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제 2차공세 (1950년 11월 25일~12월 10일)
중공군 1차 공세에 고전하였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중공군의 증원을 차단한다며, 공군 사령관에게 신의주―안뚱을 연결하는 압록강 상 교량 폭파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미 합참은 “한국-만주 국경 5마일 내 어떠한 목표도 공격하지 말라”는 기존의 지시에 위배된다며, 이를 중지시킴으로써 한동안 맥아더 사령부와 미 합참 간에 실랑이가 있었다. 결국, 유엔군의 희생을 강조한 맥아더의 협박성(?) 건의에 못이긴 트루먼은 마지못해 압록강 폭격을 승인하되, 소련과 중공기들을 쫒아 만주로 월경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전쟁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것이 문민정치인 트루먼의 정치적인 고려였다. 이처럼, 맥아더의 만주 및 중국본토 공격론은, 오히려, 워싱턴과 불협화음을 초래했다.
그런데, 정작 맥아더의 유엔사는 보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먼저, 유엔사 정보참모부는 1차 공세에 수모를 당하고도, 여전히 “중공군의 개입 규모를 6만여 명 정도로 판단하고 동계이전에 6‧25전쟁을 종료한다”는 안을 건의하였다. 이는 중공군이 1차 공세에서 포획한 미군 포로들을 대거 풀어 주며, 이들에게 “중공군이 불과 6~7만에 불과하다”거나,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본국으로 철수한다”는 정보를 흘림으로서 유엔군의 북진을 계속 유도하는 교활함에 휘말린 오판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병력 현황을 보면, 국군 등 유엔군 총 42만 명(육군 30여만) 중 1950년 11월 24일, 북진 참가부대는 미군 4개 사단, 국군 6개 사단, 영국, 터키 여단 등 13만여 명이었고, 중공군은 제13병단 23만여 명과, 한반도에 들어온 제9병단 15만 명 등 30개 사단 30여만 명과 북한군 12개 사단 등 47만여 명으로 공세작전을 전개하여 전세를 바꾸었다. 1차공세 이후, 이미 수십여만 명의 중공군이 야음을 틈타 교량보다는 압록강의 얕은 여울 등을 통과하여 증원되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맥아더’는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다”며, 서양 최대의 경축일인 “크리스마스 전까지 한국전쟁 종결”을 목표로, 다시 한번, 대규모 병력으로 ‘X-mas 공세’를 개시하였다. 1차 공세 직전에는 그 목표가 “추수감사절을 일본에서 즐길 것”이었는데... 어쨌든, 기세등등했던 맥아더의 X-mas 공세는 ‘오판에 의한 눈먼 행진’이었다.
병력 규모 등 적정에 대한 오판도 치명적인 오판이지만, 더욱 주목할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북진정책에 대한 전략적 실책이다. 맥아더는 신속한 북진을 위해, 남북으로 뻗은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미8군사령관 ‘워커’의 통제를 받는 미제 1군단과 9군단을, 동쪽에는 맥아더가 직접 통제하는 미제 10군단에게 작전 책임을 맡기고 ‘최대한 신속하게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선까지 진격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우세한 상태에서 도로위주의 단순한 북진정책이었다지만 각 군단 간의 간격과 지휘계통이 다르니 인접부대 간의 협조가 어려웠다. 이들은 상호협조, 상호연결보다 각각 독자적인 북진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낭림산맥을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의 전투지경선 간격이 약 80Km 정도 크게 이격되어, 산지 좌우에 집중적으로 잠입한 중공군에게 큰 침투공간을 제공하여, 미군이 인지하지 못했던 커다란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파죽지세로 그저 북진만 하려는 유엔군 군단내 각 사단들은 같은 접근로에서 동료를 뒤따라가기보다, 좋지 않더라도 다른 길을 택하여 경쟁적으로 진군하였다. 앞뒤 간격마저 벌어진 셈이다. 이를 보는 중공군은 더 교활했다.그들은 유엔군의 총공세에 하루 정도 ‘패주하는 것처럼’ 수세에 몰리는 척하며 미군을 유인하다, 미군의 약점을 파고들며, 11월 25일 전 전선에서 ‘원산-평양’선을 향하여 일제히 공세로 전환하였다. 결과적으로, 맥아더의 치명적인 전략적인 오판으로 전후좌우 상호협조없이 분산된, 연대, 사단 정도의 국군과 유엔군 부대는 군단급 이상의 병력으로 공격을 가하는 중공군의 우회기동과 포위작전으로 각개격파되었다.
한편, 오판을 거듭하는 미군에 비해, 북경에서 전선을 지휘하던 ‘마오쩌둥’은 이번에는 약한 연결고리인 ‘국군’을 노리기보다, 좀 더 대담하게 동부, 서부 별로 미군의 1개 사단씩을 직접 노리고 매복과 포위작전을 구사하였다. 이에따라, 서부전선에서는 미 2사단이 ‘군우리’ 지역에서 중공군 매복으로 사단이 붕괴되었고,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당한 미 해병1사단의 처절한 전투가 이어졌다.
이처럼, ‘반격을 통한 공세로의 전환’이, 중공군의 제2차 전역인 11월 공세였다. 화력의 열세를 염두에 둔 중공군은 1차 공세처럼, 작전시간과 형태를 달리하여 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비선형 전투를 수행하며 유엔군의 우세를 상쇄하려고 하였다. (이 무렵, 중공은 소련으로부터 차량 3,000여 대를 지원받아 보급문제를 개선하였고, 소련의 항공지원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 8군의 방어선이 뚫리자, 수많은 중공군이 커다란 돌파구 속으로 파도처럼 몰려와 끊임없이 남하를 시도했다. 이처럼, 1차 공세보다 훨씬 큰 2차 공세로 인하여, 11월 말 청천강까지 진출한 연합군은, 적의 강압으로 단기간에 평양-원산 방어선으로 밀리다가 급기야 38도선 상까지 밀리는 “청천강 도미노”라는 엄청난 ‘철수’를 경험하게 된다.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서부전선 상황은 급변하였다. 중공군의 공세를 못 이긴 국군 2군단이 이번에도 무질서하게 전선을 이탈하자 미 8군은 우측방이 노출되었다. 미 8군은 중공군의 추격 회피와 저지선 방어력 강화를 위해 전선을 축소하여 청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미 제1군단, 제9군단에게 철수 명령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전선의 상황은 미 1군단의 철수도 쉽지 않았고, 중공군 제38군, 40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미 9군단의 철수는 더욱 어려웠다.
한편, ‘군우리(軍隅里)’ 일대를 방어하던 미 9군단 소속 미 제2사단 예하 ‘터키’ 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집중공격으로 심대한 피해(터키군은 군우리 전투에서 포로가 되기보다 죽기로 싸웠다)를 입고 철수하자, 측방이 노출된 미 2사단은 ‘성천’ 일대의 미 제7기병사단과 연결작전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제38군 113사단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14시간 동안 70여 km를 강행군하여 이미 ‘군우리’에서 ‘순천’에 이르는 철수로를 점령, 차단하고 계곡 좌우측 능선에 매복하여 미 2사단의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 2사단장 ‘카이저’ 소장에게는 2개의 철수로가 있었으나, 철수에 양호한 도로는 그 일부가 인접부대 관할이었다. 군 작전에서 ‘전투지경선’의 의미에 충실한 ‘카이저’는 양호한 도로보다 자신이 관할하는 ‘애로’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패착이었다. 계곡으로 이어진 15km의 ‘애로’를 통과하는 동안, 주변 산악을 미리 장악한 38군은 맹공을 퍼부었다. 공군이 근접지원으로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지만, 가다가 서다가를 반복하며 철수하던 7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미 2사단과 터키여단, 국군 3연대가 입은 피해는 막심하였다. 미 2사단은 보병 2개 연대가 섬멸되어 고급장교 등 약 3,000여 명이 사상, 실종되었고, 수백 대의 차량과 60여 문의 야포도 버렸다.
생존한 참전자들이 그때의 참패를 기억하며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따로 없고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전하는 것처럼, 당시의 처절함은 『콜디스트 윈터(데이비드 핼버스탬,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2009.5)』란 책에 그날 참상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차량 한 대가… 당하면 그대로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었고, 몇몇 용감한 군인들이 나서서 차량을 길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공군이 전면 공격을 가했다. 길 중간에는 부상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지만 뒤에 따라오는 트럭이나 지프는 길이 좁아서 그들을 그대로 짓밟고 가야 했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 직면하자 다들 다른 사람의 안위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서 전우들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 다녔다. 주변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죽은 것인지 부상을 입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다들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경상자가 중상자를 부축하여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온 ‘군우리 전투’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미 2사단 장병들은 군우리―순천 간의 애로 지역을 “인디언 태형(笞刑)의 계곡(The valley of Indian Gauntlet)”이라 불렀다. 미 원주민 인디언들이 범죄자에게 가한 형벌인데, 수십 명이 양 열로 죽 늘어선 사이로 범죄자가 통과하면 좌우에서 채찍을 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엄청난 고통을 주던 방식이었다. 적정파악 미숙으로 빚어낸 패전 결과는 가혹하였다. 사단 병력의 80%가 부상하거나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미 2사단은 수많은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백 대의 차량, 야포, 공병 및 통신 장비 대부분을 유기하고 부상병투성이로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한동안 사단의 임무조차 수행할 수 없었다.
미 2사를 공격한 제38군(군장 ‘량싱추’)은 국공내전에서, 나름 위세를 떨친 부대였으나, 지난 1차 공세 때, 국군을 미군으로 오인하여 회피하는 등 소극적 행동으로 사령관 ‘펑더화이’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2차 공세 시 제38군을 "다시 믿어 보자"라며 중책을 맡겼는데, 마침내 미군에게 크게 승리하였다. 승전 보고를 받은 ‘펑더화이’는 “제38군은 전투기의 폭격과 탱크 100여 대의 포격에도 돌격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을 축하하며, 전군에 이를 알린다.”라며 승전을 알렸다. 훗날, ‘량싱추’를 접견한 ‘마오’가 ’만세군 군장’으로 치켜세워, 38군은 중공군에서 ’만세군’으로 불렸다.
미 2사단의 참패는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급히 철수하는 ‘대 후퇴’의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고,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 궤멸시킨 미군은, 중공군을 정부 수립 겨우 1년 차의 신생국 ‘지원군’ 으로 알고 오만하게 중공군을 무시하였다가, 오랜 전투로 전투력이 뛰어난 중공군에게 ‘호되게’ 당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