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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5.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11화)-중공군의 기동전

전세를 뒤바꾼 중공군의 기동전술(機動戰術)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한 마오쩌둥의 '10대 군사원칙'     

한국전쟁은 정부 수립 1년 차 신생 중국이, 2차 세계대전 승전국 미국과 군사적인 승부를 겨루자며, 제대로 맞붙은 첫 열전(熱戰)이었다. 시작은 ‘기동전(機動戰)’으로 5차례의 대공세였다. 양측은 한반도 종심 300~400km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차례 공세적 기동과 축차적 지연전을 반복하다 다시 38선상에서 균형을 이루었다. 한국전쟁의 제2막 1부의 모습이다.


중국은 지금껏, 중공군 공세 첫날인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정하고, 중국 중앙TV(CCTV) 등은 매년 10월이면, ‘항미원조’ 전쟁기념 행사라며 중공군(홍군)의 여러 가지 전승 기록을 국영 CCTV 방송 연례행사용 자료 화면에 담아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특히, 2020년, 중국 중앙TV(CCTV)는 '조선(한국) 전쟁 70주년 특집'에서, 그 첫 장면이 압록강까지 도달했던 국군 6사단을 격파한 내용을 실었다. 국군으로서는 이들과의 전투가 6‧25전쟁 최대의 패전이었고 두고두고 기억할 굴욕적인 참패였다. 중국은 아련한 과거 전쟁의 승리를 들먹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중국이 비록 ‘조선 전쟁’을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보고, ‘항미원조’로 ‘미제의 침략’에 대항한다며 대외적으로 참전을 공표했으나..., 미국이 두려웠을까? 정작, 치욕을 안기는 대상은 미군보다 주로 한국군이었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1951년 5월 제5차 공세까지 중공군에 무참하게 당한 국군의 군단, 사단은 2군단, 3군단, 3, 6, 7, 8, 9사단 말고도 숱한 부대가 있었다.


한국전 출정 선서식을 거행하는 ‘덩화’의 동북변방군(NARA,www.archieves.gov)

중공군이, ‘항미원조’의 구호아래 한반도에서 ‘완충지대’를 확보하겠다며, 역사상 처음으로, 미군과 맞붙으며 펼친 기동전은, 작전기지를 확보하고, 유엔군을 소멸시키려는 전술이었는데, 이 방송은 특집 다큐에서 중공군이 국군의 선두를 막고꼬리를 끊고허리를 잘랐다고 제1차 공세에서 국군을 격파한 그 전법을 소개한다. 이같은 중공군의 기동전은 중공군 제1부사령관 겸 제13병단(군사령부) 사령관 ‘덩화(鄧華)’가 제안한 전술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덩화는 인민해방군 내의 전술 대가였다. 그는 중공군 간부 중에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혁명군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중공군들이 어릴 적 힘든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미국인이 설립한 명문 중학을 다녀서 영어도 잘하였고, 수학과 물리 등을 제대로 배워,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군인이었다. 17세 때 공산당 비밀 집회에 나갔다가, 국민당에게 쫓기며 혁명군으로 청년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손자병법’을 보물처럼 아끼며 애독하였고, 말수가 적고 적정 판단이 정확하여 국공내전에서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펑더화이’에 이어 중공군 2대 사령관으로 한국전을 이끌었으나, 계급장이 생긴 이후 상장(上將, 별 셋 장성)으로 전역한 뒤, 중국 문화대혁명 중 숙청되었다가 복권 후 1980년 사망하였다.


그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면, 제13병단 사령관 ‘덩화’는  ‘오산 전투’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제4야전군 사령관 ‘린바오(林彪)’ 휘하에서 동북변방군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동한지 약 1개월이 지난 8월 13일, 그동안 한국전쟁을 연구한 결과를 '린바오'에게,  조선의 동서는 짧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선이 남쪽으로 지나치게 신장되어 있다해군과 공군이 강한 미군이 해안으로 상륙하여 허리를 자르면 위험하다는 정세보고서를 보내었다. 하지만, 그가 올린 유엔군의 상륙작전 가능성 경고에 대해, 승승장구하던 북한군 지휘부와 소련 군사고문단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뒤인 9월 15일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으니,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이미 상륙작전을 비밀리에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예지력이 놀랍다.


‘덩화’의 기동전 전술개념은,  ‘마오쩌둥’이 20여 년간의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국공내전 중이던 1947년 12월에 하달한 ‘10대 군사원칙’에 충실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아래 몇 가지 원칙을 주로 적용하였다.  

0. 먼저 분산되고 고립된 적을 치고, 후에 집중하고 강대한 적을 친다. 

0. 적의 유생역량 소멸을 주요 목표로 삼고, 도시와 지방을 지키거나 탈취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는다.

0. 전투마다 절대 우세병력(상대의 3~5배)을 집중하여 사면으로 적을 포위하여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특별한 경우, 병력을 적 정면이나 일익, 혹은 양익을 타격하여 일부섬멸, 일부 타격의 목적을 달성한 뒤, 병력을 신속히 전용하여 다른 적군 섬멸을 지원한다. 

0. 득보다 실이 많거나 득과 실이 비슷한 소모전은 극력 피해야 한다.

0. 준비없는 싸움, 적을 알지못하는 전투는 적극 피하고, 매 전투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적의 조건대비 승리를 기하여야 한다.

0. 용감하게 싸우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단기간에 휴식하지말고 연속해서 싸워야 한다.     


그렇게 작성된 ‘덩화’의 전술개념 요지는, 미군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다조직도 치밀하고화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미군은 정면방어에 능하니정면공격은 승산이 없다밝은 낮에는 잠복하고어두울 때 공격하되과감한 침투전술을 써야 한다. 약점은 측면과 후면이다전방과 후방의 연락을 단절시키고분할해서 포위한 뒤 중심을 섬멸하자”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야간 공격을 감행하고상대의 취약한 좁은 정면에 엄청난 화력과 병력을 일시에 집중하여 돌파를 시도하며일단 약한 부대를 돌파한 후에는 적의 측면을 신속히 우회하여 인접부대 후방 지역에 미리 설정된 포위소멸 구역에서 적의 유생역량을 말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야간이동, 우회, 매복, 포위, 기습이라는 여러 가지 정공법과 각종 기공법의 배합을 그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화력과 기동력으로 정규전만 고집하는 ‘첨단’에 대한 ‘원시’의 기습이었다. 그 배경에는 중공군은 경무장으로 기동력이 뛰어나고, 위장에 능하다는 점과, 무엇보다 70% 이상이 ‘산악’이라는 한국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산악에서는 미군의 장점인 전차의 기동력과 포병 화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 미군에게 불리하게 되어있다. 당연히, 피아간 장단점의 잘 분석하여 그 핵심을 짚은 방책이었다. 특히, 화력이 열세한 중공군이지만 침투전술, 야간전투, 산악전투에는 능하니 시도해 볼 만한 작전이었다. 이 개념은, 1950년 10월 참전이후 실시한 제1차 공세부터 5차까지 공세를 주도하였던 전술의 핵심이 되었다. 


이같은 부사령관 ‘덩화’의 전술제안에 만족한,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여기에 국군을 먼저 공격한 후미군을 공격하라며 ‘분리와 소멸’을 지시한 마오쩌둥의 지침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야간에 먼저전투력이 약한 국군을 공격하여 전선의 균형을 파괴하고흩어진 부대 간 경계를 따라 신속히 우회 침투하여인접한 미군 후방으로 기동하여 혼란에 빠진 미군들을 포위하여 소멸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중공군의 전술을 좀더 구체화하면, 먼저 반드시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소규모의 탐색조를 보내어,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을 갖추고 평지에 배치된 미군의 전면을 철저히 피하였다. 그리고, 이길 자신이 있는 부대부터 골라서 집중공격하고, ‘돌파, 우회를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대는 중공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인상을 받게 마련이었다. 특히, 중공군은 ‘마오’의 지시에 의거, 화력이 약하고 산악지형에 엉성하게 배치된 비교적 약체였던 국군만 골라 두들겼다. 오로지 국군만 타격하라(專打僞軍)”. 그러나, 국군의 진지라도 준비된 진지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법은 없었고(避實擊虛)” 반드시, 주간 대신 야간에 공격하였다(晝靜夜動)”.


그리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비록 손실이 크더라도 기어이 돌격하는 모습을 보여왔기에, 미군이나 국군은 야간에 중공군의 피리소리를 들으면 전투도 하기 전에 미리부터 공포심에 흽싸여, 무분별하게 후퇴하였다. 중공군은 이 점을 이용하여, 후퇴하는 국군과 인접한 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지경선상의 간격에, 고지와 고지 사이의 계곡이나 협곡을 이용하여 빠르게 배후를 돌아 측후방을 공격한 다음후퇴하는 국군과 미군부대의 퇴로 차단에 주력하였다(浸透迂回退路遮斷)”. 즉, 일부는 혼란에 빠진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동안, 일부는, 신속히 우회기동을 하여 인접한 미군의 후방을 치는 것이 중공군의 수법이었다. 


특히, 방어하는 양쪽 부대는 책임 한계가 애매한 전투지경선의 간격에는 병력 배치나 화력 통제를 서로 미루는 경향이 있어, 공격하는 적이 이런 약점을 이용할 경우, 서로 미루다가 속수무책으로 포위되거나 산발적으로 흩어지다 치명타를 입게 된다(各個擊破分割攻擊)”.  


중공군은 항상, 적에 비해 상대적 전투력 우위를 점하려는 정교한 병력운용을 하여왔기에, 국군이나 유엔군은 적이 공격해오는 순간, 어딜가나 마주치는 중공군에게 혼쭐이 났다. 적이 엄청나게 많다고 여기는 공포심이나 과도한 '피해망상증'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전쟁 초기에는 실제로 있지도 않은(?) 전술을 '인해 전술'이라고 계속 입에서 입으로 확대 재생산하며 나중에는 서로서로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내빼기에 바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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