더 낫게’를 추구하며 무능한 막부를 폐하고 '명치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일본의 ‘더 낫게’는 더욱 군사,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이대로’에 안주하던 조선은 폐쇄적인 쇄국으로 일관하다가 끝내 나라마저 빼앗기고 식민지배의 치욕을 당하였다. 관점의 차이, 생각의 차이였다. 이후에도, ‘더 낫게’를 추구하는 일본은 계속해서 중국을, 미국을 상대로, 세계를 무대로 온갖 수탈과 정복을 이어 갔다.
국제적으로도, 조선처럼 ‘이대로’에 안주하다가 ‘더 낫게’에게 폭망 한 전례는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미국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였던 서구 이주민으로부터 총 이외의 신문물을 거부하였고, 수기(손)로 작성된 ‘꾸란’에 집착하던 ‘오스만 터키’가 ‘인쇄술’마저 거부하였던 덕분에 최근에서야 아랍어 꾸란이 해당국어로 번역, 인쇄되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아프간 ‘탈레반’이 외부세계로부터 단절을 위해 TV 시청조차 제한한 사례다. ‘이대로’에의 집착은 무지의 발로나 안주만 바라던 기득권 세력의 귄익 유지에 다름 아니었다.
근세 들어, 조선의 국력이 쇠진하자 청일 전쟁이든, 러일 전쟁이든 조선 영토, 영해에서 벌어진 고래 싸움에 애꿎은 조선의 새우등이 터졌다. “중국(청)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부추기던 일본은 1895년 중국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며 주인 행세를 했다. 이후 1945년까지 약 50여 년간 온갖 수탈을 자행하며 “말과 이름까지 바꾸라” 강요했다.
일제침략기, 종로 거리를 차지하였던 조폭들의 ‘땅(구역)따먹기’를 그린 영화가 있다. ‘하야시’라는 조폭이 종로 거리를 활보했고, 조폭을 몰아낸 ‘쌍칼’이 한동안 보호자 노릇을 자처하며 주민들의 돈을 뜯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쌍칼’이 물러날까? 그리고 물러난다고 평화가 올까? 더구나, 그가 물러서면 악랄한 옆 동네 ‘왕서방’이 또다시 빈자리를 떡하니 차지할지 모를 일이었다. 2,000여 년간 조선을 괴롭힌 '왕서방들'의 과거 행적은 끔찍한 재앙이었다. 이게 당시, 조선의 처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일본의 굴레로부터 벗어낫지만, 이번에는 낯선 백인들이 달려와서 다시 80여 년 동안이나 ‘형’ 노릇을 하고 있다. 지난 2,000여 년간 ‘형제나 군신’ 등의 주종관계를 요구했던 중국이나, 비록 50여 년간이지만 ‘민족 말살의 내선일체’를 감행하였던 ‘무단 정치’의 일본과 달리, 미국은 그나마 여러 외세 중에서 영토적 야심이 없어 ‘상대적으로 신사적인’ 우방군이라는 견해가 많기도 하다.
이처럼, 중국이, 일본이 그리고, 미국이 행세했던 우리 근대사 중에서, 일제의 폭압 이외에 가장 뼈아픈 사건은, 당연히 6‧25 전쟁(1950년 6월~1953년 7월)이었다.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된 6‧25 전쟁의 제 1막은 북한 대 남한의 전쟁이었지만,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 전쟁을 치르는 우리와 함께 미군 등 수만 명의 외국군이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싸웠다. 그리고, 약 4개월 후 궤멸 직전에 다다른 북한군을 쫓으며 유엔군이 급속하게 북진하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중공군이 '항미원조'라는 이름으로 불법 개입하여 휴전 시까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거의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며 싸운 약 33개월간의 이 기간은 한국전쟁의 제 2막이었다. 6‧25 전쟁을 미국적 관점에서 '한국전쟁'으로 통칭하고 전쟁사적으로 '미-중 전쟁'으로 보는 이유이다.‧‧
그런데,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원정군은 주둔국을 수탈하거나 유린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미국은 과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에 대한 수탈이나 착취의 의도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자신들의 국익이 무엇이든 표면적으로는 3년간 처절한 한국전쟁을 주도하면서 전쟁비용은 물론, 전쟁이후에도 안보와 경제 원조로 전후복구를 도우며 엄청난 비용을 담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마셜 플랜’이나 ‘트루먼 닥트린’의 일부였지만,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지켜본 한국민들은 자연스레 미국을 우방으로, 혈맹으로 대하였고, 역대 정권도 그들에 대해 친미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으로 일관하였다. 한때, 언론을 통제하였던 친미 군부 독재정권에서는, 반미발언 자체가 이적행위가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진심이었을 만큼 그들도 우리에게 진심이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