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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4. 2023

휴전 이후 미, 중의 남, 북한 지원

 *분단을 고착화하여 민족의 한이 맺힌 7.27 휴전협정 서명이 벌써 70주년을 맞았다. 이를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중공군이 넘겨준 땅굴과 갱도 진지 

1970년대 후반, 북한 김일성은 전쟁 준비를 완료하였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6‧25 전쟁 미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혼쭐이 난 북한이공군력 보강도 없이 전쟁 준비를 완료하였다고무엇이 큰소리를 친 배경이었을까?” 북한은 1963년 이래 소위, ‘국방 자위’ 정책을 내걸고 ‘전 국토의 요새화, 전 인민의 무장화, 전 장비의 현대화, 전 군의 간부화’ 등 이른바 ‘4대 군사 노선’을 완성하였다. 이 중, 눈여겨볼 대목은 ‘전 국토의 요새화’인데, 북한의 땅굴과 갱도 진지는, 6‧25 전쟁 전선 교착 시 중공군이 유엔군의 엄청난 화력 공세를 만회하고 생존수단으로 만든 진지를 1958년 중공군 철군 시 거저 물려받은 것이었다.


당시, 중공군은 화력 열세 상쇄와 생존성 향상을 위해 ‘갱도 진지’를 선택하였지만, 유엔군 공습으로 탄약, 식량 등 각종 보급지원 능력조차 거의 바닥이었으니, 땅굴 굴착도구나 장비, 전문 토목기술자 지원도 없이 지하 진지 구축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중공군이 땅굴 구축에 보인 노력과 집착은 상식적인 차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국군도 수십 년 동안 ‘단계별 진지 공사’나 ‘주둔지 기지화 공사’ 등 진지보강 공사를 해마다 실시하였지만, 국군의 진지 공사는 갱도 구축보다는 지표면에 참호 공사나 콘크리이트 타설 공사 수준이라,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지는 등 진지로서의 기능 발휘가 어려웠다.


1970년대 북한군이 휴전선 지하로 파 내려온 서, 너 개의 땅굴발견으로 온 한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고 일부 귀순자는 여전히 발견치 못한 땅굴이 20여 개 정도 더 있다”라고 증언했다. 만약, 전시에 이런 땅굴에서 1개 연대 병력이 아군 GOP(General Out Post: 일반전초) 후방 지역에 나타나 기습한다면…?, 아군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북한군은 순식간에 전선을 장악할 것이다. “‘속도전으로 7일 만에 서울을 포함한 한강 이북을 장악한다는 북한군 시나리오의 전제조건은, ‘땅굴’ 등 육‧해‧공에 걸친 ‘기습작전’이었던 것일까?


중공군은 보병용 일반 갱도처럼 포병의 갱도도 동굴 진지로 구축하였다. 6‧25 전쟁 당시에는 작은 입구에 엄폐, 은폐물을 만들어 놓고 76.2밀리 야포나 중박격포 등으로 아군에게 타격을 가하고는 동굴 속으로 사라지는 적 동굴 포병은 제압이 어려워, 큰 위협이었다.


이처럼, 위협이 크다 보니 6‧25 전쟁 중에도 미군은 적의 지하갱도 파괴에 고심하였다. 1951년 11월, 강원도 양구 ‘펀치볼’에서 미 7사단 포병 48대대는, 항공이나 야포로는 파괴하기 어려운, 적 동굴 포병 진지를 군단 포병 8인치 곡사포로 정밀 조준 사격하여 파괴하였다. 이른바, ‘돌격사격’이었다. 원래, 대구경 중포(重砲)는 장거리 타격용이지만 2km 미만 근거리에서 직접사격 시에 소구경 경포와 달리 포신의 흔들림이 적어 정확도나 위력이 대단하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280미리 유탄포

이는, 러일 전쟁 간 일본이 러시아의 ‘뤼순(祣順)’ 요새 공략 시 러시아군의 콘크리트 ‘토치카’에 고전하다 ‘280밀리 해안포’를 동원하여 적 ‘토치카’를 무력화시킨 일본군 전사(戰史)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자주포와 달리 경사가 급하고 도로가 제한된 전선 지역의 고지 정상으로 무거운 견인포를 끌어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비록, 파괴방법을 알더라도 도로나 장비 여건상 실제 활용은 어려웠다. 


특히, 휴전선에서 서울까지 직선거리가 불과 38km로, 적 방사포 사거리 범위 내에 수천만 국민이 거주하고 있으니, 항상 적에게 ‘목줄을 잡힌 상태였다. 이처럼, 적 동굴 진지 포병은 휴전 이후에도 오랫동안 국군의 골칫거리였다. 국군은 적 동굴포병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이미 1980년대부터, 수십 개 포병 대대와, 항공 전력으로 서부전선의 적 동굴 포병에게 ‘대(對) 화력전’ 수행을 준비하였다. 


북한 공군도 땅굴을 이용했다. 휴전선 인근 황해남도 ‘태탄’, 홍해북도 ‘누천리’ 기지 등은 격납고만이라도 산속에 위치한 지하 동굴에 건설하여, 유엔 공군 공습에 대비하려 했다. 북한 공군 중, 개활지에 건설된 비행장은 평양 인근 ‘순안’ 비행장과 원산 인근 갈마반도 바닷가의 ‘갈마’ 비행장 정도다. 그런데, ‘갈마’ 비행장 인근의 다른 기지와, 서해안 남포의 ‘온천’ 비행장 인근 기지에는 ‘지하 활주로’까지 건설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설은 이제 무용지물이다. 국군은 해안포나 동굴 포병을 타격하기 위해 ‘이스라엘’ 제 점표적 타격 유도탄 ‘팝 아이’를 들여왔고, 동굴 격납고 속의 적 항공기나, 지하 활주로도 한국 공군의 스텔스기가 정밀유도 특수무기로 타격하거나, 지하벙커 파괴용 ‘벙커버스터’를 사용하면, ‘동굴 생존성 전략’을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          


미군의 한국군 증강 정책 

6.25 전쟁 내내 국군은 통수권자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북진통일’이 전쟁의 목표였다.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훈련과 장비를 보강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북진을 주장하고 기동전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38도선 회복에 만족하고 더 이상 확전을 원하지 않는 미국은 이를 철저히 말렸다. 결국, 1953년 휴전 협정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국 측은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휴전’ 자체를 거부하였고, 한국은 협상 당사자에서 제외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불신으로 미국의 군사원조는 한동안 방어용 무기체계 제공에 국한하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한 남, 북한의 군사력 발전과정은 매우 이채롭다. 1951년 7월, 휴전 회담이 진행된 이후, 공산군은 ‘갱도 진지’로 생존성 향상에 치중하였지만, 강력한 화력을 가진 미군은 국군의 교육 훈련 향상에 중점을 두었다. 이로 인해 종전 후에도 양측이 군사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져서, 북한은 땅굴, 재래식 무기부터 핵 개발까지 나아간 반면, 한국은 교육훈련에 치중하여, 미국이 개발한 첨단 전투기법을 이용한 각종 전쟁연습 등 연합훈련을 실시하며 전술전기를 연마하였다.         

미국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교육받는 한국군 장병들

 후일담이지만, 신생 독립국이 강한 전투력을 지닌 강군을 육성하려면 많은 비용과 오랜 시간에 걸친 엄청난 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뜻밖의 전쟁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당시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국인 미군으로부터 미국식 군 편제와 무기, 물자 그리고 군사 전술 교리 등을 직접 훈련받았고, 미군 장비로 새롭게 무장하였다. 그리고 연일 계속되는, ‘전쟁 프로’ 중공군과 전투를 통하여 중공군의 '싸우는 방법'과 전술교리도 덩달아 익혔다. 미-중이 싸우는 통에 한국군이 ‘졸지’에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국군의 전투력은 베트남 전쟁 참여로도 확인된 바 있다. 이 때문에, 국군의 증강 사례는, 미국의 글로벌 군사전략에서 ‘자국군 능력강화’로 미국의 부담을 덜려는 구상의 모범적인 모델로 자주 소개된다. 베트남 패망이나 아프간 항복사례에서 보듯, 부정부패한 군이나 무능한 정권에게 아무리 수십 년간 수백조 원을 투자하더라도 결코 강군이 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군사적 발전을 이룬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미, 중 양측의 휴전 후 남, 북한 복구지원

1953년 7월, 휴전 당시 북한에는 120만의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중공군 지휘부는 1958년 말, 중국으로 복귀할 때까지 전쟁에 대비하여 교육 훈련을 하면서도, 평양 일대에 널려있는 불발탄을 수거하고, 포탄 구덩이를 메우고 전쟁 피해 복구를 지원을 하였다.   


중공군의 대민지원으로, 총을 멘 채로 홀로 남은(?) 아낙의 밭갈이를 지원하는 중공군 병사들

중공군은 재건사업으로 주택, 교량, 저수지 건설, 식목, 농지개간 등 전 분야에 노력 동원과 물자지원으로 전후 복구작업을 펼쳤으며, 더불어, 주민 화합을 강조하며,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 치료사업도 함께했고, 주민들과 춤과 노래로 어울리는 대민 선전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공 자신도 경제 상황이 어려웠지만, 북한에 대한 물자지원에 성의를 보였다. ‘마오’가 “지원군의 업적은 조선 인민들의 평가를 듣겠다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다가 휴전 직 휴전협정을 방해하지 않겠다며,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 조약과, 경제, 군사원조를 이끌어내었다. 휴전이 성립되자 ‘아이젠하워’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미국은 휴전선 경계를 담당하여 한국의 군사비 부담을 덜었다. 미국은 또한, 경제, 군사원조 등 제공과 더불어, 각종 사회, 종교단체들까지도 가난한 한국을 위한 각종 사회적 후원을 제공하여, 한국 정부가 하기에 따라서는 경제적 성장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6‧25 전쟁 중, 폭격으로 거의 모든 산업 시설과 그 기반이 붕괴되었고, 수천만의 피난민, 수백만 명의 사상자, 수십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전쟁고아가 발생하였다. 또, 수백 년간 유지해 오던 미풍양속과 함께 조선 시대의 완고한 ‘양반 상놈 신분(班常) 제도’와 소작농조차, 전쟁 통에 철저히 붕괴되자, 질서와 체제가 사라진 사회 전반이 지도력의 부재 속에 극심한 혼돈과 혼란에 빠졌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는, 미국 공법 480(Public Law 480)’에 의한 잉여농산물 원조 물자로 연명하였다지만, 재건과 부흥에 대한 의지조차 없었던 정치가의 무능과 비전이나 목표가 없었던 관료들은 부정부패와 비리라는 중병마저 앓고 있어서 미국이 제공한 엄청난 경제 원조로도 경제재건은 꿈도 못 꿨다. 더구나, 미국의 경제 원조는 ‘By American’ 정책으로 직접적인 현금지원보다 한국 정부가 원하는 산업재 등을 ‘반드시 미국제를 사게 하는 정책(‘Buy American’)’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경제의 대미종속은 가속화되어 갔다.


게다가 시장경제는 미군기지로부터 흘러나온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와 양주, 바나나, 커피, 캔 음료 등의 각종 생활물자가 관세 없이 암시장으로 유입되었고, 미국이 만든 물건은 크고, 강하고, 튼튼하다며, 전쟁을 통해 이를 체험한 한국인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처럼, 외국 물품에 대한 동경은 가뜩이나 산업기반과 국산품 생산능력이 취약한 한국으로서는 시장경제를 유지하기 벅찰 정도로, 국가 경제는 그 존립마저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문화적 침투도 심각했다. 주한 미군 전용방송인 ‘AFKN(AFN의 전신) TV’는, 재즈나 팝송은 물론, 할리우드 영화나 코미디 등 미국 문화를 가감 없이 우리 사회에 흘려보내 고유의 전통, 복식, 주거환경 등도 급속하게 침식시켰다, 일부 청소년들은 우리 전통문화보다 미국 문화모방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미니스커트’나 ‘좌식 양변기’ 등 미국 모방이 시대적 조류로 자리 잡았다. 국민 모두가 엄청난 전쟁 후유증으로 극심한 ‘트라우마(외상 후 후유증)’를 겪어서일까? 서구 기독교는 한국에서 유례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의지의 한민족

이처럼, 암울한 정치, 경제 현실에서 그나마 한국인이 잘했던 것은 교육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었다. 이조시대 학문 숭상으로 출세의 지름길이던 과거제도나,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대학생의 가치를 눈여겨본 부모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줄 자식의 모습을 그리며, 자녀 교육에 소를 팔고, 육체적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극빈국 가운데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기록하였고, 많은 고급 인력이 언제든지 서양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흡입할 준비를 다져 놓았던 것이다. 이런 교육적 토대는 한국의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어려운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비참했다. 10여만의 전쟁고아와 30여만 전쟁미망인, 수만 명의 상이용사, 그리고 엄청난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미국 등 참전국들의 사회, 종교단체는 버려진 고아들을 입양하거나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 고달팠던 전쟁미망인이나 난민들의 일부는 미 군부대 주변에 기지촌이라는 촌락을 이루며 걔 중에는 국제결혼을 하거나 위안부도 있었고, ‘하우스 보이’든 뭐든 미군기지 내 온갖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주 ‘몬트레이(Monterey)’라는 도시에 있는, 미국 해군 대학원의 석사과정에 유학한 적이 있다. 꽤 큰 해변가 휴양도시로, 그곳에서 공부하러 오신 분, 국제결혼 하신 분 등등… 다양한 교포들을 만났는데, 주변에 있는 ‘포트 오드(Ft. Ord)’라는 미 육군기지에 유난히 한국 분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미군 장교 ID를 가진 필자는, 육군기지 내 PX나 식료품 마트도 이용하였는데, 여기서 만난 분께, 어디에 사시냐?” 물으니, 근처 ‘마리나(Marina)’라는 해변 도시에 사신다며, 도시 인구의 70% 정도인 7,000여 명이 한국 동포라고 하였다…. 그때가 한국 88 올림픽 이전이었는데….


킬리포니아주 포트 오드(미육군 제7사단) 입구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부분 미군들은 철수하였지만, 전쟁에서 군우리 전투, 장진호 전투, 대전 전투에서 곤욕을 치른 미 2사단, 7사단, 24사단은 1970년대 초까지 한국에 주둔하였다. 그러다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로 7사단과 24사단은 철수하여 각각 캘리포니아 ‘포트 오드’와 ‘하와이’와 ‘알래스카’에 재배치되었다. 필자가 만난 분들은 7사단 철수 시 함께 오신 분들이었다. 그런데, 미군과 국제 결혼한 분 중 어떤 분은, 무려 49명의 가족을 데려왔단다. 어려웠던 70년대, 미국이 수많은 교포에게 새 삶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예컨대, 1986년 말, 한국 ‘현대자동차’의 ‘포니(엑셀)’이 미국에 첫 수출되었다. 당시 수출 물량 전부가 예약판매로 매진되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 구매자들은 한국계 미국인들이었다. 필자가 만난 어떤 분은 전쟁의 참화와 현대 차의 모습을 자꾸만 비교하며 눈물을 지었다. 한국은 이들을 홀대하고 험한 생활을 강요한 것밖에 해 준 게 없었는데도…. 꿋꿋하게 살아오시며, 비록 국적은 바꿨어도 한순간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버린 적이 없던 분들을 바라보며,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다.


지금은 유학, 초청이민, 국제결혼 등 다양한 형태로 한인 교민들이 200여만이 넘어, 미국 내 모든 고등학교에 한인 학생이 다닌다고 할 정도란다. 한국전쟁은 한민족을 잔인하게 흩어 버렸지만, 세월이 지나자 흩어진 한인들은 오히려 미국 사회 각 분야에서 씨앗을 내리고 성장하여 나름대로의 위상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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