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제1차 공세(1950년 10월 25일~11월 4일)
1950년 10월,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은 '항미원조'의 정신대로, 계속 북진하는 미군과 유엔군을 견제하려 최초 서부 지역에 2개 병단(야전군급), 동부 지역에 1개 병단을 투입하여 ‘적극적 방어’로 작전기지만 확보하려 하였다. 그런데, 승리에 도취한 국군과 유엔군이 아무런 경계 조치 없이 무모하게 전진하며 약점을 보이자, ‘마오쩌둥’은 “기동 중에도 적극적 공세작전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특히, ‘국군을 유엔군의 ‘약한 연결 고리’로 지목하며, 국군을 먼저 때리도록 지시했다.’ 앞서 기동전에서 언급한대로, 중공군 지휘부는 ‘마오’의 지시와 '10대 군사원칙'에 의거 수립된 '덩화'의 개념에 따라, 1950년 10월 개입 이래 1차 공세 ‘운산 전투’부터 5차 공세까지, 한국군만 골라서 무참하게 때렸다.
사상 처음으로 미군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던 중공군은, 먼저 제13병단 40군으로, ‘주타격’ 지역으로 선정한 ‘운산~온정리’ 지역으로 은밀히 침투하여 국군 제2군단(6, 7, 8사단)을 공격, 포위, 소멸하려 하였다. 그리고 다시 미군의 측후방으로 우회, 침투하여 퇴로를 차단한 후 포위, 소멸하여, 유엔군과 국군이 형성한 전선의 균형을 파괴하여 작전기지를 확보하도록 계획하였다. 이에따라,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북진통일’을 외치며 앞다투어 압록강 초산까지 진출하였던 국군 제2군단(6, 7, 8사단) 중에서도 가장 승승장구하는 6사단을 기다렸다가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기습을 당한 6사단은 한나절 만에 와해되었고, 인접한 7사단과 8사단도 같은 방식으로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국군 제2군단(6, 7, 8사단)이 “운산―온정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말려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이른바, ‘운산 전투’다.
국군 제2군단을 무너뜨린 중공군 13병단 예하 38, 39, 40, 66군은, 11월 1일, 이제 측면이 노출된 인접 미군에게 달려들었다. 중공군 제1차 공세가 국군과 인접한 미 기병 1사단 8연대로 이어지며, 사상 최초로 미‧중이 맞붙은 것이다. 기병 사단은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 시 창설한 기병대의 후신으로, 160여 년간 불패의 신화로, 기계화(機械化) 사단이 된 후에도 ‘기병(騎兵) 1사단’ 명칭을 여전히 사용하던 자부심이 강한 부대로 1950년 10월 19일, 국군 1사단과 함께 평양을 점령한 부대였다.
하지만, ‘운산 전투’에서 중공군 제39군 (군장 ‘우쉬취안’)의 공격으로 기병 1사단 8연대는 부대원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중공군 39군이 군단규모로서 기병 사단보다 병력이 많았지만, 기병 사단의 화력은 39군을 압도하여, 한동안 완전한 포위를 이루고도 치명상을 주지 못하자, 중공군은 강력한 1개 중대를 상대의 중심으로 침투시켜 내부로 부터 상대의 외곽을 공격하였다. (중심개화전법). 기습과 침투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우쉬취안’은 ‘마오’도 알아주는 기습작전의 대가였다.
11월 4일, ‘운산 전투'에서 대패하며 청천강 방어에 실패한 미 8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1차 공세에서 청천강 북쪽에 투입된 약 15만의 중공군으로부터 약 5~6만의 유엔군과 국군은 도미노 현상처럼 심대한 타격을 입으면서, (연합군 피해 1.5만, 중공군 피해 1만) 전 전선에 대한 조정이 불가피하였다. 기습으로 한국전에 뛰어든 중공군은 제공권도 없고, 화력과 보급이 열세했지만, ‘모르는 적’에게 자신들이 ‘잘하는 방법대로’ 국공내전에서 사용하던 '분리와 소멸'이라는 기본개념을 적용했다.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한만국경 진출 저지와, 궤멸 직전의 북한군 ‘재정비 시간’ 보장, 차후 작전을 위한 ‘작전기지 확보’ 등의 목표를 달성하며, 한국전 개입을 대외에 알렸다. 하지만, 탄약과 보급의 악화와, 유엔이 재반격으로, ‘펑더화이’는 전열 재정비를 위해 11월 5일 공세를 중지했다. 공세 시작 10일 만이었다.
중공군의 완벽한 기습작전에 비해,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을 우려하면서도, 공격을 당할 때까지 중공군의 참전 징후를 전혀 포착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중공군의 참전은 이미 시기가 늦은 것으로 판단”하여, 총공세를 펴다가 일격을 당한 모양새였다. 중공군 참전 이전, 맥아더 사령부는 “정권수립 1년차인 신중국이 이웃나라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걸로 판단하였고, 설령, 참전하더라도 그저 ‘체면치레’ 정도로, 단기간 참전하며, 그 전투력도 매우 미미할 것”으로 오판하였다.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을 처음 접한 미 8군도 중공군 전투능력을 매우 과소평가하였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승리하였던 일본군에게 한동안 형편없이 시달렸던 중국에 대한 이미지나 인종적인 편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을 일본에서 즐길 것”이라는 미국의 희망과 달리, 중공군은 오랫동안 유격전, 정규전을 치르며 1949년 초, 중국 전역을 장악한 강한 군대였다.
중공군은 직책만 있고 계급이 없었지만, 각개 병사들은 상명하복 등 규율에 충실하였고 전투원으로서 잘 훈련되어, 전장 환경을 잘 극복하였다. 차량이 부족하여 기동간 거의 뛰다시피 행군하였지만, 체력소모를 잘 견디어 내었다. 그들은 또한, 적정파악과 정찰 능력이 우수하여, 상대가 남긴 물품, 배변 등 여러 흔적에서 부대의 사기나, 보급상태, 군 기강 수준까지 파악하였다. 그리고, 야간 공격 시에는, 상대방 진지에 최대한 근접하려 풀 소리조차 내지 않도록 팔, 소매 등을 노끈으로 묶거나, 군화없이 발을 천으로 감아 소리 없이 접근하는 등 세심하고 뛰어난 위장술을 보였다. 오랜 경험과 훈련의 성과였다. 반면에, 전투 감각이 무디고 훈련이 덜된 유엔군은 야간 경계근무를 할 때에도 무심코 담배를 피우는 등 느슨한 모습을 보였다. 만약, 깜깜한 밤에 담배를 피운다면, 담뱃불 빛이 1~2km까지 노출되므로 상대에게 나를 드러내어 부대가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
중공군은 또한, 화력의 열세나 기동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오밀조밀한 한반도 산악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이들은 철조망이나 지뢰 등으로 잘 준비된 지역은 철저히 우회하여, 다소 힘들더라도 산악으로 침투하여 미군을 측후방에서 공격하였다. 이에대한, 미군의 분석은, “중공군이 주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으면서 각개 부대별로, 진격하는 국군과 미군을 유인한 후, 이들을 포위하여 각개격파하는 ‘팔자전법(八字戰法, V자형 계곡에 매복한 뒤 적을 유인 격멸하는 전법)’을 잘 사용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란 가운데 문화와 언어가 다른 유엔군은 의사소통과 상호협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반면, 중공군의 약점은, 화력, 장비, 물자, 탄약 부족이었다. 대포는 커녕 제대로된 소총도 없고 박격포가 고작이었다. 차량도 없어 무거운 탄약과 함께 급속행군을 강요받던 중공군 병사들은, 비록 전선을 돌파하더라도, 통신, 수송 능력 부족으로 적 후방 깊숙이 신속히 기동치 못하여 더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지 못하였다.
그런데, 앞서 인해전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공군은 통신수단이 빈약하여 피리, 꽹과리, 나팔 등 중국 고전악기를 야간에 신호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런 소리에 익숙지 못한 미군과 국군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이면, 개인화기조차 부족한 중공군이 박격포 정도의 화력지원만으로, 수류탄만 들고 지정된 돌파지점을 향해 달려들면, 상대와의 기 싸움에 밀린, 미군이나 국군은 '머리를 박고 총구'만 하늘로 향하는 사겨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장 공포에 빠지면 아무리 우세한 화력도 소용없다.
1차 공세로, 중공군의 전투역량을 과소평가했던 미군의 방어선은 힘없이 무너졌다. 그리고나서야, 중공군에 대한 미군의 평가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만큼 중공군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한편, 중공군도 1차 공세에서 중공군의 능력 과시 결과와 함께 미군의 강약점 분석에도 주안을 두었는데, 전투력 발휘 면에서 중공군이 평가한 미군의 장단점은 결코 가볍지않았다.
중공군은 미군의 장점으로, 우수한 장비와 풍족한 물자, 보병, 전차, 포병의 협동공격 능력, 장거리 포병의 위력 및 공군의 근접 항공지원 능력과 공중 수송능력은 물론, 상하급 제대 간 지휘, 통제, 통신체제가 매우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특히, 중공군이 세심하게 간파한 것은 “유엔군은 우세한 포병, 공군 화력으로 중공군 방어진지에 ‘궤멸적인 포격과 폭격’을 가한 후에 전차와 보병이 공격한다”는 공격전술이었다. 미군은 우세한 화력을 이용하여 퇴각하는 적을 격멸하면서 작전 단계별로 통제선을 설정하여 역습이나 침투를 거부하면서 진격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중공군의 대책은, 병력 배치는 전경후중(前輕後重)으로, 화력 배치는 전중후경(前重後輕) 원칙을 세우고, ‘운동방어 작전(지연 작전)’이나 철수로 대응하며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반면, 미군은 공격작전 동안 공산군의 대규모 반격이 나오면 즉시 공세를 중지하고 방어에 임하였다. “상대 전력을 최대한 파괴하고 유엔군의 전력은 최대한 보존한다”는, 상대에게 위협적이고 나에게는 조심스러운 전략이었다.
그렇지만, 중공군이 파악한 미군의 단점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미군 보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하거나 진지를 사수하기보다, 공군이나 포병, 전차의 지원으로 전투를 수행”하려 하였다. 특히, 미군은, 병력으로 커버하지 않으면 대체 불가능한 지역조차 화력이나 항공감시로 커버하려 하였고, 점령하기 힘든 산악에 오르기보다 도로 위주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초기 전투에서 적에게 공간 침투를 많이 허용하였다. (2차 기동전 이후에 부임한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이 부분을 가장 크게 지적하였다)
이는, 미군 지휘관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경험으로 유럽 지역 등 평지 ‘거점방어’ 전술에 익숙한 탓이다. 하지만,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형은 기동제한과 화력 사각 지역이 많아 거점방어는 적절치 않다. 특히, 도로 위주의 거점방어는 지휘용, 작전용, 숙소용, 보급용 천막들을 넓은 지역에 펼치는 스타일이어서, 자체방어에는 용이했을지 모르나, 산악 기동에 능한 중공군에게 침투 공간을 허용했고 포위, 소멸의 운명을 맞이했다. 때문에, 제공권 장악과 절대적 화력 우위가 보장되더라도, 지형지물과 조화되는 진지편성을 해야했었다.
아래 내용은 중공군이 1차 공세 이후 ‘전훈집’으로 예하부대에 하달한 내용인데, 국군이 분석한 중공군의 ‘추격전술’에서도 이 내용이 보일 정도로 미군과 국군은 중공군이 기동전을 펼치는 동안 계속해서 망신스러운 ‘후퇴 패턴’을 보였다.
‘미군과 국군은 전세가 불리하면 집중에서 분산으로 전환하였다. 중공군들이 보기에는, 작게는 삼삼오오로 무리를 만들고, 크게는 분대‧중대 단위 건제를 유지하여 산악에서 은폐하다가 야간행동을 하여 산악 소로를 이용하거나 험산 준령을 넘어 도주하였다. 이런 점을 노린 중공군의 추격전술은,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도주하거나 기회를 노려 병력을 규합, 습격하고 혼란을 조성하라. 또 전과확대를 위해 추격부대를 편성하고 우회부대와 함께 습격하여 기동하는 적을 소멸시키는 것을 중요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제2차 공세의 일원인 장진호 전투 중 획득한 중공군 선전 소책자에서도 나온다. “미군은 강군이지만, 원정군으로 훈련수준이나 임전무퇴의 의지가 부족하였다”며, 중공군은 훈련이 부족한 미군이 “야간전투나 근접전투 동안에도 공포심으로 불필요한 사격을 남발하거나, 전투에서 패하거나 보급지원이 끊기면 급격히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를 버리거나 삼삼오오 후퇴하는 등, 상황이 불리하면 무질서한 도주로 지휘, 통제가 어려운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물론, 중공군도 미군을 기피한 흔적은 곳곳에 보인다. 1차 공세 시 중공군 제38군이 국군을 미군으로 오인하여 회피하였던 것처럼, 중공군의 미군 회피는 반복되었다. 국군 1사단이 1950년 11월 26일, 노획한 중공군 66군이 작성한 ‘운산 전투 경험의 기초적 결론’이라는 ‘전훈속보’에 의하면, 중공군은 자체 분석한 1차 공세결과 전훈(戰訓)에서, ‘한국전에서 처음 접한 미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여 대담성 결여로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한 점’을 뼈아프게 지적하였다. 중공군 지휘부는 차후 미군을 상대할 시, 신속한 우회기동 및 후방차단, 도로/평지 축선 공격 금지, 소규모 선발대로 나팔, 꽹과리 활용, 그리고 4명씩의 전차 공격조 편성으로 전차 배후를 노리는 등 보다 과감한 전투를 주문하였다. 또한, 공격기세 유지를 위해 무기와 탄약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 요건임을 인정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