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제 2차공세 (1950년 11월 25일~12월 10일)
중공군의 2차 공세로 미군이 급하게 밀리자, ‘맥아더’는 미합참에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한국전이 악화되었으니, 만주 지역 산업시설 폭격, 대만 국민당군의 한국전 투입, 중국 해안봉쇄, 북한 지역에 ‘원자탄’을 사용할 권한 위임 등이 필요하다”며 미군 병력증강과 만주 지역 폭격과 북한에 대한 원자탄 사용을 건의하고, “아니면,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11월 30일, 이런 건의를 접한 ‘트루먼’도 매우 민감한 ‘원자탄 사용 가능성’을 공식 언급하였다. 그렇지만, 국무장관을 비롯한 참모들은, “한국에서 방어 가능한 저지선을 선정하여 이를 지키면서,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뿐만아니라, 전쟁을 주도하던 미 합참도, ‘한국은 방어의 중요도가 낮으니, 유럽 방어에 우선권을 두어야한다’며, 미군 병력의 보존을 위해 일본으로 철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확전을 꺼리던 미 합참은 “확전이냐? 철수냐?”라는 질문에도, “1948년,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했고, 1949년에 중국을 통일한 중공에게는 여전히 수백 만의 대군이 있어서, 한국 문제로 중국과 전면전을 하기는 불가하다. 만약, 중국 본토를 폭격하면 소련의 개입을 부르고, 장제스군(將介石)을 투입하면 더 큰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다”며 맥아더의 건의를 강하게 반대했다. 게다가, 맥아더의 도움 요청을 받은 ‘콜린스’ 육참총장조차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측방을 장악하고 있는 한, 한반도는 5센트의 가치조차 없다”고 오히려 미군 철수론에 힘을 실었다.
워싱턴에서 미합참과 맥아더가 서로의 논쟁을 벌이는 와중인 12월 2일, 한국의 ‘신성모’ 국방장관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미 합참에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단둥, 선양, 텐진, 베이징, 상하이, 난칭 등 6개 도시에 원자폭탄 투하를 건의했다. 한국 정부도 한반도 북부에 원폭을 투하해 달라고 유엔에 간청한다”고, 원폭의 무서움을 모르는 간 큰 폭탄선언을 하였다. 무지의 소산이었겠지만, 정작 유엔이란 존재에는 원자폭탄이 없었다.
사실, 트루만도 중공군이 만주로부터 보급지원을 받고, 후속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속속 중공군으로 증원되는 상황이 매우 위협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자폭탄 투하’보다 ‘군사적 응징’으로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던 민간 관리들과, ‘유럽 중시’의 미 합참 건의를 수용하였다. 그러면서, ‘원폭 사용 등 확전을 통한 공산군 궤멸’이라는 맥아더의 정세판단과 협박성 대응에 이를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간주하였고, 이는 향후 맥아더 ‘해고의 빌미’가 되었다. 이처럼, 미군 증원과 만주 폭격 등이 거부되자 12월 3일, 중공군 2차 공세에 패배를 자인한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며 북진을 멈추고, 대대적인 철수 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은 6‧25전쟁에서 유엔군이 ‘승리의 의지를 포기한 날’로 기록되었다.
중공군은 2차 공세로 유엔군의 ‘X-mas’ 공세를 되받아치며, 전세를 우세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화력과 기동력 부족으로 국군과 유엔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12월 3일,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서부전선 미 8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공군의 근접지원 아래 차량으로 도로를 따라 철수하였지만, 중부 산악지대에서는 도보로 남진하던 중공군이 산악지대 내 북한군 게릴라의 도움으로 오히려 일부 유엔군 부대의 철수를 앞지르기도 하였다. 자칫, 측후방 위협으로 포위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워커는 “중공군과 접촉 회피로 전력을 보존하고, 신장된 중공군 보급로를 타격한다”며, “북한 전역을 포기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로부터, 미 8군은 불과 2주일간 무려 190km가 넘는 철수 작전으로 38도 선까지 다급하게(?) 적으로부터 이탈하였는데, 한번에 190km의 철수는 미군 역사상 가장 긴 철수로 기록되었다.
이 정도로, 미8군이 제대로 된 정찰 활동조차 하지 않고 허겁지겁 철수하다보니, 자신들과 유엔군을 추격하던 중공군의 병참선이 지나치게 신장되어, 보급지원이 원활치 못하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중공군 주축인 제13병단은 병력 절반 이상이 굶주림으로 고생하여, 중공군 전방 지휘관들조차 미 8군 사령관의 ‘다급한’ 철수지시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편,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하,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전 병력의 ⅓ 이상이 사상되고, 산악지대에서 320Km 나 이동한 미 보병 7사단도 심각한 피해를 입자, 맥아더는 동부전선에도 흥남항에서 해상 철수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정작 동부전선의 중공군은 미 해병1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식량부족으로 거의 궤멸되어, 오히려 잔존 미군의 병력과 화력이 중공군에 비해 더 우세하였던 상황이었다. 동부전선 철수 또한, 유엔군사령부의 또 다른 오판이었다. “만약, 맥아더가 제10군단으로 흥남 일대를 장악하고 동부전선을 보강하였더라면 상황은 바뀔 수 있었을까?” 미 합참은 맥아더가 ‘미 8군은 서부, 미 제10군단은 동부’로 전장을 분리하자, 이를, 연결토록 주장하였으나, 맥아더는 한반도 지형상 양측 연결이 불가능하고, 미 10군단이 중공군 6~8개 사단을 고착 견제하도록 제10군단의 독립작전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오판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는다.
2차 공세에서, 서부전선 ‘군우리’에서 미 2사단과, 동부전선 ‘장진호’에서 미 해병1사단이 경험한 전례에서 보듯, 둘 다 중공군 포위망 탈출 과정에서 각각 30% 이상의 전투력 상실로 재편성을 해야 했지만, 적의 강압에 의한 철수 시에 “얼마나 질서 있게 작전을 수행하였는가?”여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다. 미 해병1사단은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12일간 사투를 벌이면서도 대부분의 장비를 보존하고 오히려, 중공군 제9병단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며 제10군단의 철수에 기여하였다. 반면에, 적진 속을 통과하던 미 2사단은 불과 하루 나절 전투에서 2개 연대가 궤멸되는 막심한 피해를 입고, 전 장비를 버리고 몸만 탈출하여 전선의 재조정이 불가피하였다. ‘펑더화이’가 미 2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38군을 ’만세군’이라 부르며 환호한 이유이다.
중공군 2차 공세에서 미군의 굴욕적인 패배가 가시화되, 일부 군사, 정치 지도자는, 이미 ‘염전사상(厭戰思想)’에 빠지기 시작한 미군의 안전을 위해 한반도 철수론을 공공연히 거론하였고, 유엔 참전국들도 대체로 철군을 주장하였다. 급기야 12월 22일, 미 합참은 국무‧국방 수뇌부 회의를 열고, “만약, 중국의 의도가 유엔군을 한국에서 몰아내는 것이 명백하다면, 가능한 한 빠른 시일안에 미군을 철수시키자”며 ‘한국 포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건의는 트루먼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서울에서는, “미국이 한국을 중국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며 조야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중공군 2차 공세에서 국군 2군단이 청천강 방어선에서 무너진 이래, 도미노처럼 38도 선까지 철수 작전을 단행하였던 미 8군과,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여 부산, 마산 등지에 상륙한 미 10군단은, 12월 23일에서야 간신히 넓은 정면에 엷은 종심으로 38도 선상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전선은 여전히 극도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패색이 짙게 드리운 유엔군에게 설상가상으로, 12월 23일, 초대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하고 복귀하던 중, 서울 북방(현 워커힐)에서 의정부에서 남하하던 한국군 트럭과 충돌 사고로 순직하였다. 순직한 ‘ 워커’ 장군은 6‧25전쟁 초기 ‘낙동강전선’ 사수의 주역이었다. 그는 당시 낙동강 전선에 ‘워커 라인’을 설정하고, “더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Stand or Die(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며 진지 사수의 항전 의지를 다진 결과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냈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여, 한국을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었다.
사실, 개전 초기에, ‘워커’ 장군이 상대했던 북한군은, ‘T-34형 소련 전차를 앞세우고, 도로를 따라 급속하게 남진하던 방식’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전투에 참전한 미군에게는 매우 쉬운 상대였다. 미군도, ‘북한군처럼 진격 시 ‘화포로 적 지역을 때리고 나서, 전차를 앞세우고 도로 따라 전진’하던 군대였으니까..., 하지만, 적이 바뀌어 주로 야간에 나타나 산악 지역으로 우회침투하여 미군의 ‘허리를 자르고, 달려드는’ 중공군을 상대하기에 익숙지 않았다. 단기간에, 미군이 급속하게 밀렸던 이유다.
공세가 끝나자, 기세등등한 중공군은 제2차 공세에서 “…불과 2주 정도의 공세로, 단숨에 청천강에서 38도 선까지 200km 이상을 전진하였고, 전투 및 비전투 사상자로 4만 5천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미군 2만 4천, 국군 1만 2천 등 3만 6천여 군인을 살상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에,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미군 피해가 1만 7천여 명이라 반박하면서도, “미군 역사상 최악의 굴욕을 맛보았다”고 처절한 패배를 자인하였다.
중공군은 스스로도 제2차 공세를 기동전 단계 중 가장 우수한(?) 전역으로 평가한다. 그만큼, 미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제2차 공세를 맞이한 패배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하였던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하여 미8군과 미 제10군단의 지휘통제 체제를 분리'하여 두 부대 간에 80Km의 큰 간격이 생기고, 중공군이 이를 파고들게 했다는 전략적인 실책이었다. 그리고, 전술적인 면에서도 ‘맥아더’ 사령부가 중공군의 낯선 전법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포로 심문 자료 등 인간 정보를 가볍게 대하였으며, 기도비닉이 철저한 중공군의 은폐술을 모르고, 대낮에 실시한 항공정찰 등 정확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제한된 정보수집으로 정보판단이 부정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기초로 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전투에 임하다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반면에, 중공군은 ‘삼국지’나 ‘초한지’에 등장하는 인물로부터 물려(?) 받은 고대 전략까지 십분 활용했다. 그들은 유엔군의 전략상 오판과 오만 심리를 이용하여, 최초 유엔군의 X-mas 공세에는 ‘밀리는 척’ 중공군을 가볍게 보도록 유인한 뒤, 대담한 우회포위를 실시하여 역공을 가하는 작전 등으로 예상보다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미군의 더 큰 오판을 유도하여 ‘수세에서 공세’로 국면전환의 모멘텀이 되었고, 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에게 승리의 믿음을 주었다”고 자평한다.
사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감행한 5차례 기동전 중에서도, ‘청천강 방어선을 돌파한 2차 공세(전역)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3년간의 한국전에서 전쟁의 양상을 극적으로 뒤바꾼 전역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10월 25일까지 불과 40여 일만에 압록강변에 도달하였다. 반면에, 중공군은 11월 25일부터 12월 23일까지 약 28일여 만에 38선까지 되돌려 놓았다. 그럼에도, 전자가 단기간 승리에 영향을 미쳤다면, 후자는 충격의 여파가 유엔 측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이유로 해외의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인천상륙 작전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약간 과장되지만, 중공군의 ‘청천강 전역’을 제2차 세계대전의 ‘미드웨이’ 해전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교한다. 극동의 ‘국지적 분쟁’을 세계열강의 각축전으로 발전시킨 ‘세기의 결전’으로 평가하는 것이다.