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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3. 2023

미-중의 전쟁 포로 처리

 *분단을 고착화하여 민족의 한이 맺힌 7.27 휴전협정 서명이 벌써 70주년을 맞았다. 이를 상기하며, 필자의 다른 저서인 '미-중 전쟁, 승냥이와 오랑캐'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중공군이 관리한 유엔군 포로

미중이 처음 격돌한 중공군의 1차 공세에서, 제일 큰 피해를 입은 유엔군은 미 제1기병사단 예하 8 연대였다. 앞서, 중공군 제1차 공세를 논할 때 이 부분을 언급했다. 기습에 성공한 중공군이 다수의 미군 포로를 수집했다. 북중은 양측 간 합의에 따라 국군 포로는 북한군이, 미군 등 유엔군 포로는 중공군이 관리하기로 하였다.


전장에서는 비록, 서로를 죽이지만 일단, 포로가 되면 ‘제네바 협약’에 의해 신변 보호를 받게 되어있다. 그런데, 1차 공세에 성공한 중공군 지휘부는 포로를 전술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모색했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을 그저 북한에 대한 단순한 ‘체면치레’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이를 인지한 중공군 지휘부는, 일부 포로를 풀어 주면 ‘맥아더’ 사령부가 중공군의 차후 공세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맥아더’는 필리핀을 침공한 일본군에 밀리며 ‘바탄’ 반도에서 고전하다 그가 이끌던 미군과 필리핀군 8만여 명을 버리고 호주로 도주했던 적이 있다. 일본군은 자결을 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것을 치욕스러운 비겁자로 간주했다. 포로가 된 8만여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대부분은 일본군의 혹독한 포로 관리에 견디다 못해 대부분 병사하거나 불구가 되었다. 그런 아픔으로 '맥아더'는 미군 포로에 관심이 각별하였다.


이런 점을 이용한 중공군은 ‘마오’의 승인을 얻어, 제1차 공세에서 확보한 일부 포로를 풀어주는 술책을 구사하였다. 이런 간계는 오랜 전쟁의 역사에서 물려받은 유물이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여러 면에서 중공군의 전법이나 간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미군의 X-mas 공세를 약한 줄만 알았던 중공군이 역공세로 되받아친 제2차 공세로, 유엔군은 큰 혼란에 빠져 엄청난 피해를 입고 급하게 38도선까지 패주 했다. 외국의 일부 군사 전문가는 이 청천강 전역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견할 만큼 크게 전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중공군의 유엔군 포로 

그런데, 중공군이 제 1~5차 공세를 가할 때마다, 매번 미군, 영국군, 터키군 등 16개 유엔 참전국 포로들이 점점 증가하자, 중공군 지휘부는 본국에 이들을 심문할 요원들을 요청하였다. 외교역량이 부족하였던 신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장차 필요한 외교관 확보전략과 포로 심문을 연계하여 차세대 외교관 요원들을 유엔군 포로수용소의 심문관이나 판문점 회담장의 속기사 요원으로 파견했다.


주목할 점은, 중공군은 ‘홍군’ 시절부터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는 1928년 이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하달된 ‘8항 주의’의 8번째 항에 포로를 학대하지 말라는 표현이 있어서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항미원조’ 직전, 유엔 포로들은 전쟁이 끝나면 돌려보내야 한다나중에 우리 중국을 홍보할 선전원으로 생각하고 잘 대우하라특별히중국 전통문화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이들을 관리하라”라고 강조했다. 


중공군 지휘부는 ‘마오’의 지시대로 중공군 부사령관 다음 서열인 정치부 주임 ‘두핑’에게 관리업무를 맡겼다. 중공군 정치부는 포로 관리를 전쟁터 못지않은 ‘공작(工作)’의 일환으로 보았다. 그만큼, 세뇌의 방법이 교묘했다. 포로정책은 잘 먹이고마음 편하게 해 주면 세뇌는 저절로 된다며, 중공 심문관들은 포로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인간적으로 다가갔다. 


군사적 심문보다는 추위, 가족, 군생활 등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풍속이나 습성이 다른 여러 나라 군인들의 심성과 문화를 이해하려 했다. 미군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흑인들의 감정도 놓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후일 신중국 외교관으로서 국제외교 활동을 전개할 때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중공군이 관리하던 유엔군 포로수용소는 ‘강계’와 ‘벽동’ 지역에 있었다. 둘 다 압록강 주변 지역이라 지리적으로 중국에 근접하여, 중공군 지휘부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었다. 그중, ‘강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어서 주민들도 친북한 성향이었고, ‘벽동’은 3면이 압록강으로 둘러싸인 반도 지형이라 경계에 용이했다. 포로수용소에는 구타나 괴롭힘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담장이나 철책도 없었다. 이런 점이 국군 포로를 가혹하게 대했던 북한군 포로 관리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한국식 ‘축사’와 미국식 ‘방목’처럼... 


하지만, 포로수용소에서는 가끔씩,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거나 죽일지도 모른다며 도망친 포로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접경 압록강변이라 진입진출로도 제한되고 도주할 곳도 없는 데다, 외국인의 외모여서 금방 눈에 띄어 주민 신고로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뛰어야 벼룩’이었다.


판문점 포로교환에서 돌아온 유엔군 포로

후일 포로송환 중에 미군 20여 명과 영국군 1명이 중공행을 선택했다. 이에, 포로들의 관리방법이 매우 인간적이었고원만한 보급과 문화오락체육 활동 등을 보장하며 포로관리에 전심을 다했다는 선전 문구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도 감시 대상이었다. 인프라가 열악한 중국 생활은 고달팠다. 일부는 중국 여인과 가정을 꾸린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몇 년 뒤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귀국한 이들은 이번에 자국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가족, 친지에게 외면당하거나, 공산주의자 딱지를 달고 감시받는 생활로 평생을 보냈다.      

    

중공의 귀환포로 대우

한국전쟁 중, 미군의 중공군 포로 관리는 매우 서툴렀다. 중공군 포로는 약 2만 2,000여 명으로 유엔군 포로의 7배 이상이었다. 전쟁포로는 포로가 되기 이전의 계급으로 대우해야 하나, 중공군들은 직책만 있었지 계급이 없었다. 미군들은 할 수 없이 국공 내전 시절 국민당군 장교로 있다가 중공군에 투항하여 중공군 병사로 복무하다 다시 유엔군 포로가 된 자들을 찾아내어, 특수교육을 시킨 후에 '포로수용소 관리인'으로 활용했다.


중공군 포로에게 DDT(살충제)를 뿌리는 미

포로들은 미국이 주장한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 결정으로 자신이 갈 곳을 택하였다. 중공군 포로 2만 2,000여 명 중 1만 4,000여 명은 대만행을, 6,000여 명은 중공을, 그리고 나머지는 제3국을 택하였다. 대만행이 유별나게 많은 데 대해, 중공 측이 국민당군 출신 '포로수용소 관리인'에 의한 회유나 억압 등 중공군 포로 관리에 국제법 상 위반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국으로 복귀한 6,000여 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한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잠시 후부터 중공 당국에 의한 혹독한 사상검증 작업이 이어졌다. 중공군 당국자들은, 전쟁포로 송환자들에 대해, 식량과 탄약이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항복이라는 치욕을 택한 자들은 인간도 아니다라고 몰아붙였다. 불과 몇 년 전인 태평양 전쟁에서 유행(?)하였던 구 일본군들의 ‘옥쇄 전략’과 비교하여 살아남은 자를 ‘비겁자’로 몰아붙였던 것일까? 이들 중, ‘전공이 있는 자’나, ‘적과의 투쟁을 인정받은 자’들은 소속부대로 복귀시켰지만, 우경화되었거나 변절자로 낙인찍힌 대부분은 당적을 박탈당하고 군에서 제적되었다.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서도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차라리 죽지왜 살아왔냐?”며 냉대를 받았다. 젊은이 중 신중국 건설 열망에 들떠, 약혼을 하였으나 “결혼을 미루고 자원입대”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청년의 꿈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열악한 군 인프라 때문에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가 포로 신세가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오니, 포로 출신 딱지가 평생을 따라다녔다. 결혼을 미루고 자원입대한 자들은 열에 아홉이 파혼을 당했다. 온갖 냉대 속에 젊은 청춘을 거의 다 보낸 30여 년간, 이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공산당 특성상 모두에게 ‘일자리’가 주어졌지만, 직장에서도 ‘자아비판’을 강요당하였고, 특히 문화혁명 기간 중에는 ‘변절자’로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겨야 했다. 이들은 1982년 ‘덩샤오핑’ 시대가 되어서야 복권되었다.  


한편, 대만의 국민당 정부로 갔던 1만 4,000여 명의 전쟁 포로들의 운명도 이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만 정부는 이들을 ‘반공 의사’로 추켜세우며 열렬히 환영하고, 국민당 군에 편입시켰다. 그 때문에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은 그럭저럭 지냈으나 군에서 퇴역한 이후, 저학력자가 태반인 데다 정부가 챙겨 주지 않으니, 이들은 대부분 비참한 말년을 이어 갔다. 그나마, 제3국을 택한 이들이 나은 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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