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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5.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12화)-기동전과 인해전술(?)

인해전술?


한국전쟁에 기습적으로 개입한 중공군은 전 장에서 본대로, 미리 준비한 정교한 전략, 전술을 펼쳤으나, 중공군을 난생처음 접한 미군은 전혀 다른 의미의 ‘기습’을 당한 셈이었는데…, 미군은 한동안 중공군에 대한 무지와 다른 잣대로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옭아매며 허둥되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적이다 보니, 적전술에 대한 사전 연구도 없었고, 동-서간 이질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상대의 전술적 의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많은 미군이 ‘무한공포’라는 일종의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런 공포는, 중공군의 독특한 전법으로 이른바 ‘인해전술(?)’이라고 널리 알려진, 집요하고 맹렬한 병력집중 방식으로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같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해, 인명을 담보로 하는 그게 무슨 전법이냐?”라고 하거나, 나라가 크고 인구도 많으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라거나, 국공내전 과정에서 수집한 엄청난 수의 국민당군 포로를 총알막이로 삼아 골칫거리도 제거하고전투에서도 활용했다는 식의 각종 유언비어도 난무했다. 하지만, 전쟁사에서는 “이를 단지 수적으로만 무모하게 몰아붙이는 야만적인 중국인의 인명 경시’ 전술 정도로 폄훼해서는 안된다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인해전술(?)’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과는 완전히 차원 다른 정교한 전술이었다. 백선엽 장군도 그 점을 인정했다. “중공군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을 치고도, “병력이 부족해서… 적의 ‘인해전술’에 당했다는 것은 자기변명이었다. 엄밀히 보면, 초기 중공군 공세 시 중공군은 연합군과 숫자적으로 대등한 수준이었다. (백선엽,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중앙일보, (2011.6.1.)”     


물론, 대등한 병력이라해서 같은 숫자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화력의 차이가 있으니까... 통상적인, 공격 작전은 방어 병력의 3배 정도가 되어야 공격을 한다는데, 장비가 워낙 열악하였던 중국군으로서는, ‘장비가 별로인 국군을 상대로도 5배 정도, 장비가 좋은 미군을 상대로는 10배 정도’의 병력을 투입하여야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인데... 제1차 공세 당시 북진 중인 한국군과 유엔군은 6~7만 정도, 중공군은 제 13병단 예하 4개 군 15만 정도였다. 그럼에도 국지적인 전투에서는 상대가 공포심을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느꼈다는 것은, 오랜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중공군 간부들이 ‘매 전투마다 절대 우세병력을 집중하라’는 ‘마오쩌뚱’의 ‘10대 군사원칙에 따라, 병력의 집중과 분산 등 상황별로 전투력 극대화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였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중공군은 단지 승리를 위해 ‘막무가내로 인명을 경시하며 공격적인 인해전술(?)’을 감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먼저, 중공군은 표면적으로는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정의감이 강한 개별 중국인이 북한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한 군대라는 ‘중국 인민지원군’이었다. 인명을 경시할 수 없었고, 또한 상대의 몇 배에 달하는 많은 병력을 제한된 지역에 투입한다는 것은 북한 지역의 산악지형 특성상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많은 병력을 집결하였다 하더라도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은 아무 데서나 수시로 나타나 공폭을 가하니, 엉성한 보급지원체계를 가진 중공으로서는 작전 지속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매번 압도적인 병력 우위로 ‘인해전술(?)’을 감행한다는 게 가능할까..?라는 합리적인 의문이 든다.      


어떤 이는, 공격하는 중공군이 제대로 된 총도 없이 수류탄만 들고 공격을 했다는 점을 들며, 국민당 투항군이나 포로를 총알막이로 내몰았다는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중공군의 보급상태나 포로처리’ 방침을 잘 알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근거로, 중공군 제13 병단 예하 제50군은 원래 중국 남부 윈난(雲南)성 국민당 군이었으나 공산당에 투항하여, 만주 지역으로 이동한 뒤 전공도 많이 세웠다. 그렇지만, 중국 국민당에서투항한 군대라는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항미원조 지원군으로 편입된 이래, 교대는커녕 가장 오랫동안 한반도 작전에 계속 투입되었다. 다만, 이 부대의 사망자 열에 여섯은 전투가 아니라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인해전술(?)’이든 뭐든 중공군의 공격작전은 전술한 '덩화' 부사령관의 전술개념대로, 단(연대급) 이하 전술 제대급에서는 ‘돌파’ 등 공격작전을 감행하기 이전에, 반드시, 타격목표를 선정하고, 철저한 사전정찰로 적 방어망의 전면이 늘어져 있거나, 종심이 약한 곳, 가장 약한 적이 배치된 곳, 전투지경선이 지나는 곳, 화력과 장애물이 미약한 곳, 그리고 주요 장비 위치, 탄막, 약점 등을 면밀히 파악하였다. 그리고, 제공권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에게 백주 대낮에 이런 식의 엄청난 병력집중을 감행하면 피해가 속출하니, 은폐를 위해 야음을 이용하여, 선정된 목표 상 ‘좁은 정면(주로 전투지경선 상)’에 쐐기를 박고 망치로 때리듯, 엄청난 화력으로 공격준비사격을 퍼붓고 적 방어선을 초토화시킨 다음, 병력을, ‘일점집중(一點集中)’의 원칙으로 지형지물의 사이, 병력배치 사이에 ‘제파식’으로 ‘총 돌격’하여 저항선을 돌파하는 식이었다. 약한 적의 배치를 ‘돌파’하는 것은 공격 작전의 시발점으로, 일단 야습으로 작게라도 돌파구가 형성되면, 그 사이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종심상 우회기동으로 후속 부대 전진을 보장하고, 후방 지원부대의 모든 유생역량을 포위 섬멸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이때 중공군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야차’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며 상대에게 계속 달려들었다…. ‘돌파’ 작전에서 ‘죽고 죽더라도 끝없이 달려드는’ 과감한 용기는, ‘마오’의 ‘10대 군사원칙’에서 강조하듯 용감하게 싸우고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휴식 없이 연속해서 싸워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듯하다. 야간에도 이처럼 병력을 정교하게 운용할 수 있는 것은 장시간의 전투경험과 훈련의 결과이다. 사실, 이런 집중공격을 당하면, 방어하는 자는 엄청난 공황상태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명감이 있다 해도 장기간 '죽기 살기'로 싸우기 어렵다. 그래서 세뇌와 집단 최면의 일환으로 전투 전 사상교육과 전투 후 강평과 가혹한 ‘자아비판’이 따랐다. 중공군 각급 부대에 지휘관과 동급인 ‘정치위원’이 함께하는 이유다. 

  

공격하는 중공군 모습 (북경 군사박물관, 2022.1.25.)

그런데, 이런 공격적인 '돌파'작전에서 ‘인해전술(?)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은 어이없게도 ‘뿔피리’였다. ‘뿔피리’와 ‘꽹과리’는 19세기 수준으로 통신장비가 열악하였던 중공군 하급제대 간의 상호 연락수단이었는데, 이 악기의 이질적(?)인 소리가 국군과 미군에게 기묘한 심리전 효과를 주었다. 마치, ‘초한전’의 사면초가(四面楚歌)로 향수병에 걸린 초나라 병사들이 진지를 이탈하였던 것처럼… 적의 우회포위 전술에 수차례나 대책 없이 당하였던 국군이나 미군 병사들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이들은 그저, 야간에 뿔피리 소리만 들리면 적의 접근을 막기보다 그 이상한 소리에 극도의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전후좌우, 너나없이 슬금슬금 꽁지를 내뺐다. 이는 지휘부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문화충격이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중공군에게 대책 없이, 그리고 형편없이 당했다.     


그렇다면, 국군이나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왜 그토록 인해전술(?)이라고 단정하였을까? 당시, 미 8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부(G-2)가 통신감청 등 신호정보, 항공정찰 등 영상정보, 포로심문이나 정찰대, 전방부대 인원 등에 의한 인간정보를 종합하여 내린 적상황 정보판단이었는데... 하지만, 요즘같이 정교하지 못한 전자, 항공 장비로는 야간이나 눈, 비, 안개 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방 부대원의 진술 등도 사실은, ‘죽여도 죽여도 개미 떼처럼 끝없이 몰려드는 눈앞의 적’을 경험하며 무한 공포에 질린 군인의 ‘착시’에 의한 패닉 진술일 수 있다. 어떻게 방어하는 각개 병사가 공격하는 적의 규모가 대군인지 여부를 알 수 있겠는가? 더구나, 야간 전투에서... 이런 병사들의 과장 진술로 적정 판단이 틀려질 개연성이 많았다.      


그런데, 인해전술(?)이 확산된 것은 전혀 엉뚱하게도, 국제 정치적인 이유라는 극단적인 조작설도 있다. 한때, 미국 국무성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결속하기 위해 ‘공포 마케팅’을 하고, 자국의 국방비 증액을 위한 일종의 ‘허수(숫자 조작)’ 놀음을 벌인 결과라는 설인데... 실제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종전 후 몇몇 단체에서 주요 전투 일자별로 투입된 미공군의 정찰활동 보고서를 분석하였더니, 해당 일자의 정찰보고서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없었다’라는 내용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조사 보고서의 진위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대부분의 중공군 공격 기동은 항공정찰이 불가능한 야간작전이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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