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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5. 2023

‘미-중’ 전쟁으로 국제전이 되어버린 한국전쟁의 상흔

 *분단을 고착화하여 민족의 한이 맺힌 7.27 휴전협정 서명이 벌써 70주년을 맞았다. 이를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전쟁은 ‘의지’와 ‘능력’의 방정식 

전쟁광들의 어릿광대 놀음

아픔뿐인 전쟁의 결과

보훈은 관심과 기억으로부터


전쟁은 ‘의지’와 ‘능력’의 방정식 

6.25전쟁 3년 중 2년 6개월간 전쟁의 주역으로서 총부리를 맞대었던 미, 중 양국은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위해?” 그렇게 피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웠을까? 그리고, 미국과 중공은, 계가(計家) 결과, “누가, 무엇을 얼마나 더 잃고, 얻었을까?”


미국은 세계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고자유 진영의 안전’을 위해서 참전하였다”라고 하였지, 한국의 통일이나 한국민의 평화와 안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 초기부터,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유 진영’ 수호라는 추상적인 명분에 집착했다. 그러니, 한반도 통일이라는 한국민의 염원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때문에, ‘승리’ 추구보다 그저, ‘38선 회복’이라는 ‘비김―무승부’에 만족하며 허겁지겁 물러나려 했다. 그러다가, 농민군 수준의 약체로 평가받던 신생 중국의 거센 도전에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의 정치적인 체면을 구기고, 군사적으로도 호되게 당한 셈이다.


반면에, 소련에 ‘등 떠밀리어’ 전장에 투입된 중국이지만, ‘마오쩌둥’이 ‘항미원조(抗美援朝)’로 ‘중조 인민연대’를 외치며, “북한을 구하겠다”며 세계 최강 미국에 도전하였다. 그는, 북한의 남침을 묵인하고 지원하였던 전쟁을 지켜보다 북한이 밀리자, ‘순망치한’을 내세우고, 미국에 기습적으로 덤벼들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은 한국 전쟁을 '남의 전쟁이 아니라, 나의 전쟁으로 여긴다'는 중국식 의지의 표명으로 영토보존'의 수단이었다. 그는 또한, 이제 막 자리잡은 공산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보가위국(保家衛國)'을 내세웠다. 이처럼, 신생 중국의 수반 '마오'에게는 외세 배격, 영토 보존, 체제 수호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국책 과제였다.  


중국이 6‧25 전쟁을 '결사항전'을 의미하는 ‘항미원조’라 부르는 데는, 분명한 목적과 의미가 있다. 이는, 소련 스탈린의 전쟁 지원 약속과 막대한 경제 원조를 기대한 측면도 있지만, 과거 서구의 만행으로 인하여 수많은 중국인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강한 외세’ 트라우마를 가졌기에, '반 외세'라는 인민의 정서를 무시 못한 측면도 강했다. 중국인에게 ‘항미원조’는 애국주의를 넘어 ‘중화 민족주의의 자부심’에 가깝다. 


중국은 또한 영토보존에 사활을 걸었다. 참전 초기에 수차례 기동전을 수행하며 전술적 우세를 거두었지만, 군수물자 조달을 이유로 38선 근처에서 공세를 멈춘 데서 보듯이 ‘한반도 적화통일’보다, 미군 등 유엔군을 중국 국경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떼어 놓고, 북한을 완충지대로 만들어 ‘피해 최소화’라는 ‘정치적 목표’에 집착하였다. 그렇기에,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을 치르고도 ‘정전’을 ‘승전(?)’으로 알고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참전을 계기로, 공산주의 체제를 보호하려는 '마오'의 ‘정치적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하였다. 참전으로 희생된 많은 젊은이의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군사, 경제 원조를 받고, 내부결속을 다지며 공산당 체제 안정을 이루며 그야말로, 중국 통일의 뒷수습 감당에 크게 일조하였고, 소련의 항공기 등 장비 지원으로 엄청난 군사력 증강도 가져왔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 더욱이, 유엔으로부터 ‘불법 침략자’로 낙인찍혀, 수십 년간 ‘죽의 장막’ 속에 갇혀 고립무원의 상태로 지내는 동안 3등 국가로 전락하였다. 


전쟁광들의 어릿광대 놀음

결과적으로, 전쟁은 ‘의지와 능력’의 조합물인데, 한국전쟁의 주역들은 ‘승리’라는 목표에 대해 미군이, 현실적인 능력에 비해 의지가 없었다면, 중공군은 의지에 비해 현실적인 능력이 없었다.’ 마치, 바둑판의 수많은 사석(捨石)으로 초반의 판세에서 확보한 지역마저 상쇄하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냉전 해체 이후 공개된 각종 소련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한반도라는 작은 장기판에서 놀았다면, 스탈린은 큰 스크린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한반도 적화통일에 몸 달아 있었는데, 스탈린에게도 전쟁을 시작하면 전략적 이득이 많았다. 한반도가 적화되면 김일성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고미국이 확보한 일본에도 큰 위협을 줄 수 있으며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 미군 전력을 소모시킬 수 있다. 그리고미국의 개입으로 중공도 참전할 것인데그리되면 중국의 대만 통일은 물 건너갈 것이니중공은 발전은커녕 오랫동안 전쟁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다또한미국과 중국이 아시아의 한 귀퉁이인 한국전쟁에서 서로 붙들고 허덕이고 있는 동안 소련은 유럽의 공산화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는 전략적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항공기도 없고 대공 능력도 미약한 전투력으로 참전을 머뭇거리던 ‘마오’가, ‘저우언라이’ 부주석을 보내어 소련의 적극지원 가능성을 다시 타진하러 오자,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공군지원은 약속하지만 중공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중 엄호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초기 한국전쟁에서 보듯미국은 전쟁 준비가 부실하고일본이 도울 상황은 못 되며이런 이유로 미국은 중국에 굴복할 것이고그리되면미국의 대만 포기와 일본 재무장 불가로 이어질 것이라며 중공의 개입을 촉구하였다. 스탈린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군으로부터 패주 중인, 김일성에게는 “한반도에서 철수하라”는 이중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 같은 스탈린의 교활함을 의식한 트루먼은, 늘 ‘유럽 안보 우선’이라는 표현으로 나토군 사령관 ‘아이젠하우어’에게 힘을 실어 주는 반면에, 한국전에서의 확전을 경계하면서 ‘맥아더’를 견제하였고, 그것이 유엔군의 초기 전쟁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스탈린의 계산대로 한국과 북한은 망국의 위기에 직면하였고, 미국과 중국도 엄청난 전비를 치르고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의 주역 노릇을 하였던 미, 중에 끌려다니던, 한국이나 북한은 제 땅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서로 간에 큰 생채기를 내며 감정의 골과 적대감만 더욱 깊어졌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전쟁의 참화 속에 양측은 오랫동안 엄청난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다.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승만'에게는 정치적 위기를 넘긴 호재(?)였지만,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 엄청난 인명 희생과 사회, 경제적 손실, 그리고 수십 년의 역사적 퇴보를 망연자실한 채 받아들이며, 전후 복구라는 큰 고통을 감당하여야만 하였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 역시, 잿더미만 남은 현실을 피하기 어려웠다. 특별히 '남한 적화'라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전쟁을 도발한 자로서 그 역사적 책임을 결코 면치 못할 것이다. 


아픔뿐인 전쟁의 결과

3년 가까이 치른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공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인적인 면에서, 미군은 육군과 공군의 ⅓, 해군의 ½ 등 연(延) 병력 485만여 명이 참전하여, 사망 5만 4,246명, 부상 46만 8659명, 실종, 포로 등 52만 8,038명으로 피해를 입었고, 영국 등 기타 참전국들도 1만 7,825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한국은 여전히 미수습된 전사자만 12만여 명 이상으로 유해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반면에, 25개 야전군(군단급)과 16개 포병사단, 10개 수송사단, 12개 공군 사단 등 연 병력 300만여 명이 투입된 중공군도 사망 14만 8,600여 명, 부상 79만 8,400여 명, 포로 기타 등 100여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은 사망자 숫자를 공식적으로 197,653 명으로 밝히고 있다)


좌로부터 중공군 전사자, 미군 및 유엔군 전사자, 국군 전사자 수


한편, 물적인 면에서도, 미군은 전차 777대, 항공기 944대, 함정 5척의 피해를 입었고, 공산군은 전차 1,178대, 항공기 2,186대, 각종물자 560여만 톤 등의 손실을 입었으며, 전쟁 경비도 미국은 200억 달러 이상을 소진하였는데, 중공도 50억 달러 (중국화폐 62.5억 원) 정도를 소모하였다. 그런데, 중공의 경우 이 같은 전비를 조달하느라 소련에게 진 빚 때문에 향후 십수 년간 국가 경제 운용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 중공은 한국전 휴전 이후, 전쟁을 통하여 흘린 피를 대가로 ‘이념적 동지애’를 기대하며 소련의 ‘조건 없는 원조’와 빚의 탕감, 그리고 더 많은 지원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사후, ‘타산적 계산’으로 일관하는 새로운 소련 지도부와 갈등을 겪었으며, 향후 중소 분쟁 등 양국 관계가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참전 초기부터 미, 중 간의 군 현대화 수준에서, 현격한 차이를 느끼던 중공으로서는 전혀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비록 초급 수준이긴 하나 제병협동작전 시도, 기동전에 의한 섬멸전 경험, 갱도 중심 고수방어체계 건설, 열악한 군수보급 지원체계 개선, 대공방어능력 보강, 군사투쟁과 정치투쟁의 조화, 전투와 휴전 회담의 경험, 무기체계 강화, 공산주의사상 등 정치공작 운용, 마오쩌둥 군사사상 확립 등등으로 기껏 농민군 수준에서 어느덧 대규모 현대전을 수행할만한 군대로 거듭났다. 한국 전쟁이 중국을 강하게 키워준 것이다


보훈은 관심과 기억으로부터

역사 평가의 잣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얼마나 잘 기억하느냐?”이고, 이는 국민의 관심과 기억력에 달렸다. 


'알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미국 대통령(출처: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근교, ‘알링턴’ 국립묘지는 많은 미국인들은 물론, 외국 원수나 국빈도 찾아 헌화하는 곳이다. 녹색 잔디밭 위에 가로 세로줄 맞추어 꼽아 놓은 수많은 흰색 십자가는 이들 역사의 자부심이다. 다 민족국가이지만 미국인의 군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유별나다. 국가가 그만큼 많은 전쟁을 치르며 성장하였고, 개인도 각종 전투에서 계급고하를 불문하고,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인 탓이다. 


미국인들은 행여 전투 영웅들을 잊을세라 항공모함 '니미츠', '에이브럼즈' 전차 등등 군의 주요 전투장비는 물론, 주요 거리나 건물, 각종 기관에도 숱한 전몰자들의 이름을 붙이고 해마다 이들을 기념한다. 아마도,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자들에 대한 도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여 국가나 국민들이 부를 시 언제든 나설 수 있는 용기와 자부심을 갖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필자가 근무하였던 오스트리아도 '전쟁으로 흥하였고, 전쟁으로 망한 나라'였다. 전쟁 때마다 많은 군인이 죽었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 모두 국가의 부름을 받고 희생된 죽음이었으니... 국립 박물관은 물론, 시골마을 교회나 고등학교 곳곳에 자기 마을 출신 참전 용사의 이름 하나하나를 새겨 그 면면을 후손이 기억하게 하고 있다.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영국, 독일 등 유럽 각국도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현리'지구 전투 위령비와 '다부동' 전투 전적비

1950~53년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수 십만 명의 군인들이 산화하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그 긴 기간, 수많은 전투현장 곳곳에 명예와 희생의 스토리가 점철되어 있을 터이다. 전투 하나, 하나가 치열했던 만큼 국군 용사 중에 영웅으로 기릴만한 사람이 수 없이 많겠지만, 정작, 영웅으로 알려져 조국과 민족으로부터 추앙받는 사례는 많지 않다. 전쟁 이후, 어려운 국가 형편으로 그랬다지만 그저 몇몇 '전적비'와 '무명용사 기념비' 정도로 기리는 것은 안타깝다. 그리고, 더욱 황당한 것은 전쟁통의 기록 부실을 이유로 엄청난 실종자가 발생하여 일반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일일이 제대로 예우를 갖추지 못하는 것인데…, 여전히 십 수만에 달하는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가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록, 군이 집권한 시절도 있었지만, 몇몇 정치군인으로 인한 과거의 편견 때문에 그 역할과 존재가 폄훼될 수 없다. 군은 '국민의 자제들로서 국민의 사랑을 먹고사는' 집단이기에 군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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