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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ug 03. 2024

한국전은 미‧중전쟁 (제15화)-혹한이 진정한 승자였다

중공군 제 2차공세 (1950년 11월 25일~12월 10일)

‘장진호 전투’ 


승자 없이 패자만 남긴 혹한의 동계 전투

‘장진호’는 영어로 ‘Chosin’이라고 표기한다. 일본이 만든 지도상 ‘장진(長津)’의 일본어 표기였다. 전후 70여 년이 지났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여전히 'Chosin'이다. 6.25 전쟁 당시, 한반도의 지붕인 개마고원에 위치한 ‘장진호’는 고산지대로 철길은커녕, 높은 산과 호수 사이의 좁은 산길 보급로 외에 우회로마저 없었다. 전투시점 또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시기에, 더구나 그해 겨울은 유독 모질었다.

마오쩌둥은 손자병법을 애독하였던 전술가였다. 손자병법에서는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을 중요시한다. 길만 끊기면 꼼짝없이 고립되는 험난한 지형은 전쟁에서 사지(死地)에 해당한다. 장진호는 천(天)과 지(地)를 거슬린 역리의 전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미군 중 가장 정예라는 미 해병대를 가두어 놓고 전멸시킬 작정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진하던 ‘맥아더’가 미 합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안도와 함경도를 가르는 험준한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부는 미 8군, 동부는 미 10군단으로 지휘계선을 분리하였다. 이에, 동부전선을 책임진 미 제10군단은 전과확대를 위해 원산 상륙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원산만 기뢰제거 등으로 1달 정도 해상에서 맴돌았다. 그동안, 국군이 동해안을 따라 급속하게 전진하여 이미 원산, 함흥을 지나, 10월 20일 개마고원까지 진출하였는데, 미 10군단은 10월 25일에야 뒤늦게 원산에 ‘행정적’으로 상륙하였다. 그 즈음,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 1차 공세를 맞아 고전하다 간신히 청천강 방어선을 확보하고 반짝 공세로 전환하자, 미 10군단도 청천강까지 진출한 서부전선과 전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격을 서둘렀다.    


미 제10군단은, 예하 해병사단이 북진하는 동안 수집한 일부 중공군 포로로부터 장진호 부근에 중공군이 투입된 사실을 보고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북진 속도를 재촉하였다. 이에 따라, 미 해병1사단도 장진호를 거쳐 평북 강계로 전개하였지만, 원산~함흥 도로망에 비해, 함흥~장진호~강계에 이르는 도로는 협소하기 짝이없어 미군 1개 사단의 중장비가 기동하기에 쉽지않았다.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이동하던 미 해병1사단은 11월 24일경에야, ‘강계’로 진출하기 위해 장진호 좌안 ‘유담리’까지 진출하였다. 2차공세 직전이었다.


보다 앞서, 11월 중순, 미 제10군단의 북진 의도를 간파한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미 제10군단을 장진호 부근으로 유인하여 동서 양쪽에서 양익 포위를 하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유인 격멸 작전이다. 그리고, ‘마오’는 동부전선 제9병단 사령관 ‘쑹스룬(宋時倫)’에게, 미군 중에서도 가장 정예부대라는 미 해병 제1사단을 겨냥하여 장진호에서 전멸시켜라!”고 지시하였다. ‘마오’의 명령을 받은 ‘쑹스룬’은 중공군에서 드물게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에서 매복과 기습의 대가(大家)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에, 제9병단은 예하 15만 병력 중 병참 능력 제한으로 예비대로 돌린 26군을 제외한 제20, 27군 등 2개 군 8만여 명으로 11월 21일까지 장진호 일대를 포위하고 매복에 들어갔다.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은 ‘도로가 아닌 산 능선을 타고’ 밤에만 이동하여, 장진호 주변 산 정상에 매복하였지만, 미 정보당국은 전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미 해병1사단은, 11월 26일에서야 군단으로부터 ‘중공군이 매복하여 자신들을 포위 중’이라는 정보를 전달받았다. 후일,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그토록 수많은 병력이 거의 1주일 이상 미군 항공정찰에 발각되지 않은 것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하 30도 이하의 혹한에 8만의 병력이 며칠 동안씩 항공정찰을 피하여 고산지대에 은밀하게 매복해 있을 거라고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도 상상을 못했던 것 같다. 미군의 잣대로는 장진호 주변의 전장 환경은 그야말로 ‘극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1월 27일 밤부터, 9병단은 첫 공격을 개시했다. 이후, 낮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밤만 되면 달려들었다. 중공군무기는 박격포와 수류탄 공격이 주요 수단이었다. 수류탄은 투척거리가 30여 m여서, 미군에게 최대한 접근한 뒤 수류탄을 던지고 죽어갔다. 그러면, 또 다른 중공군이 어디선가 달려들고… 이른바, ‘인해전술’이라고여겼던 돌파였다. 이런 전투가 밤새 이어졌다. 미군 최강 미 해병도 그 엄청난 현실에 얼이 빠졌다.


영하 30도의 추위라면,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기만 해도 쩍쩍 달라붙고, 화포나 총기도 윤활유가 얼어 작동이 어렵다. 그러니, 추위나 야간에는 총보다 수류탄이 더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통신수단이 열악한 중공군은 피리, 나팔 등을 동원하여 야간에 연락을 취했는데, 미군은 난생처음 밤중에 들은 음산한 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공포에 질렸다. 중공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미군을 격파할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군은 점차 중공군의 전술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매일 밤 같은 시각, 같은 방식으로 공격해 왔고, 공격직전개시 나팔 소리, 호각, 고함 등 어러 소리로 위치를 노출시켜 오히려 미군의 표적이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전황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중공군 공세에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1월 30일, 결국 미 제10군단장은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해병 제1사단도 장진호 서쪽에서 작전 중 철수명령을 받고, 장진호 동쪽에 있던 미 제7사단과 함께 ‘하갈우리―고토리―황초령’을 거쳐 ‘진흥리’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1월 30부터 12월 11일까지 12일 동안 겹겹이 포위한 중공군 속을 뚫고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99.4km에 이르는 해안으로의 공격작전이라는 처절한 피의 철수작전에 들어섰다. 이 기간 중 5일간 밤낮을 적 공격 속에 혈로를 뚫고 나온 생환자는 당시의 1분 1초가 미 해병 역사상 가장 참혹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해병부대가 극한상황 속에서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 해병이라는 '엘리트 의식'과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는 투혼이,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트럭에 옮기는 미군들. 이들은 극한상황하 철수간에도 시신을 수습하였다

실제, 당시 전장의 상황이 얼마나 나빴는지는, 동해상 항모에서 발진한 미 해군 함재기 F4U 수십 기가 계속 미군 철수를 근접엄호하였고, 포위한 중공군의 빈약한 무기체계와 전술적 졸렬함으로 적 그 자체는 큰 위협이 아니었는데도, 해병1사단이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22km 거리를 철수하는 데 시간당 평균 286m의 속도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보면 영하 30~40도의 추위 속의 전투 상황을 잘 알려준다. 


그런데, 예감일까? 이런 엄청난 상황을 미리 예견이나 한듯, 전략적 식견이 뛰어난 ‘스미스’ 사단장은 적 공격 바로 직전인 11월 19일,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에 공중보급과 환자수송을 위한 임시활주로 건설을 지시했다. 이게 미군의 체면을 살렸다. 겹겹이 둘러싼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할 때까지, 미 해병1사단 요원 1만 5,000여 명 중 전사상자 4천여 명, 비전투사상자 7,000여 명인데, 부상자 대부분이 위중증 동상환자로, 이 활주로에서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장진호 동쪽으로 진출하다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미 해병에 합류하였던 미 육군 제7사단의 전사상자는 이보다 훨씬 컸으며, 국군의 피해는 미 7사단의 절반 정도였다.


한편, 미 해병의 철수를 저지하고 추격하였던 중국 제9병단의 20, 26, 27군 예하 7개 사단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제9병단 대부분은 중국 남방지역 출신으로 추위에 취약했다. 이들은 남방에서 대만 공략을 준비하다가 갑작스러운 이동 지시를 받고 만주로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항미원조 지원군’이라고 통보받았다. 제대로 된 월동 장비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이들은, 11월 7~21일간 야간에 압록강을 도하하여 21일 새벽에 장진호 주변에 집결했지만, 이들을 맞이한 것은 영하 30~40도의 혹한과 살을 에는 듯한 강풍이었다.


극한의 추위에도 제9병단 보급상황은 전투는커녕생존조차 어려울 정도로 비참한 수준으로, 의식주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낮에는 미군의 항공정찰을 피하도록 일체 불을 피우지 못해 데운 음식 대신, 찐쌀, 옥수수 미숫가루로 허기를 달래고, 물대신 얼음을 섭취하여 배앓이 환자가 속출하였다. 그리고, 소변조차 바로 얼어 버리는 혹한에서는 용변 등 생리적 문제 해결은 커다란 도전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겨우, 불을 피워 돌이나 물을 데운 뒤 그걸 천으로 감싸 안고 잠시 야지에서 수면을 취하였지만, 한밤중에 작전이 개시되면 다시 미군 공격에 나서야 했으니 중공군의 피로도는 극심하였다. 이런 강추위에서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옷을 여러 겹 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어 손과 발은 동상으로 하얗게 변하고, 수통의 물도, 전투식량도 얼어 버린다. 이처럼, 열악한 숙식과, 혹한 속에서 장갑, 방한화 등 제대로 된 월동 장비도 없이 장기간 매복하거나, 고무를 댄 천 운동화를 신고 기동하다 보니 대부분의 중공군은 손발이 동상에 걸려 이를 잘라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도 ‘마오쩌둥’은 마지막 살아남은 한 명이 아군이라면 우리가 승리한 것이다라며 미군을 포위한 제9병단을 독려하였지만, 경무장이었던 중공군은 비록, ‘독 안에 든 쥐 신세’지만 막강한 화력과 공군의 지원을 받는 미군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물론, 중공군은 정면 공격보다, 산악지형을 통한 기습, 우회, 포위 공격으로 미군을 괴롭히며 최소한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공격마저도 전투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그 강도가 약화되었다. 제9병단은 미 해병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항공폭격이나 화포, 전차 포격으로 많은 전투력을 상실하였지만, 혹한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적지 않았다. 장진호 전투 이후, 제9병단은 약 6만여 명의 병력을 보충받고 무려 4개월 동안 재정비 기간을 가진 후에야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수만여 병력이 재정비하느라 당시의 38선 남쪽 전투에 한동안 불참하여 중공군으로서는 ‘결정적 시기’를 놓쳤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미 해병1사단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중공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하였고, 바로 이어서 ‘흥남 철수’ 작전에 기여하였다. 일종의 전략적 승리였다. 그런데, 미 해병이 탈출에 성공한 것은 중공군이 ‘공격에 유리한 곳에 병력을 집중배치 하지 않고, 포위를 위해 병력을 분산배치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공군은, 미군을 포위하기 위해 사전에 높은 고지와 주요 목진지 등 중요 지형지물을 미리 점령하였지만, 강추위를 견딜 변변한 방한복이 없어 얼어죽는 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오히려 철수하던 미군이 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미군들은 후퇴할 때, 중공군이나 국민당군처럼 산을 넘어 도망하지 않고, 차량으로 도로를 따라 이동했기 때문에 포위를 위해 산악 지역까지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중공군의 전투 수행방법도 문제였다. 자동차 등 기동수단이 없는 중공군 병사들은 기동 간 항상 빠른 행군속도를 강요받아 설령, 겨울용 두툼한 솜옷을 입었으도 뛰다시피 달려야 했다. 계속 달리다 보면 금방 땀으로 몸이 젖는데, 영하 30도를 웃도는 추위에 땀에 젖은 솜옷으로 짧은 시간이라도 눈 위에서 엎드리거나 매복하다 보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관련하여, 중국 군사과학원의 ‘항미원조 전쟁사’에 따르면, 1950년 12월 8일 장진호 지역 밤 기온이 영하 40도 이하로, 중공군 제27군 80사 240연 1개 중대는 야간전투에서 ‘미군의 제압사격을 피해 잠시 엎드려 있다가, 전원이 전투 대기 상태로 동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영화 ‘장진호’(2021)

2020년, 미‧중 무역분쟁과 COVID-19 발원지 시비로 미국과 감정싸움이 야기되자, 중국은 미국에 항전하는 대미투쟁용, 대 인민 정신교육용으로 ‘장진호’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비록, 절반의 진실이었지만, 이 영화의 끝 장면에 ‘총을 겨눈 채 얼어죽은 병사’를 이른바 ‘얼음 조각’으로 묘사하였고, 이 영화를 시청한 1억 명 이상의 중국인이 ‘눈물을 흘리며, 막판의 승리(?)에 열광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 이런 류의 영화는 시청한 중국인들의 뇌리에 오래 남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군수지원 능력과 관련하여, 피, 아 구분 없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동계작전의 피해였다. 유엔군은 단기전을 예상하고 크리스마스 이전 종전을 목표로 하였고, 중공군은 하절기 복장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준비 없이 뛰어든 장진호 전투에서 혹한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양국 군에게 혹독한 피해를 주었다. 세계 전쟁사의 대표적인 동계작전은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으로, 기후나 지형을 소홀히 하여 역사가 뒤집어진 사례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중공군 약 16만여  명 중 2만여 명이 동사자였다. 이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중공군은 현대전이 군수전 상황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일까?  제9병단 사령관 ‘쏭쓰룬’은 후일 ‘장진호 전투상황 보고’에서, 보급품을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중공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보급체계 전면 개편을 강하게 거론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동계작전에는 보급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가장 처절했던 동계작전의 사례를들면, 1942년 8월~1943년 2월까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초기에 승기를 잡아가던 독일 제6군(사령관 파울루스 대장, 후에 원수)의 약 25만여 병력은 엄청난 병력을 앞세운 소련군에 포위되어 혹한 속에서도 전투를 이어갔지만, 결국은 보급부족으로 기아와 질병으로 시달리던 1개 야전군이 전부 소련군에게 항복한 역사적 전투였다. 히틀러가 군사령관 등 전원을 1계급씩 특진시키면서까지 전투를 독려하였으나, 굶어죽는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은 땅을 잃었고, 중국은 병력을 잃었다. 서로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전투목표도 아리송하여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하였다. 히지만, 객관적으로 몇 배의 인명 손실을 입은 편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미군은 영토를 상실했지만, 2배나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3배의 피해를입혔다. '부시' 전 미 대통령도 재임 중 미 해병1사단을 방문하여, 사단의 장진호 전투 승전을 치하하였다. 참고로, 미군의 6‧25전쟁 명예훈장 수훈자 131명 중 13명이 장진호 전투 생존자였다.


전사(戰史)에는 파로스의 승리라는 표현이 있다. 싸워서 이겨도 아군에 결코 득이 되지 않은 전투를 일컫는 말이다. 제1차 대전 간 북해에 연한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과 독일은 서로 승리를 주장했다. 실제 독일이 우위를 점한 듯하지만, 영국 해군은 제해권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독일 해군은 감히 북해로 진출하지 못했다.

12일간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이나 중공군이 입은 피해를 보면, 전투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보다 얼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50여 년 만의 혹한으로 인해 전투의 승자는 따로 있었다. 아름다운 산하에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자 분노한 동장군(冬將軍)이 이민족 군대에게 징벌을 가한 것일까? 혹한이 진정한 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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